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그동안 세계가 무엇을 경쟁하는지를 보여줬다. 같은 위기에서 덴마크는 50년 전환을 선택했고, 영국은 에너지 안보를 재생에너지와 연결했고, 독일은 모순 끝에 전환을 가속했다. 한국은 세 번의 분기점 모두에서 다른 길을 걸었다.
여기서는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묻는다. 진단에서 처방으로, 역사에서 선택으로. 이 챕터는 그 처방의 출발점이다 — 왜 외면해왔는가를 정직하게 보는 것으로부터다.
4.1. 우리가 외면해 온 것들
— 그리고 지금, 무엇이 달라져야 하는가
이 챕터는 앞에서 분석한 것들을 정리하고, 지금 세계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짚고, 한국이 어떤 프레임으로 재설계해야 하는지를 제시한다. 뒤에 이어지는 각론은 모두 이 챕터에서 시작하는 좌표 위에서 전개된다.
4.1-1. 왜 따라가지 못했는가
이 글의 앞에서 하나의 질문을 던졌다. "한국은 왜 에너지 전쟁에서 지고 있는가?" 그 답은 단순하지 않다. 자원이 없어서가 아니다. 기술이 없어서도 아니다. 인식과 제도의 문제였다.
▌ 첫 번째 외면: 에너지 안보 개념이 갇혀 있었다
세계 에너지 안보 연구는 1970년대 오일쇼크 이후 반세기 동안 끊임없이 진화했다. 1970~80년대에는 "공급 안정성(supply security)"이 지배적 개념이었다. 석유 수입의 물리적 확보, 비축, 도입선 다변화가 논의의 중심이었다. 이것이 IEA가 1974년 설립되면서 정립한 에너지 안보의 핵심 프레임이었다.
2000년대 들어 연구 패러다임이 바뀌기 시작했다. Vivoda(2010), Yergin(2006) 등이 에너지 안보의 다차원성을 강조했고, "4A"(Availability·Accessibility·Affordability·Acceptability) 프레임이 등장했다. 공급 가용성만이 아니라 가격 접근성, 환경적 수용성까지 안보의 범주에 들어왔다.
그리고 2014년, 에너지 안보 연구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논문이 발표됐다. Cherp와 Jewell이 Energy Policy 저널에 발표한 "에너지 안보 개념: 4A를 넘어서(The concept of energy security: Beyond the four As)"였다. [11] 이들은 에너지 안보를 "에너지 시스템 취약성의 최소화"로 재정의하고, 그 취약성을 주권(Sovereignty)·강건성(Robustness)·회복력(Resilience)의 세 메커니즘으로 분석했다. 이 프레임은 재생에너지를 처음으로 에너지 안보의 직접 수단으로 이론화했다.
같은 해인 2019년, 에너지 지정학의 새로운 지평을 연 두 편의 중요한 보고서와 논문이 나왔다.
하나는 IRENA가 발표한 "신세계: 에너지 전환의 지정학(A New World: The Geopolitics of the Energy Transformation)"이었다. [5] 이 보고서는 재생에너지 전환이 국제 권력 구조를 어떻게 바꾸는지를 체계적으로 분석한 최초의 국제기구 문서 중 하나였다. 핵심 주장은 이렇다: "에너지 전환은 에너지 지정학의 규칙을 바꾼다. 화석연료 수출국의 권력이 약화되고, 에너지 수입국은 자립의 기회를 얻는다."
다른 하나는 Overland(2019)가 Energy Research & Social Science에 발표한 "재생에너지의 지정학: 네 가지 신화를 반박하다"였다. [12] 이 논문은 재생에너지가 에너지 안보에 미치는 긍정적 효과를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특히 재생에너지는 "포획 에너지(captive energy)"라는 논거 — 태양광과 풍력은 한 나라가 정치적 무기로 사용할 수 없다 — 는 이후 에너지 안보 논의에서 핵심 논리로 자리 잡았다.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이 학술적 논의를 정책 현실로 끌어올렸다. EU의 REPowerEU(2022)는 처음으로 "재생에너지 = 에너지 안보"를 공식 정책 문서에 명시했다. IEA의 World Energy Outlook 2025는 "에너지 안보의 성격이 바뀌고 있다 — 공급의 문제에서 시스템 회복력의 문제로"라고 선언했다. [1] 그리고 Kim et al.(2025)의 IMF 연구는 CGE 모델로 "녹색 전환이 에너지 안보를 순긍정적으로 개선한다"는 것을 실증했다. [13]
한국의 에너지 안보 논의는 어디에 있었는가.
비축유 208일, 도입선 다변화, 공급 계약 다원화. 1970년대 오일쇼크 이후 형성된 프레임이 50년 동안 바뀌지 않았다. Journal of International and Area Studies에 실린 한국 에너지 안보 연구(2015)는 "한국의 에너지 안보 정책은 구체적 목표도, 합리적 에너지 믹스 계획도 없이 실행되어 왔다"라고 진단했다. [18] 이것은 단순한 학술적 비판이 아니었다. 한국의 에너지 정책 입안 현장의 공백을 꼬집는 것이었다.
재생에너지는 "에너지 안보의 수단"이 아니라 "기후목표의 수단"으로만 다루어졌다. Cherp & Jewell의 주권·강건성·회복력 취약성 분석이 학계에서 인용되는 동안, 한국의 에너지 정책 문서에서 이 개념은 찾아보기 어렵다. 재생에너지 연구는 환경부 계통의 기후변화 의제에, 에너지 안보 연구는 산업부 계통의 공급 안정화 의제에 각각 배속되어 있었다.
학계의 구조적 공백도 있었다. 에너지 안보 연구는 외교안보 분야와 에너지공학 분야로 쪼개져 있었고, 두 분야의 연구자들이 같은 테이블에 앉는 일은 드물었다. "에너지 안보"는 외교부의 언어였고, "재생에너지"는 산업부의 언어였다. 두 언어가 만나는 공간이 없었다.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의 Jane Nakano는 한국과 일본을 비교 분석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과거의 에너지 안보는 수입원의 다변화를 의미했다. 하지만 이중 도전(dual challenge)의 시대에는 수입원 다변화만이 아니라 재생에너지와 같은 에너지 생산원의 다변화를 통해 에너지 안보를 확보해야 한다." [19] 한국이 이 전환을 인식하고 정책으로 전환하는 데 수년이 더 걸렸다.
Climate Action Tracker는 한국의 기후 행동을 2025년 기준 "불충분(Insufficient)"으로 평가하며, 특히 재생에너지 확대 속도가 OECD 및 G20 국가 중 최하위권이라고 지적했다. [20] 이 평가가 가리키는 것은 단순히 한국이 기후 목표에 뒤처져 있다는 것이 아니다. 에너지 안보를 위해서도 필요한 전환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 두 번째 외면: 두 번의 분기점을 흘려보냈다
1973년 오일쇼크 당시, 한국 정부는 원전 건설과 도입선 다변화로 응답했다. 이것은 완전히 틀린 대응이 아니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선택 — "수입 구조 자체를 바꾼다" — 은 하지 않았다. 덴마크가 1976년 Energiplan을 통해 "에너지 안보를 위해 재생에너지를 중심 수단으로 삼는다"라고 선언할 때, 한국은 "더 안정적으로 수입한다"는 방향을 선택했다.
이후 30년이 지났다. 1997년 외환위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그 사이에 수차례 국제 유가 급등락이 있었다. 그러나 한국의 에너지 수입의존도는 1973년 이후 단 한 번도 의미 있게 낮아지지 않았다. 에너지경제연구원의 자료에 따르면 2023년 한국의 에너지 수입의존도는 93.9%였다. [27] 1970년대와 사실상 같은 수준이다.
2022년의 두 번째 분기점에서도 달랐다. EU가 REPowerEU를 선언하고 영국이 BESS를 발표할 때, 한국의 정책 언어는 여전히 "LNG 공급선 다변화"와 "비축유 방출"이었다. 위기의 원인 — 화석연료 의존 구조 — 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 위기를 더 잘 버티는 방법을 찾았다. KEIA(한국경제연구원)의 James Bowen은 이렇게 분석했다: "한국의 에너지 안보 접근은 전통적인 공급 확보 논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으며, 재생에너지는 여전히 경제·안보 전략이 아닌 기후 정책의 언어로 이야기되고 있다." [21]
▌ 세 번째 외면: 경제성장과 에너지 안보를 분리했다
재생에너지는 탄소중립기본계획 안에 있었다. 에너지 안보는 에너지 기본계획 안에 있었다. 경제성장 전략은 반도체, AI, 바이오 안에 있었다. 세 문서가 각각 따로 작성되고, 따로 읽혔다.
덴마크의 Energiplan 76이 1976년에 세 가지를 하나로 묶었던 것처럼 — "에너지 안보를 위해 재생에너지를 키우고, 그것이 우리 경제의 미래 산업이 된다" — 이런 통합 프레임이 없었다. NOEMA 매거진의 분석은 이것을 "새로운 에너지 지정학의 세 가지 동력"으로 정리한다. "에너지 전환의 경제적 기회를 선점하기 위한 경쟁, 더 위험해진 세계에서 에너지 안보와 지정학적 자율성의 필요, 경제를 더 회복력 있게 만들기 위한 다각화." [14] 세 가지가 하나의 논리로 묶여 있다. 한국에서는 이 세 가지가 서로 다른 부처, 서로 다른 언어로 분리되어 있었다.
이 분리가 낳은 실질적 피해가 있다. 한국의 주요 수출 기업들은 RE100 이행 압박에 직면하고 있지만, 국내 재생에너지 공급이 부족해 해외 사업장에서의 RE100은 달성해도 국내 사업장 이행률은 여전히 낮다. 2024년 한국에서 RE100 조달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응답한 기업이 70개사로, 미국(20개사)의 3.5배였다. [25] 이것은 환경 문제가 아니라 공급망 문제이자, 수출 시장 접근 문제다.
경제성장전략에서 에너지 안보 논리가 빠진 결과, 가장 직접적인 해결책 — 재생에너지를 확대해서 수입의존도를 낮추는 것 — 이 "경제 정책"으로 인식되지 않았다. ScienceDirect에 발표된 "한국의 청정에너지 2035" 연구(2024)는 이를 수치로 보여준다. "재생에너지 50% + 원자력 30% 구성으로 전환할 경우, 전력 공급 비용이 2022년 대비 23~40% 절감 가능하다." [22] 에너지 안보와 경제성장이 같은 방향임을 증명하는 연구다. 그러나 이 연구가 정책 설계의 언어로 들어오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4.1-2. 두 번의 전쟁이 재편한 세계 — 에너지 지정학의 새로운 질서
2022년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2026년의 이란 전쟁은 두 개의 독립된 위기가 아니다. 이 두 사건은 하나의 구조적 변화를 다른 무대에서 반복해서 보여주고 있다. "에너지는 처음부터 지정학이었고, 앞으로는 더욱 그렇게 된다."
▌ 러-우 전쟁이 만든 새로운 언어
2022년 2월 24일 이후 에너지 정책의 언어가 바뀌었다. IEA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촉발한 에너지 위기를 "최초의 진정한 글로벌 에너지 위기(the first truly global energy crisis)"로 규정했다. [4] EU는 REPowerEU(2022.5.18)에서 "더 싸고, 더 깨끗하고, 더 독립적인 에너지"를 선언했다. "더 독립적인"이라는 단어가 공식 정책 문서에 들어간 것이 핵심이었다. 재생에너지는 비로소 "에너지 안보의 수단"으로 EU 공식 언어의 자리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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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너지 전환은 에너지 안보의 경쟁자가 아니다. 잘 설계된 에너지 전환 정책으로 우리는 최선의 에너지 안보를 가질 수 있다. 가격을 낮추고, 국민에게 번영을 가져다주고,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다. ❞
— Fatih Birol, IEA 사무총장 — 다보스 WEF 연차총회 202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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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EA 사무총장 파티 비롤은 세계경제포럼(WEF) 2025 연차총회(다보스)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정말 에너지 안보와 에너지 전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성공적인 청정에너지 전환은 에너지 시스템을 훨씬 더 안전하고 회복력 있게 만들고, 에너지 가격을 저렴하게 하며, 다른 나라에 대한 의존을 줄인다"라고 강조했다. [6] 이것은 한국이 지금까지 분리해서 생각해 온 두 가지 목표가 사실은 하나의 목표임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IEA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분석은 이렇게 결론짓는다. "이 에너지 위기의 가장 큰 유산은 화석연료 시대의 종말을 가속한다는 것일 수 있다." [4] 이 분석이 맞는다면, 위기는 전환의 신호다. 2022년 이후 글로벌 청정에너지 투자는 매년 신기록을 경신하고 있다. 2025년 전 세계 에너지 투자는 3.3조 달러에 달했고, 그중 2.2조 달러가 청정에너지 — 화석연료 1.1조 달러의 두 배였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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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정학적, 경제적 불확실성이 에너지 세계의 전망을 흐리는 가운데, 에너지 안보가 국가와 기업들이 광범위한 리스크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려 하면서 올해 투자를 3.3조 달러 기록으로 끌어올리는 핵심 동력으로 등장하고 있다. ❞
— Fatih Birol, IEA 사무총장 — World Energy Investment 2025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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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근본적인 변화는 에너지 안보가 투자의 동력이 되었다는 것이다. 비롤은 이렇게 말했다. "10년 전에는 화석연료 투자가 전기 투자를 앞섰다. 지금은 정반대다. 자본이 전기 부문으로 이동하고 있다. 전기 소비가 늘어나고 있고 전기를 생산할 필요도 커지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명확한 추세다." [2]
IEA의 World Energy Investment 2025는 청정에너지 투자 증가의 구조를 분석한다. 전 세계 청정에너지 투자 증가분의 70%가 순화석연료 수입국에서 나왔다. [2] 이것은 기후 정책 때문이 아니다. 에너지 안보 논리가 투자를 이끌고 있다는 의미다. IISD(국제지속가능개발연구소)는 IEA WEO 2025를 분석하며 이렇게 정리한다. "재생에너지는 단순히 녹색 선택지가 아니라, 특히 순수입국들에게는 안전하고 저렴한 선택지다." [15]
The Washington Quarterly(2023)에 발표된 논문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의 에너지 지정학"은 이 변화의 본질을 이렇게 정리한다. "장기적 변화들 — 지정학적 권력 분포, 지속가능한 에너지 소비의 의미, 상호의존의 범위와 성격 — 이 글로벌 에너지 질서를 변환하고 있다. 재생에너지의 부상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는 바로 그 순간에 러시아의 에너지 패권을 약화시키고 있다." [16]
이 분석이 함의하는 바는 크다. 재생에너지는 지정학적 권력 구조를 바꾼다. 화석연료 수출국의 영향력이 줄어들고, 재생에너지를 빠르게 확대하는 수입국은 에너지 주권을 회복한다. 이것은 기후 목표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안보 전략의 문제다.
▌ 이란 전쟁: 아시아판 유럽의 교훈 — "Asia's Ukraine Moment"
2026년 이란 전쟁은 유럽의 위기를 아시아가 반복하는 순간이다. 분석가들은 이것을 "Asia's Ukraine Moment"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9] 유럽이 러시아 가스 의존의 대가를 2022년에 치렀다면, 아시아는 호르무즈 의존의 대가를 2026년에 치르고 있다.
2026년 2월 28일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격으로 시작된 전쟁은 3월 4일 호르무즈 봉쇄로 이어졌다. IEA는 이 사태를 "역사상 가장 큰 글로벌 에너지 공급 차단"이라고 규정했다. [17] 유럽 천연가스 가격은 전쟁 시작 이후 60% 급등했다.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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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년에 에너지는 다시 권력으로 부상했다 — 지정학적 무기이자 경제적 단층선으로. 그 증거는 올해 첫 몇 달간 너무나 분명했다. ❞
— TIME (2026.4.3), "Once Again, Energy Is Power"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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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의 분석(2026.4.3)은 에너지의 무기화가 구조적 현상이 됐음을 지적한다: "이란은 비대칭 전술을 사용해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에너지 병목인 호르무즈 해협의 통행을 방해했다. 미국은 전통적인 제재를 넘어 베네수엘라 원유 수송을 물리적으로 차단했다." [8]
중동·북아프리카발 에너지 수출의 약 75%가 중국·인도·일본·한국으로 향한다. [17] 이 중 한국의 원유 수입 약 72%가 호르무즈를 통과한다. 호르무즈 봉쇄 이후 아시아 주요국은 일제히 에너지 정책을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이 두 전쟁이 만든 새로운 에너지 지정학의 지형도는 세 가지 축으로 정리된다.
첫째, 에너지 자원의 무기화는 구조적 현상이 되었다. 러시아의 가스 무기화, 이란의 해협 무기화, 미국의 베네수엘라 석유 통제. TIME의 분석은 이것이 예외가 아닌 패턴임을 지적한다. "전후 수십 년 동안 세계화와 국제 협력은 에너지를 지정학적 무기로 사용하는 것을 무디게 했다. 1974년 아랍 석유 금수조치 이후 선진국들은 IEA를 설립해 비상 공급 차단에 공동 대응했다. 그 통합된 글로벌 석유 시장은 소비자들에게 엄청난 혜택을 가져다줬다. 그러나 이제 그 구조에 균열이 생기고 있다." [8]
둘째, 에너지 전환의 동력이 기후에서 안보로 이동했다. IEA는 "기후 목표보다 에너지 안보 논리가 RE 투자의 더 강력한 동력이 됐다"라고 분석한다. [2] 이 전환이 중요한 이유는, 안보 논리는 여야를 가리지 않기 때문이다. 기후 정책은 정권 교체 시 흔들리지만, 에너지 안보 정책은 흔들리기 어렵다. WEF의 2026년 에너지 분석도 이를 확인한다. "정치인들은 기후를 이야기하기보다 전등을 켜놓고, 청구서를 길들이고, AI 데이터센터 붐을 관리하는 것에 더 집중한다. 그러나 그 와중에 청정에너지 지출은 조용히 신기록을 경신하고 있다." [7]
셋째, 에너지 전환의 지리가 바뀌었다. 과거 에너지 전환은 유럽의 이야기였다. 이제 아시아가 가장 큰 RE 투자 시장이자 가장 큰 전환의 필요성을 가진 지역이 됐다. IEA의 WEI 2025 분석에 따르면 전 세계 청정에너지 투자 증가분의 70%가 순화석연료 수입국에서 나왔다. [2] CNBC의 분석은 이렇게 요약한다. "이란 전쟁은 아시아에서 유럽의 교훈을 재현한다 — 에너지 안보를 원하는 나라는 재생에너지를 가속해야 한다." [9]
한국은 이 재편된 지형도에서 어디에 있는가. 세계 10위 경제 대국이자 세계 최고 수준의 에너지 수입의존국. 아시아에서 가장 RE 전환이 늦은 OECD 회원국 중 하나. 이란 전쟁에서 가장 큰 타격을 받은 나라 중 하나. 그러면서 2026년 경제성장전략에서 재생에너지를 처음으로 경제성장의 핵심 축으로 설정한 나라. 전략안보연구소(Council on Strategic Risks)는 2026년 2월 보고서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재생에너지 전환 가속 — 특히 풍력과 태양광 — 은 한국의 국가 안보, 경제 회복력, 에너지 주권을 강화할 수 있다." [23]
4.1-3. 두 축의 재설계 — 경제성장과 에너지 안보, 같은 방향으로
2026년 1월 9일, 한국 정부는 "2026년 경제성장전략"을 발표했다. "대한민국 경제 대도약 원년"이라는 타이틀 아래, 세 가지 핵심 축을 제시했다: AX(AI전환), GX(녹색전환), 초혁신경제. [24]
GX 축에는 GX 전략 — 2035 NDC 이행을 위한 재생에너지 확대, 전력망 구축, 산업 탈탄소화 — 이 담겼다. RE100 산단에 창업하는 기업에 법인세 10년 100% 면제가 포함됐다. [24] 국가기간 전력망 확충 특별법이 2025년 9월 시행됐다. [26] 한국이 처음으로 재생에너지를 경제성장의 핵심 수단으로 명시한 것이었다.
이것은 중요한 변화다. 그러나 아직 절반의 완성에 불과하다.
2026년 경제성장전략의 GX 축에는 경제성장의 논리가 있다. RE100 기업 유치, 녹색 산업 육성, 탄소중립 이행. 그러나 에너지 안보의 논리는 빠져 있다. "재생에너지를 키우면 에너지 수입의존이 줄어들고, 수입의존이 줄어들면 호르무즈 충격에 덜 노출된다"는 명시적 연결이 없다. 덴마크의 Energiplan 76이 1976년에 했던 것을 한국은 2026년에도 아직 못 하고 있다.
▌ 왜 두 축이 같은 방향을 바라봐야 하는가
첫 번째 이유: 지금의 위기가 증명한다. 이란 전쟁으로 원유 수입 72%가 차단된 지금, 국내 기업들의 제조 원가가 오르고 있다. 한전의 연료비 조정단가가 다시 올라가고 있다. 이것은 에너지 안보의 실패가 경제 비용으로 직접 전환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RE 발전 비중이 높았다면, 이 비용의 일부는 흡수됐을 것이다.
두 번째 이유: 수출 경쟁력이 RE에 달렸다. 2026년 1월부터 EU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가 본격 시행됐다. [26] 철강·알루미늄 등 수출품의 탄소 비용이 현실화됐다. 글로벌 공급망에서 RE100을 요구하는 바이어가 늘고 있다. 2024년 한국에서 RE100 조달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응답한 기업이 70개사로, 미국(20개사)의 3.5배다. [25] 이것은 환경 문제가 아니라 수출 시장 접근 문제다.
세 번째 이유: 전력이 산업 입지의 핵심 경쟁력이 됐다. AI 데이터센터 붐으로 "값싸고 안정적이며 깨끗한 전력"이 첨단 기업 유치의 첫 번째 조건이 됐다. WEF의 2026년 에너지 분석은 이렇게 말한다. "저렴하고 신뢰할 수 있는 청정 전력을 대규모로 공급할 수 있는 지역이 AI 투자의 구조적 이점을 갖는다." [7] 이 경쟁에서 RE 비중 10.6%인 한국과 RE 비중 80%인 덴마크는 출발선이 다르다.
▌ 재설계의 3축: 경제성장 + 에너지 안보가 같은 방향을 바라볼 때
축 ① 재생에너지 확대 = 에너지 독립의 수단
RE 발전 비중 상승 1% p = 화석연료 수입 감소 = 호르무즈 리스크 감소 = 에너지 안보 개선
→ "탄소중립" 프레임에서 "에너지 독립" 프레임으로 전환 필요
축 ② 전력망 = 산업 경쟁력의 인프라
국가기간 전력망 확충 특별법(2025) [26] → RE 수송 가능 → RE100 기업 유치 → 수출 경쟁력
→ 망 투자를 "비용"이 아닌 "산업 인프라 투자"로 프레임 전환 필요
축 ③ 산업 탈탄소화 = CBAM·RE100 대응 + 미래 산업 선점
철강·석유화학·시멘트 탈탄소 = EU 시장 접근 + 청정 제조업 경쟁력
→ "환경 규제 대응"이 아닌 "산업 전환 기회"로 프레임 전환 필요
이 세 축이 지금 어떻게 분리되어 있는지를 보면 문제의 구조가 보인다. 재생에너지 확대는 기후에너지환경부 소관이다. 전력망 투자는 산업통상자원부 소관이다. 산업 탈탄소화는 각 산업 부처 소관이다. 에너지 안보는 외교부와 산업부가 함께 관할한다. 이 모든 것을 연결하는 단일한 국가 전략이 없다.
영국이 DESNZ — 에너지안보·넷제로부 — 를 하나로 만든 것처럼, 한국에는 이 세 축을 동시에 관할하며 "에너지 안보"와 "경제성장"을 같은 목표로 설계하는 거버넌스가 필요하다. 그것이 없으면 경제성장전략의 GX 축은 기후 의제의 수사에 머물 위험이 있다.
4.1-4. 이란 전쟁이 준 마지막 교훈: 프레임을 바꿔야 한다
2026년 3월, 이란 전쟁의 충격이 한국 에너지 시장을 강타하는 동안, 정부 대응의 핵심 메시지는 "비축유 활용과 수급 안정"이었다. 틀린 대응이 아니다. 그러나 충분한 대응도 아니다.
영국 DESNZ 에너지장관 Ed Miliband는 이란 전쟁 직후 이렇게 말했다. "이 위기는 재생에너지가 에너지 안보의 도구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해 준다." 그리고 3월 24일, 신규 건축물에 태양광과 히트펌프를 의무화했다. [10] 위기를 전환의 가속 신호로 읽은 것이다.
한국 정부도 같은 프레임으로 이 위기를 읽어야 한다. "이란 전쟁 = 비축유 위기"가 아니라, "이란 전쟁 = 화석연료 의존 구조의 청구서" 그리고 "이 청구서가 반복되지 않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로 말이다.
▌ 프레임 전환: 무엇이 달라져야 하는가
기존 프레임: 에너지 안보 = 비축 + 공급선 다변화 + 원전
새 프레임: 에너지 안보 = RE 확대 + 전력망 투자 + 산업 탈탄소화
기존 프레임: RE = 탄소중립의 수단 (기후 정책)
새 프레임: RE = 에너지 독립의 수단 (안보 정책) + 수출 경쟁력의 기반 (경제 정책)
기존 프레임: 에너지 정책 / 기후 정책 / 산업 정책 → 각각 별개
새 프레임: 에너지 안보 + 경제성장 + 탈탄소 → 하나의 통합 전략
핵심 조건: 선언이 아니라 구속력 있는 메커니즘
에너지 수입의존도 연간 측정·보고 의무
RE 확대를 에너지 안보 지표와 법적으로 연결
수익 보장 메커니즘 — CfD 도입
이 프레임 전환이 이루어질 때, 이후의 각론들이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재생에너지 지정학의 신세계, 에너지 안보 시스템의 재설계, 입지와 공정·에너지 전환, 전기화와 에너지 독립, GX 재설계 등이 그것이다. 이 모든 각론은 하나의 질문에서 출발한다. "어떻게 하면 한국이 에너지를 통해 더 강한 나라가 될 수 있는가."
우리가 외면해 온 것들은 세 가지였다. 에너지 안보 개념의 갱신, 분기점의 선택, 경제와 안보를 잇는 통합 프레임. 이란 전쟁은 그동안 우리가 외면한 이 세 가지에 대해 동시에 청구서를 보내고 있다. 청구서를 또다시 비축유로 결제할 것인가, 아니면 이번에는 구조를 바꿀 것인가.
핵심 명제
① 한국이 에너지 전환에서 뒤처진 것은 자원·기술 문제가 아니라 인식·제도 문제다
② 에너지 안보 개념이 갇혀 있었다 — "비축·다변화"에서 "RE=에너지 독립"으로 갱신이 없었다
③ 두 번의 분기점(1973·2022) 모두 화석연료 의존 구조를 바꾸지 않았다
④ 러-우 전쟁·이란 전쟁은 구조적 변화를 다른 무대에서 반복 증명 중이다
⑤ "에너지 안보가 기후 정책보다 강력한 RE 전환 동력이다" — IEA Birol, WEF 공통 분석 (2025~2026)
⑥ 2026년 경제성장전략(GX 축)은 절반만 완성됐다 — 에너지 안보와의 연결이 빠져 있다
⑦ 재설계의 3축: RE 확대(에너지 독립) + 전력망(산업 인프라) + 탈탄소화(수출 경쟁력)
⑧ 조건: 선언이 아닌 구속력 있는 메커니즘 — 수입의존도 연간 보고 + RE 안보지표 법적 연결 + CfD
▌ 주요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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