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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열 Oct 28. 2020

신발 고치는 노인

Antsirabe, Madagascar

이런 말 하면 조금은 우스울 수도 있겠지만 여행을 하면서 가장 소중하게 여긴 것 중 하나는 신발이었다. 속옷만큼 나의 살결에 오래 닿아 있는 것이었고 다른 옷들과 다르게 단 하나만 챙겨 온 것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300mm라는 흔치 않은 발 사이즈 때문에 신발을 잃어버리기라도 한다면 쉽게 구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각별히 더 신경을 쓸 수밖에.


여행을 준비하면서 300mm라는 사이즈의 신발을 사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보통 여행을 할 땐 평소 신던 가벼운 신발을 신고 떠나곤 했는데, 이번엔 조금 긴 여행이 될지 모르니 다른 서양 여행자들처럼 왠지 튼튼한 등산화 정도는 신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큰 마음먹고 등산화를 사 신기로 했지만 어느 곳에서도 300mm 사이즈 자체를 팔지 않았다. 며칠에 걸쳐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나서야 간신히 한 외국 브랜드에서 내 발에 맞는 사이즈를 찾았다. 하지만 디자인을 선택하기도 전에 점원은 말했다.

“이 모델만 300mm까지 나와요.”


그렇게 고민도 못해보고 그 신발은 긴 여행을 함께 할 동반자가 되었다. 그래도 어렵게 산 신발이라 더 애지 중지했다. 인도에서 침대 칸 기차를 탈 때도 가장 먼저 머리맡에 모신 것도 신발이었고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하는 사원에서 가장 신경 썼던 것도 신발이었다. 


의지와 상관없이 고른 신발이라 마음에 드는 모양새는 아니었지만, 투박한 모양만큼이나 단단해 보였고 믿음직스러웠다. 사막이든 정글이든 어디를 가더라도 이 신발로 헤쳐나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그 믿음은 너무나 빨리, 그리고 쉽게 무너졌다.

여행을 떠난 지 얼마 안돼 몇 번 신지 않았는데도 서서히 한쪽 신발 앞 코가 벌어지더니 구멍이 커졌다. 그래서 인도 한 길거리에서 구두통을 든 한 청년에게 신발을 맡겼다. 그는 송곳으로 무지막지하게 구멍을 뚫고 커다란 바늘로 엉성하게 꿰매 놓았지만 역시나 얼마 안가 실밥은 다시 풀어지고 그저 보기 흉한 흉터만 신발에 남았을 뿐이다. 

그래서 나의 믿음직했던 신발은 물도, 모레도, 바람도, 아무것도 막아주지 못했다. 게다가 얼마 안가 다른 한쪽도 터져버렸다. 그래서 남미의 사막에서 이 신발은 모래를 한 모금이나 삼켜버렸고 비라도 오는 날엔 질퍽거리는 촉감이 내 발을 타고 가슴까지 올라왔다.





마다가스카르 안치라베 시장에서 바나나 몇 송이를 사고 돌아오는 길, 해지는 노을빛이 스치는 벽에 구두들이 걸려있다. 그리고 그 옆에선 한 노인이 앉아 신발을 고치고 있다. 그냥 지나치려다가 그 노인의 주름 가득한 손을 보니, 그가 적어도 몇십 년 동안은 이 한 곳에서 구두를 만들고 있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가 내 신발도 어려움 없이 고칠 수 있을 것만 같아 잠시 멈췄다. 신발을 보여주며 몸짓으로 고칠 수 있겠어요?라고 물었더니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신다. 나는 반가운 목소리로 “후아치노? (얼마예요?)”라고 물었지만 노인은 대답 없이 한참을 고민한다. 그리고 옆에 있던 아저씨와도 상의를 시작했다.


순간‘아, 또 사기를 당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여행을 하면서 경험을 통해 배웠기 때문이다. 가격을 물었을 때 상대방이 머뭇거리며 오래 생각을 하거나 옆 사람과 상의를 한다는 것은 여행자들에게 바가지를 씌우겠다는 행동이라는 것을. 

정직하게 켜켜이 쌓였을 거라 생각한 그의 손 주름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실망이 더욱 커졌다. 그래도 어쩔 수 없기에 그가 대답하기 전에 머릿속으로 급하게 계산을 해본다.

‘딱 3000원 정도 까지만 흥정하고 안되면 그냥 가자. 

아니 신발은 고쳐야 하니까 한 5000원까진 흥정해보자.’

그리 크지 않은 돈을 상한선으로 정하면서 괜히 어딜 가나 ‘저금통’ 취급당하는 외국인 신세인 거 같아 서러웠다.


그때 즈음 할아버지가 대답을 했다.


“300원.”

“양쪽 다요? 한쪽만요?”

“둘 다.”


순간 복잡하게 돌던 머리는 멈췄고 온몸에 힘이 풀렸다. 그래서 그 자리에 주저앉아 그에게 신발을 벗어주었다. 300원, 이곳에서도 겨우 아침 대신에 튀김 몇 조각 사 먹을 돈이다.

그가 신발을 고치는 동안 내 발을 빤히 바라보니 어제 꿰맸던 양말이 다시 구멍 나있다.

“왜 이 빌어먹을 양말은 꿰매도 꿰매도 계속 구멍이 나고 지랄이야!”

괜히 애꿎은 양말에게 심술이 난다.


신발을 고치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할아버지는 신발을 한 땀 한 땀 실로 꿰매고 다시 터지지 않게 접착제로 단단히 고정했다. 그리고 마무리를 위해 망치로 신발을 두드리는 모습을 보면서 지치고 구겨진 내 심보도 함께 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 다 됐다네’

노인은 다 고친 신발을 돌려 내 앞에 가지런히 놔주었다. 신발을 신고 나는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 혼자 사과하는 마음으로 약간의 돈을 더 얹어 드렸다. 

노인은 별다른 사양 없이 돈을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숙소로 돌아와 이미 몇 번이나 꿰맨 양말을 다시 꿰맸다. 그리고 혹시 자꾸 나는 구멍이 내 발톱 탓인가 하고 길지 않은 발톱을 다시 잘랐다. 할아버지가 고쳐준 신발은 감사하게도 여행 마지막 날까지 잘 버텨주었다. 조금도 벌어지지 않고.


물론 양말은 계속해서 구멍이 났지만.








오래전 여행을 하고 몇 년 동안 글을 쓰고 사진을 다듬고 몇 해 전 책을 만들었습니다.

브런치에 새로운 글을 쓰기 전에 책에 실은 글 중 좋아하는 글, 편집 과정 중 빠진 글, 사진이나 그림을 더 보여주고 싶었던 페이지를 중심으로 다시 올려보려 합니다.

책을 봐주신 분들께는 다시 여행을 떠올리는 계기로, 아직 본 적이 없으신 분께는 답답한 일상에서 즐거운 여행이 되기를 바라봅니다.


Instgram: @310.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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