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중동 회귀의 경로 의존성

by 이주헌

1부 반복의 구조

1장 여섯 번의 충격과 한 번도 없었던 전환


1-3 중동 회귀의 경로 의존성


이명박 정부의 자원외교가 실패로 판명된 지 불과 수년 뒤였다. 수십조 원의 손실을 낸 '다변화' 정책이 남긴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중동 의존도의 고점 경신이었다. 자원외교가 한창이던 이명박 정부 시기인 2011년, 한국의 중동 원유 의존도는 87.1%로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 2016년에도 85.9%로 두 번째 고점을 찍었다.


그 후 5년, 문재인 정부의 에너지 전환 정책과 국제 시장의 구조 변화가 맞물리면서 중동 의존도는 2021년 59.8%까지 낮아졌다. 10년 만에 27% 포인트 이상 줄었다. 그러나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면서 이 수치는 다시 올라갔다. 2023년 기준 71.9% 수준이다.


이 패턴을 하나의 그래프로 그리면 뚜렷한 형태가 나타난다. 위기가 오면 중동 의존도가 오르고, 안정기에 다변화를 선언하면 조금 낮아지지만, 다음 위기가 오면 다시 올라가는 톱니바퀴 모양이다. 이것이 이 절이 분석하는 '경로 의존성'의 실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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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7] 한국 원유 수입 중동 의존도 변화 (2000~2023)

출처: 한국석유공사 [1], 에너지경제연구원 에너지통계연보(2024) [2]

주: 역대 최고치는 2011년 87.1%; 2016년 85.9%는 박근혜 정부 시기 고점


▌ ① 경로 의존성이란 무엇인가


경로 의존성(path dependence)은 제도경제학의 핵심 개념 가운데 하나다. 과거의 선택이 현재의 선택지를 제약하는 현상을 말한다. 한번 특정 경로에 들어서면, 그 경로를 이탈하는 비용이 매우 커지기 때문에 비효율적인 상태가 지속된다. 가장 유명한 예시가 QWERTY 키보드다. 타자기 시대의 기술적 제약 때문에 탄생한 배열이지만, 수억 명의 숙련도와 수십억 달러어치의 기기·소프트웨어 생태계가 이 배열에 맞춰져 있기 때문에, 더 효율적인 배열이 존재해도 전환이 일어나지 않는다.


한국의 중동 원유 의존이 바로 이 구조다. 한국 정유사들이 중동 원유에 의존하는 것은 게으르거나 무능해서가 아니다. 수십 년에 걸쳐 구축된 인프라, 계약 관계, 숙련 인력, 금융 시스템이 중동 원유를 최적으로 처리하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구조에서 벗어나는 것은 개별 기업의 결정만으로는 불가능하다.


한국의 정유 설비는 중동산 중질유(API 31~34도 수준)를 처리하는 데 최적화된 고도화 설비(중질유 분해 시설, 잔사유 탈황 시설 등)를 대규모로 보유하고 있다. 북미산 경질유(WTI, API 40도 이상)를 처리하려면 설비 개조가 필요하고, 그 비용은 단순 수익성 계산으로 정당화하기 어렵다. [2]


이것이 왜 '다변화 선언'이 실제 다변화로 이어지지 않는지를 설명한다. 정부가 아무리 중동 의존도를 낮추라고 지시해도, 정유사 입장에서는 중동 원유가 비용, 물류, 설비 적합성 모든 면에서 합리적인 선택이다. 시장 논리가 정책 선언을 압도한다.


▌ ② 정유사가 중동을 선택하는 세 가지 논리


정유사의 원유 조달 결정은 복잡해 보이지만 결국 세 가지 기준으로 압축된다. 가격(원유가 + 수송비), 안정성(장기 공급 계약), 설비 적합성(유종 처리 능력). 이 세 기준 모두에서 중동 원유는 경쟁 우위를 가진다.


첫째, 수송비다. 한국은 주요 원유 생산지 가운데 중동과 지리적으로 가장 가깝다. 페르시아만에서 한국까지의 해상 항로는 약 12,000km다. 서아프리카(나이지리아)에서는 약 20,000km, 북미 멕시코만에서는 파나마 운하를 경유해도 비슷한 수준이다. 중동은 두 대안 산지에 비해 수송 거리가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 평시 원유 수송비 자체는 전체 수입 비용에서 부차적인 비중이지만, 항로 거리가 절반이라는 지리적 이점은 운항 일수 단축, 선박 회전율 향상, 재고 보유 부담 감소로 이어져 구조적인 비용 우위를 만들어낸다.


둘째, 장기 계약의 안정성이다. 사우디아람코, 아부다비 ADNOC, 이라크 국영 석유회사 SOMO와의 장기 공급계약은 수십 년의 거래 관계 위에 서 있다. 결제 방식, 선적 스케줄, 품질 보증, 분쟁 해결 메커니즘이 모두 정립되어 있다. 새로운 공급처와 같은 수준의 신뢰 관계를 구축하는 데는 시간과 비용이 든다.


셋째,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 설비 적합성이다. 한국의 4대 정유사(SK이노베이션, GS칼텍스, 에쓰오일, HD현대오일뱅크)는 모두 중질유 처리에 특화된 고도화 시설을 대규모로 보유한다. 2023년 기준 한국의 정유 정제능력 중 중질유 처리 비율은 약 55% 수준으로 추정된다. 이 설비를 다른 유종에 최적화하려면 수조 원의 시설 투자가 필요하다. [2]


이 세 가지 논리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중동 의존은 개별 기업의 합리적 선택이 집합적으로 구조적 취약성을 만드는 전형적인 '합성의 오류' 상황을 만든다. 각 정유사는 합리적으로 행동하고 있지만, 그 합리성의 총합이 국가 에너지 안보 차원에서는 비합리적인 결과를 낳는다.


▌ ③ 다변화 정책의 반복된 실패: 왜 선언은 있고 전환은 없는가


역대 정부마다 '에너지 다변화'를 선언했다. 노무현 정부는 자원 확보 외교를 시작했고, 이명박 정부는 이를 '자원외교'로 크게 밀어붙였으며, 박근혜 정부는 다변화 정책을 이어받았고, 문재인 정부는 에너지 전환의 맥락에서 재생에너지 중심으로 의존 구조 변화를 시도했다. 그런데 중동 의존도의 장기 추이를 보면 이 모든 선언의 실효성이 의심스럽다.


이명박 정부의 자원외교는 이 실패의 가장 극적인 사례다. 2008년부터 2012년까지 한국 공기업과 민간기업들은 아프리카, 중앙아시아, 남미 등에서 자원 개발 사업에 수십조 원을 쏟아부었다. 목표는 '해외 자원 자주개발률 확대'였다. 결과는 참혹했다. 2013년 감사원 감사에서 주요 사업 대부분이 부실한 사업성 분석 위에 추진됐음이 드러났고, 이후 수년간 손실이 누적됐다.


그러나 이 실패가 남긴 더 심각한 유산은 금전적 손실만이 아니었다. '다변화 = 위험하고 돈 낭비하는 것'이라는 사회적 학습이 형성됐다. 이후 정부들은 에너지 다변화 논의 자체를 꺼리게 됐다. 자원외교의 실패 경험이 역설적으로 중동 의존을 더욱 고착화하는 방향으로 작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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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9] 다변화 선언 vs 실제 중동 의존도 — 경로 의존성의 순환

출처: 한국석유공사 [1]

주: ▲는 새 정부 다변화 선언 시점, ▼는 외부 충격 시점


문재인 정부에서 중동 의존도가 2021년 59.8%까지 낮아진 것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이 변화는 사실 정부의 다변화 정책보다 국제 시장 구조 변화에 더 큰 원인이 있다. 미국의 셰일오일 생산이 폭발적으로 늘면서 국제 원유 시장의 공급 구조 자체가 바뀌었다. 미국산 경질유가 가격 경쟁력을 갖추면서 한국 정유사들이 자발적으로 수입 다변화를 추진한 결과였다.


그런데 이 변화도 지속되지 못했다.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글로벌 에너지 시장이 요동치자, 한국 정유사들은 다시 중동으로 돌아갔다. 전쟁 이전에 비해 유럽이 미국산 LNG와 원유를 대규모로 흡수하면서 미국산 원유 가격이 상승했고, 상대적으로 중동 원유의 가격 경쟁력이 회복됐다. 2022년 이후 중동 의존도는 다시 67~72% 수준으로 반등했다. [1]


이 순환이 경로 의존성의 핵심을 보여준다. 다변화는 시장 조건이 유리할 때만 일시적으로 진행된다. 위기가 오거나 시장 조건이 바뀌면 구조가 당기는 힘—수송비, 설비 적합성, 계약 관계—에 의해 원래 경로로 복귀한다. 정책 선언이 이 구조적 인력(引力)을 이기지 못하는 이유다.


▌ ④ 경로 의존성을 깨는 조건: 덴마크와 독일의 교훈


경로 의존성이 강하다는 것이 경로를 바꿀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역사는 강한 경로 의존성을 가진 에너지 시스템도 전환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단, 그 전환에는 특정 조건이 필요하다.

덴마크는 1973년 1차 오일쇼크 당시 에너지의 약 92~93%를 수입 석유에 의존했다. 중동 원유 의존도도 극단적으로 높았다. 그러나 덴마크는 충격을 구조 전환의 계기로 삼았다. 핵심은 '일관성'이었다. 1978년 세계 최초 대형 풍력발전기 Tvindkraft 가동 이후, 풍력발전 지원위원회 설립, 1992년 풍력산업 수출 개시까지 15년에 걸쳐 한 방향의 정책이 지속됐다. 정권이 바뀌어도 에너지 전환의 방향은 흔들리지 않았다. [3]

독일은 다른 경로를 보여준다.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전 독일의 러시아 가스 의존도는 EU 전체 기준 약 45%, 독일 단독 기준으로는 55% 수준이었다. 이것은 수십 년에 걸쳐 형성된 강한 경로 의존성이었다. 그러나 전쟁 발발과 동시에 독일은 단기 충격 완충과 장기 구조 전환을 동시에 추진했다.


유럽의회에 따르면 EU 전체 가스 수입에서 러시아가 차지하는 비중은 2021년 약 45%에서 2024년 약 18%까지 낮아졌다. 3년 만의 구조적 전환이었다.


두 사례가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경로 의존성 극복의 조건은 세 가지다. 첫째, 위기를 전환의 계기로 삼는 정치적 결단. 둘째, 단기 완충과 장기 전환의 동시 추진. 셋째, 정권 교체에도 흔들리지 않는 정책 연속성. 이 세 가지가 갖춰졌을 때 비로소 구조적 경로 의존성이 깨진다.


한국은 이 세 조건을 충족한 적이 없다. 2026년 호르무즈 봉쇄는 세 번째 조건을 충족할 마지막 기회일 수 있다. 이미 두 번의 오일쇼크, 걸프전, 이라크 전쟁,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흘려보냈다. 이 글의 마지막 질문 가운데 하나는 여기서 나온다. 한국은 여섯 번째 위기를 어떻게 쓸 것인가.


"Path dependence means that history matters.

We cannot understand today's choices without tracing the incremental evolution of institutions."


— North, D.C. (1990). Institutions, Institutional Change and Economic Performance.

Cambridge University Press, p.100.



▌ ⑤ "다변화"에서 "구조 전환"으로: 개념의 전환이 먼저다


이 챕터의 분석은 하나의 개념적 결론으로 향한다. 지금까지 한국의 에너지 다변화 정책은 '어디서 사느냐'를 바꾸려 했다. 중동 대신 아프리카, 중동 대신 북미, 중동 대신 중앙아시아. 그러나 앞서 살펴봤듯 이 접근은 시장 조건이 허락할 때만 일시적으로 작동하고, 위기가 오면 다시 원래 경로로 돌아간다.


근본적인 전환은 '무엇을 사느냐'를 바꾸는 것이다. 화석연료가 아닌 에너지원—재생에너지, 국내 생산 수소—으로의 전환이 그것이다. 이것이 경로 의존성을 진정으로 깨는 유일한 방법이다. 공급처를 다변화하는 것은 의존의 대상을 바꾸는 것이다. 공급원을 국내화하는 것은 의존 구조 자체를 해소하는 것이다.


이 맥락에서 재생에너지의 에너지 안보적 의미가 선명해진다. 재생에너지는 태양과 바람을 연료로 한다. 수입할 필요가 없다. 공급이 차단될 위험이 없다. 가격이 지정학적 사건에 흔들리지 않는다. Overland(2019)가 재생에너지 지정학의 핵심 특성으로 꼽은 것이 바로 이것이다. '포획(capture)'이지 '추출(extraction)'이 아닌 에너지원은 지정학적 공급 차단의 대상이 될 수 없다. [4]


한국이 재생에너지를 '탄소중립을 위한 수단'으로만 이해하는 한, 에너지 안보 논의에서 재생에너지는 항상 부차적인 위치에 놓인다. 탄소중립은 2050년이라는 장기 목표이고, 에너지 안보는 오늘의 문제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생에너지를 '중동 회귀 경로 의존성을 깨는 구조적 수단'으로 재정의하면, 그것은 당장 오늘의 에너지 안보 과제가 된다. 이 글이 말하려는 핵심 명제 가운데 하나가 여기에 있다.


1.3절 핵심 명제

① 중동 원유 의존은 단순한 정책 실패가 아니라 수십 년 누적 구조의 경로 의존성이다. 역대 최고치는 2016년이 아닌 2011년 87.1%.

② 정유사의 중동 선택은 수송비·설비 적합성·계약 안정성의 합리적 시장 논리에 따른 것이다.

③ '다변화 선언'은 공급처(어디서)만 바꾸려 한다 — 위기가 오면 구조적 인력이 중동으로 복귀시킨다.

④ 경로 의존성을 깰 조건: 위기를 기회로 삼는 정치적 결단 + 단기·장기 동시 추진 + 정책 연속성.

⑤ 진정한 전환은 공급처가 아니라 공급원 자체를 바꾸는 것 — 재생에너지는 경로 의존성의 대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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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절의 주요 참고문헌

[1] 한국석유공사 (2024). 에너지 자립도 및 중동 의존도 통계.

[2] 에너지경제연구원 (2024). 에너지통계연보(2024).

[3] Rüdiger, M. (2019). "From import dependence to self-sufficiency in Denmark, 1945–2000." Energy Policy, 125, 82–89.

[4] ★ Overland, I. (2019). "The geopolitics of renewable energy: Debunking four emerging myths." Energy Research & Social Science.→ 재생에너지는 '추출'이 아닌 '포획' — 공급 차단의 지정학적 무기가 될 수 없다는 핵심 논거.

North, D.C. (1990). Institutions, Institutional Change and Economic Performance. Cambridge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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