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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열 Sep 14. 2022

내가 좋은 사람이라는 착각

마야자키 하야오 "바람이 분다"

 스스로 이런 이야기를 하면 부끄럽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나는 '좋은 사람'이라고 늘 생각했다.

 체구는 남들보다 훨씬 크지만 입이 거칠지도 않고, 남에게 어떤 행위나 생각을 딱히 강요하지 않고, 보통 '그럴 수 있지'라고 생각하면서 둥글둥글하게 지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변에서 "사람 좋지."라는 말을 많이 듣다 보니 스스로도 '나는 외모가 잘나지 않아도 꽤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은 하나의 프레임이 되어서 나의 말, 행동에 영향을 미치며 좋은 사람인 양 살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좋은 사람'이라는 강박은 더 강해졌다. 오죽했으면 소개팅 장소에서 내가 주문하는 몇 마디를 듣고 상대 여성이 "세열 씨는 누구에게나 늘 친절한 타입이죠?"라고 말했을까?


 그렇다고 이런 모습이 싫지는 않았다. 나도 덩치가 크지만 덩치 큰 사람들을 마주하면 무섭다. 그런데 그 사람이 굉장히 친절하거나 '좋은 사람'의 모습을 보이면 반대급부로 호감도가 더 커졌고 나도 이런 모습이겠지?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이 위험해질 때가 있다. '좋은 사람'이라고 늘 순하게 살 순 없고 한 번씩 참을 수 없는 화가 치밀어 오를 때가 있는데 이때가 문제다. 스스로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다시 스스로 얼마나 정당하지 못한 상황이면 이 정도로 화가 날까?라고 생각해버린다는 것이다. 

 1인칭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조금 이상하니 조금 다르게 이야기하자면, 교실이나 사무실에서 제일 순둥순둥 한 사람이 전화로 누군가에게 엄청나게 화를 내는 모습을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 다들 '저 사람 또 화를 내네.'가 아니라 '저 순한 사람이 오죽하면 저렇게 화를 낼까?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을 스스로 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화를 내고 불만을 이야기할 때는 생각의 절제가 없어진다. '나는 좋은 사람인데 너네가 선을 넘었어.'라고 생각을 해버린 것이다. (다행히도 행동의 절제는 꼭 붙잡고 있어 성인이 되고 아직까지 신체적 물리적 실수를 한 적은 없다. ) 그렇게 스스로 정당성을 부여하니 정의의 사도가 된 것처럼 상대방에게 공격적으로 따지고 경우에 따라 관리자를 불러 항의를 한다. 정의롭고 논리적인 척하며.


 그러나 한참 지나고 나서 머리가 식고 나서야 후회를 한다. 그렇게 따지고 다투는 동안 옆에 있는 일행에게도 가족에게도 상대방에게도 그리고 상관없는 주변 사람들에게도 상처를 주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스로 나는 '좋은 사람'이라는 오해를 버리기로 했다. 대신에 '좋은 사람'이 되고자 계속해서 노력하기로 했다. 평소에 늘 참다가 터지는 화는 '좋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낼 수밖에 없는 정의로움이 아니라 내가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참아야 하는 하나의 시험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일단 사건과 감정의 원인이 나의 미성숙함이란 가능성을 인지해야 한다.) 이렇게 내가 한 번 더 감정을 절제하면 적어도 3-4명의 하루를 망치지 않고 평범하게 지나는 하루로 만들어 줄 것이다. 가끔은 억울해도 상관없다. 내가 화를 내어 망쳐버린 모두의 하루에 비하면 억울함은 너무나도 사소하니 차라리 억울하고 말겠다.


정당하게 주장할 때마다 다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다투는 이들은 모두 서로가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정당함을 주의해야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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