1장 여섯 번의 충격과 한 번도 없었던 전환
1.1 위기의 연대기: 1973~2026
2026년 3월, 이란의 호르무즈 봉쇄 선언이 떨어진 지 나흘째 되던 날, 서울 여의도의 한 정유사 임원실에서는 같은 문장이 반복됐다. ‘이 상황, 어디서 본 것 같지 않습니까.’ 누군가는 1973년이라고 했고, 누군가는 1979년이라고 했다. 틀리지 않았다. 두 건 다 맞는 말이었다.
이 글이 다루는 핵심 질문 가운데 하나는, 왜 대한민국은 같은 위기에 53년째 같은 방식으로 반응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 답을 찾기 위해 우리는 먼저 여섯 번의 충격을 하나씩 돌아봐야 한다. 충격의 내용이 아니라, 충격 이후 우리가 무엇을 선택했고 무엇을 선택하지 않았는지를 살피는 작업이다.
역사의 나열이 목적이 아니다. 반복 패턴의 해부가 목적이다. 여섯 번의 위기를 겪으면서도 대한민국의 에너지 수입의존도는 사실상 동일한 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2023년 기준 93.9%라는 수치는 단순한 통계가 아니다. 그것은 53년간의 정책 선택이 축적된 결과다.
[그림 1-1] 대한민국 에너지 수입의존도 추이 (1970~2023) | 출처: 에너지경제연구원, 에너지통계연보
▌ 충격 ① 1차 오일쇼크 (1973) — 첫 번째 경고를 흘려보낸 해
1973년 10월 6일, 이집트와 시리아가 시나이반도와 골란고원을 향해 동시에 공격을 개시했다. 4차 중동전쟁의 시작이었다. 이스라엘을 지원한 미국과 서방에 대한 보복으로 아랍석유수출국기구(OAPEC)는 10월 17일 원유 수출 금지를 선언했다. 이른바 ‘아랍의 석유 무기화’였다.
배럴당 3달러였던 원유 가격은 5개월 만에 12달러로 치솟았다. 4배 폭등이었다. 이 충격이 세계를 강타했을 때 대한민국의 경제 규모는 지금과 비교도 안 될 만큼 작았지만, 에너지 의존 구조는 오늘과 본질적으로 같았다. 국내에서 생산되는 에너지는 거의 없었고, 필요한 것은 전부 사야 했다.
당시 대한민국 정부의 대응은 세 가지였다. 가로등 소등, 냉난방 온도 제한, 차량 운행 제한이었다. 전형적인 절약 캠페인이었다. 에너지를 덜 쓰자는 것이지, 에너지를 어디서 어떻게 가져올 것인지를 근본적으로 바꾸자는 것이 아니었다. 1974년 석유 수입은 오히려 전년 대비 증가했다. 가격이 올라도 총소비량은 줄어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같은 위기 앞에서 다른 선택을 한 나라들이 있었다. 1973년의 충격은 국제에너지기구(IEA) 설립의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미국 헨리 키신저의 주도로 1974년 11월 창설된 IEA는 오일쇼크의 재발에 대비해 전략비축유 공동 방출, 수요 긴급 감축, 에너지 효율화 협력 등의 집단 방어 체계를 구축했다. 덴마크는 이 시기부터 재생에너지 기술 개발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1978년에는 세계 최초의 대형 풍력발전기 ‘Tvindkraft’가 돌아갔다.
대한민국은 IEA에 가입조차 하지 않았다. 당시 대한민국의 국제적 위상은 OECD 회원국이 아니었다는 이유로, 그리고 산업화의 가속이 더 긴박한 과제라는 이유로, 집단 방어 체계 구축은 우선순위에 오르지 못했다. 대한민국이 IEA에 가입한 것은 무려 22년이 지난 1996년의 일이었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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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 안보의 본질은 공급의 신뢰성(reliability)이다. 어떤 조건 하에서도 경제 기능을 유지할 수 있는 충분한 에너지를 적정 가격에 확보하는 것.”
— Yergin, D. (1988). Energy Security in the 1990s. Foreign Affairs, 67(1). [2]
Yergin이 1988년에 내린 이 정의는 1973년 충격에 대한 회고적 해석이기도 하다. 공급의 신뢰성을 위협받았을 때, 그 위협에 대응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단기 충격 완충(비축)과 구조적 취약성 해소(전환). 1973년 대한민국이 선택한 것은 전자의 맹아조차 미약한 수준이었다. 후자는 의제 자체로 오르지 못했다.
▌ 충격 ② 2차 오일쇼크 (1979) — 구조가 아닌 전력만 건드린 대응
1차 충격으로부터 6년이 지났다. 1979년 1월 이란의 이슬람 혁명이 팔레비 왕조를 무너뜨렸다. 이란의 석유 생산이 급감했고, 이듬해(1980년) 9월이란-이라크 전쟁이 발발하면서 페르시아만의 산유 역량은 더 큰 타격을 받았다. 1978년 배럴당 13달러였던 원유 가격은 1980년에 35달러를 돌파했다.
대한민국 경제는 직격탄을 맞았다. 1979년 경제성장률이 급락했고, 1980년에는 -1.6%라는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박정희 대통령 암살(1979.10.26), 12·12 군사반란,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겹쳤던 격동의 시기에 에너지 위기는 경제적 타격의 핵심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
이 위기가 낳은 유일하게 구조적인 결과는 원자력 발전의 가속화였다. 이미 1978년 4월 고리 1호기(587MW)가 가동을 시작한 상태였다. 2차 충격 이후 정부는 원전 확대 계획을 더욱 빠르게 밀어붙였다. 1980년대를 거치면서 월성·영광·울진 원전이 차례로 건설됐다. 원자력은 분명 에너지 다양화의 한 축이었다. 발전 부문에서 화석연료 의존도를 낮추는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이 선택에는 치명적인 한계가 있었다. 전기는 산업과 가정의 에너지 소비 가운데 일부일 뿐이었다. 수송 부문은 여전히 석유에 100% 의존했다. 산업용 열(steam)과 공정 에너지도 마찬가지였다. 원자력은 전력망이라는 한 칸만 해결했고, 나머지 칸은 그대로 중동 원유에 묶여 있었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원자력은 화석연료 의존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화석연료의 종속'이었다. 우라늄도 수입해야 했다. 수입처는 달랐지만, 국내에서 생산할 수 없다는 구조는 동일했다. 원자력 집중이 화석연료 의존도를 심화하는 또 다른 문제에 직면한 것이다.
[그림 1-2] 대한민국 발전원별 비중 변화 (1975~2010) | 출처: 에너지경제연구원, 에너지통계연보
▌ 충격 ③ 걸프전 (1990~1991) — 집단 방어 체계 밖에서 맞은 세 번째 위기
1990년 8월 2일 이라크군이 쿠웨이트를 침공했다. 24시간 만에 쿠웨이트는 점령됐다. 국제사회는 이라크에 대한 경제 제재와 군사적 대응을 논의하기 시작했고, 이듬해 1월 17일 미국 주도의 다국적군이 '사막의 폭풍' 작전을 개시했다.
이 위기는 1·2차 충격과 성격이 달랐다. 1차·2차는 산유국의 의도적 무기화였지만, 걸프전은 산유국 간의 전쟁이었다. 공급 차단이 아니라 공급 불확실성이 시장을 흔들었다. 배럴당 15달러 수준이던 원유는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직후 30달러를 넘어섰다가, 다국적군의 신속한 군사 우위가 명확해지면서 다시 하락했다.
그러나 이 위기에서 드러난 대한민국의 취약성은 가격 충격 그 자체보다 더 심각한 것이었다. 대한민국은 아직 IEA 회원국이 아니었다. IEA는 걸프전 당시 전략비축유 공동 방출 결정을 내렸다. 회원국들은 협력 체계 안에서 충격을 분산했다. 대한민국은 그 체계 밖에서 혼자 시장 충격을 고스란히 받았다.
대한민국은 이 전쟁에 의료지원단 154명을 파병했다. 중동과의 경제적 관계 관리라는 외교적 고려가 작동한 결과였다. 파병을 결정하면서도 에너지 공급 체계의 구조적 취약성에 대한 논의는 전면에 오르지 않았다. 대한민국이 IEA에 가입한 것은 걸프전으로부터 5년이 더 지난 1996년이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시기에 걸프전의 배경이 된 중동 의존도 문제를 가장 예리하게 진단한 문헌이 국내에서도 등장했다는 점이다. 에너지경제연구원은 1990년대부터 에너지 안보의 구조적 문제를 지적하는 보고서들을 내놓기 시작했다. 이 글에서 인용한 2003년도에 작성된 보고서는 그 계보 위에서 나온 가장 체계적인 진단서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진단과 정책 결정 사이에는 항상 넓은 간극이 있었다.
▌ 충격 ④ 이라크 전쟁 + 유가 급등 슈퍼사이클 (2003~2008) — 다변화라는 이름의 반쪽 대응
2003년 3월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했다. 대량살상무기(WMD) 보유를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국제사회의 합의 없이 시작된 이 전쟁은 중동 지역 불안정을 새로운 국면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이 전쟁 자체보다 대한민국 에너지 시스템에 더 큰 구조적 충격을 준 것은, 그 뒤 5년에 걸쳐 진행된 유가 '슈퍼사이클'이었다.
2003년 배럴당 30달러 수준이던 원유 가격은 2008년 7월 147달러를 찍었다. 5년 사이에 5배 가까이 폭등했다. 이 상승의 배경은 복합적이었다. 이라크 혼란으로 인한 공급 불안, 중국·인도의 급격한 에너지 수요 증가, 달러화 약세, 투기 자본 유입이 겹쳤다.
대한민국의 에너지 수입 비용은 이 기간 GDP 대비 급증했다. 2000년대 초반 40조 원대이던 에너지 수입액은 2004년 처음 50조 원을 넘어섰고, 2008년에는 150조 원을 넘어섰다. [3]
[그림 1-3] 국제 원유 가격과 한국 에너지 수입액 동조화 (2000~2010) | 출처: 무역협회, 한국은행 환율 자료, 에너지경제연구원
이 충격 앞에서 처음으로 '에너지 다변화'가 대한민국의 공식 정책 언어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중동 이외 지역—아프리카, 카스피해, 남미—에서 원유를 사들이거나 개발하려는 시도가 본격화됐다. 2008년 출범한 이명박 정부는 이 흐름을 '자원외교'라는 이름으로 대대적으로 밀어붙였다.
그러나 이 '다변화'는 구조를 바꾸지 않았다. 다변화의 핵심 질문은 '어디서 사느냐'였지, '무엇을 사느냐'가 아니었다. 중동 산유국 대신 아프리카나 카스피해에서 원유를 사더라도, 그것이 화석연료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수입 에너지 의존 구조는 그대로였다.
이명박 정부의 자원외교는 이후 수십조 원의 손실을 낸 실패로 기록됐다. 2013년 감사원 감사에서 해외 자원개발 사업의 회수불능 손실액도 수조 원에 달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다변화'가 실패한 것이 아니었다. '다변화'라는 이름으로 불렸지만 실제로는 고위험 자원 투기에 가까웠던 접근법이 실패한 것이었다.
이 시기에 진정한 에너지 전환의 논의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명박 정부는 '녹색성장'을 국가 전략으로 채택했다. 그러나 녹색성장은 재생에너지를 에너지 안보 수단으로 정의하지 않고, 미래 산업과 일자리 창출의 프레임으로 설계됐다. '화석연료 수입 의존을 낮추는 전략'이 아니라 '새로운 성장 동력 발굴'이 논리였다.
▌ 충격 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2022) — 유럽은 전환했고 한국은 버텼다
2022년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전면 침공했다. 이 전쟁은 단순한 지역 분쟁이 아니었다. 에너지 지정학의 패러다임을 바꾼 사건이었다. 유럽은 러시아산 가스에 40% 이상 의존하고 있었다. 전쟁이 시작되자 에너지가 지정학의 무기가 되는 것을 전 세계가 실시간으로 목격했다.
유럽 LNG 현물 가격은 2022년 8월 MWh당 340유로를 넘어섰다. 전쟁 이전 대비 10배 수준이었다. 이 충격은 LNG를 대규모로 수입하는 한국에 즉각적으로 전달됐다. 한국가스공사는 2022~2023년 국내 가스 요금 인상을 억제하면서 미수금을 누적시켰다. 2023년 말 기준 민수용 미수금만 13조 원에 달했다. [4]
한국의 에너지 대응은 이전 위기들과 구조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단기 충격 완충—비축 방출, 요금 인상 유보, 수입처 다변화 모색—에 집중했다. 재생에너지 확대가 이 위기를 예방하거나 완화하는 수단이 될 수 있었다는 논의는 정책의 전면에 오르지 않았다.
그 사이 독일은 다른 선택을 했다. 러시아 가스 의존 비율이 높았던 독일은 단기 정책으로 석탄 발전소 재가동, 수기의 LNG 터미널(FSRU)을 8~9개월 내 가동을, 장기 전환 과제로 재생에너지 80% 목표를 동시에 추진했다. 같은 위기가 어떤 나라는 전환의 계기가 됐고, 어떤 나라는 버티다 넘기는 사건이 된 것이다.
전쟁 이전 최저점이었던 한국의 중동 원유 의존도(2021년 59.5%)는 러우전쟁 이후 다시 반등했다. 2025년 기준 한국의 중동 원유 의존도는 68.8%로 반등했으며, 한국석유공사는 2024년 기준 72%로 보고하고 있다. [5]
이 수치가 말해주는 것은 단순히 '다변화에 실패했다'는 것이 아니다. 더 근본적인 메시지가 있다. 중동 의존도를 낮추는 '다변화'가 정책 목표로 설정됐을 때도, 위기가 오면 다시 중동으로 돌아가는 인력(引力)이 작동한다는 것이다. 그 인력의 이름은 '수송비 저렴, 장기계약 안정성, 물량 규모 우위'다. 다변화 선언만으로는 이 인력을 이길 수 없다. 구조를 바꿔야 한다.
▌ 충격 ⑥ 호르무즈 봉쇄 (2026) — 53년 만의 같은 장면
2026년 3월,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 봉쇄를 선언했다. 프롤로그에서 묘사한 장면이 바로 이 충격의 첫 모습이다. 코스피는 4일 만에 7% 하락했다. 동북아 가스 현물 가격은 하루 만에 40% 치솟았다. 정부는 IEA 역대 최대 전략비축유 공동 방출에 참여했다. 한국의 비축분은 208일 치—IEA 의무 기준인 90일의 2.3배, 세계 6위 규모—였다. 하지만 208일 치 비축유라는 숫자에는 중요한 해석이 필요하다. 단순히 비축량이 많다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질문이다. 만약 한국이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을 50%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면, 호르무즈 봉쇄가 코스피와 가스 가격에 미친 충격의 크기는 달라졌을까. 답은 명확하다. 달라졌을 것이다.
[여섯 번의 충격과 한국의 대응 — 반복 패턴 종합]
반복의 구조: 53년이 바꾸지 못한 것
여섯 번의 충격을 나란히 놓고 보면 하나의 패턴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한국의 에너지 위기 대응은 항상 두 가지 중 하나였다. 절약이거나, 비축이거나. 그리고 두 가지 모두 '현재의 에너지 공급 구조를 유지한 채 충격을 흡수한다'는 논리 위에 서 있었다.
이 패턴에서 단 한 번 벗어난 듯 보이는 것이 2차 충격 이후의 원자력 확대였다. 그러나 앞서 살펴봤듯, 그것은 에너지 시스템의 전환이 아니라 전력 부문의 부분적 변화였다. 수송·산업·열 부문의 화석연료 의존은 건드리지 않았다.
2023년 기준 한국의 에너지 수입의존도는 93.9%다. 1차 오일쇼크가 있었던 1970년대와 이 수치는 사실상 동일하다. 53년이 흘렀다. GDP는 100배 이상 커졌다. 기술은 비교할 수 없이 발전했다. 그런데 에너지를 스스로 조달하는 비율은 변하지 않았다. [6]
왜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한국 에너지 정책의 30년 내부 기록을 들여다봐야 한다. 그러나 그에 앞서 비축유 208일이라는 숫자에 대한 해석에 대해 한번 들여 봐야 한다.
1.1절 핵심 명제
① 여섯 번의 충격, 그러나 한 번도 없었던 구조적 전환.
② 한국의 에너지 위기 대응 패턴은 항상 '절약 또는 비축'이었다.
③ 에너지 수입의존도 93.9%는 53년간의 정책 선택이 축적된 결과다.
④ 같은 위기 앞에서 독일은 전환했고, 덴마크는 50년 전에 이미 전환을 시작했다.
⑤ 이 글의 과제: 반복을 끊는 구조 전환이 왜 필요하고 어떻게 가능한가.
▌ 이 절의 주요 참고문헌
[1] 도현재 (2003). 21세기 에너지안보의 재조명 및 강화 방안. 에너지경제연구원 기본연구보고서 03-07.
[2] Yergin, D. (1988). "Energy Security in the 1990s." Foreign Affairs, 67(1), 110–132.
[3], [4] 에너지경제연구원. 에너지통계연보 및 에너지수급동향.
[5] 한국석유공사(2024).
[6] 에너지경제연구원. 에너지통계연보 및 에너지수급동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