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티멘탈 밸류>, 요아킴 트리에
최근에는 힘을 내서 뭔가를 써보고 싶어졌다. 때문에 영화에 대한 글이나 다른 것을 열심히 이것저것 써보고 있다. 그런데 쓰면서도 영화에 대한 좋은 글(비평)은 무엇인지에 대해 항상 의문을 가졌다. 감독의 의도를 낱낱이 파악하는 것? 숨겨진 의미를 다 포착하는 것? 유려한 문장으로 표현하는 것? 그렇다고 한다면 나의 글은 별로 쓸모가 없을 것이다. 아직 영화를 보는 눈이 그렇게 훌륭하다고 스스로 느끼지 못하고, 남루한 표현력으로는 머릿속의 감상을 다 끄집어내기에 역부족이다. 영화를 낱낱이 알기를 바란다면 차라리 세상의 모든 비평을 다 없애고 유튜브의 해석 영상을 보는 게 훨씬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쓴 글을 누군가가 읽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면, 무슨 이유로 내 글을 읽어달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무엇을 위해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계속 글을 쓰는 걸까? 즉 내 글이 가진 가치를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
영화가 개봉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동진 평론가가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상을 보았다. 그는 역시나 유려한 말솜씨와 탁월한 분석 능력으로 영화를 해부했다. 같은 영화를 본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영화를 보는 그의 시야는 넓었다. 그러나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그게 아니었다. 그는 영화를 보며 떠올린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했다. 그는 십여 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신 직후 한동안 영화를 볼 때마다 인물이 죽는 장면을 보는 게 너무 괴로웠다고 말한다. 죽는 장면들이 자연스럽게 돌아가신 아버지나 자신의 불효적인 부분을 함께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영화 속 수많은 죽는 장면은 별게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그 사람들에게는 아니지만 나에게는 (죽는 장면들이) 센티멘탈 밸류였다. 그것은 내 삶에 일어난 어떤 일(현실) 때문인 것이다." 똑같은 영화를 보더라도 수많은 감상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센티멘탈 밸류', 다시 말해 개인이 갖는 정서적/삶의 역사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센티멘탈 밸류가 드러나는 장면이 하나 있다. 자매인 '노라'와 '아그네스'는 얼마 전 돌아가신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기 위해 어머니의 집에 모였다. 그들은 테이블을 가득 채운 물건들 중 남길 만한 물건과 버릴 물건을 분류한다. 심드렁해 보이는 언니 노라에게 아그네스는 "이 빨간 꽃병 어때? 어릴 때부터 예쁘다고 생각했어"라며 예를 들어준다. 그러자 노라는 그 꽃병을 가져가겠다고 한다. 아그네스가 추억을 얘기한 순간 그저 오래된 꽃병이던 물건은 '센티멘탈 밸류'가 되었다. 똑같은 것이지만 나에게는 소중한 것. 보잘것없어 보여도 나에게 와닿는 것. <센티멘탈 밸류>는 관객 각자의 무언가를 위한 영화다.
한 지붕 아래, 하나의 가족
이 영화는 한 가족과 집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의 시작은 노라의 어릴 적 숙제였던 '집(사물)의 시선으로 보기'에서 출발한다. 즉 영화의 시선은 집 안에서 가족들이 서로를 바라보는 방향이면서도, 집이 가족들을 바라보는 방향으로도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세대를 거쳐 하나의 가정의 보금자리가 되어준 이 집은 영화 내내 든든한 배경이 되어준다. 추억이 깃든 장소로써, 그리고 갈등과 재회의 장소로써. 아내와 두 딸을 둔 영화감독 '구스타브'는 (아마도 바람이나 알코올 중독으로 보이는) 개인적 결핍 등으로 인해 아내와 자주 다투다 결국 가족을 두고 집을 떠난다. 그리고 두 딸과 구스타브는 어머니의 장례식날 다시 오래된 집에서 재회한다. 이후 구스타브가 집에서 그들에 대한 영화를 찍기 시작하며 고요하던 집은 다시 생명력을 갖게 된다.
영화 중간에는 구스타브 - 노라 - 아그네스 세 부녀의 얼굴이 겹쳐지는 몽타주가 등장한다. 짧게 스쳐가는 이 몽타주는 아주 강력한 메시지를 갖고 있다. 바로 그들이 - 그들이 겪는 모든 역사가 - 사실은 하나의 역사라는 것이다. 구스타브가 만든 영화의 결말은 그의 어머니를 모티브로 한다. 젊은 시절 반정부 운동의 전력으로 인해 고문을 받았고, 가정을 이뤘지만 끝내 스스로 집에서 생을 마감하기로 택한 어머니. 구스타브가 만들려는 영화에서 그 역할을 맡은 배우 ‘레이첼’은 인물의 감정을 알기 위해 당신의 어머니에 대해 말해달라고 말하지만, 구스타브는 몇 번이나 "이건 내 어머니의 이야기가 아니에요"라고 부정한다. 이후 시나리오를 읽게 된 아그네스는 노라에게 "이건 아빠가 언니를 위해 쓴 것 같아"라고 말한다. 구스타브의 영화는 어머니의 경험을 빌려 온 '노라를 위한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구스타브의 어머니의 자리는 딸(노라)의 자리라는 점에서 그들은 겹쳐진다. 또한 노라는 자신의 조카(에리크)를 아들 삼아 연기한다는 점에서, 노라의 자리는 아그네스(모성)의 자리이기도 하다. 그리고 아들을 맡은 에리크의 자리는 실제 역사에서 그 자리에 있던 감독, 구스타브 본인이의 자리이기도 하다. 이렇게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가족의 역사는 얽히고 그들은 서로의 자리에 앉는다. 이미 자신의 자리였지만 직접 앉은 적 없는 자리에 말이다. 가족은 가장 가까운 존재(자아)이면서 가장 먼 존재(타자)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를 깨달았을 때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집'이라는 공간은 단순히 공간적 배경을 넘어서 내부의 역사를 하나로 합쳐주는 역할을 한다.
가장 싫어하는 나와 화해하기
가족은 타자(남)이면서 자아(나)이다. 가족과 깊은 갈등을 겪는 경우는 주변에서 꽤 쉽게 목격된다. 부모를 미워하거나, 형제와 오래도록 소통하지 않고, 자식을 무시하는 경우는 생각보다 흔하다. 그러나 상대에 대한 미움보다 더 큰 미움은, 자신이 미워하는 상대와 아주 닮았기 때문일 것이다. 싫어하는 대상에게서 거울처럼 나의 모습을 볼 때, 어쩔 수 없는 가족임을 체감할 수밖에 없다. “넌 나와 많이 닮았어” 노라는 자신이 극도로 불편해하는 대상인 '아버지'에게 그런 말을 듣는다. 어머니와 가족에게 상처를 두고 떠났던, 지금은 다시 돌아와 영화의 주인공이 되어달라는 아버지. 노라는 그런 아버지를 싫어하면서도 그의 딸이기에 그를 닮았다. 앞서 말했듯 한 지붕 아래 가족이 하나의 역사를 공유하는 하나의 존재라면, 노라에게 구스타브는 ‘가장 싫어하는 나’ 일 것이다.
어린 시절 자신의 얘기로 에세이를 써서 연기를 해야 했던 노라는 가족의 이야기를 쓴 에세이 대신 연극 ‘갈매기’ 속 독백을 택한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 그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 배우로서의 큰 즐거움이라고 말한다. 아그네스가 그녀에게 "언니는 자신이 되기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 같다" 고 하자 그녀는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이다. 불안에 떠는 무대 뒤편의 모습과 한 마디만으로 청중을 휘어잡는 무대 위의 그녀는 정말 다른 사람 같다. 배우라는 일을 하는 그녀는 자신의 삶의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을 잘라내 멋진 연극의 일부분으로 덧대려 하는 것만 같다.
노라는 자신을 드러내길 두려워한다. 제대로 된 연애 관계를 갖지 않는 것도 상대에게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애인에게 “우리는 너무 가깝지 않아서 딱 좋아”라고 얘기한다. 한 침대에 누워있는 이에게 조차 자신을 드러내길 두려워하는 노라가 유일하게 마음을 터 놓는 대상은 아그네스일 것이다. 아그네스는 공연까지 취소하고 칩거 중인 그녀를 찾아간다. 그리곤 그녀에게 (구스타브의) 시나리오를 읽어달라고 말한다. 그녀가 읽어내는 시나리오 속 대사는 정말로 그녀의 이야기 같다. 아무 곳에도 의지하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는 그녀에게 아버지의 글은 그녀의 입을 빌려 나오는 가족의 호소이기도하고, 그녀가 말하지 못하기 때문에 대신 써 내려간 아버지의 편지 같기도 하다. 그녀는 그동안 내뱉지 못하던 절망을 인정하는 것이다. 자신이 가장 힘들 때 옆에 없던 아버지에 대한 분노는 또 다른 방식의 위로를 통해 조금씩 치유된다. 마침내 그녀는 남을 연기하지 않고 자신이 되기를 결정한다.
내가 되는 경험
<센티멘탈 밸류>는 끊임없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영화의 힘'에 대해서 말한다. 영화에서 유독 눈에 띄는 하나의 물건은 바로 '휴대폰'이다. 레이첼이 구스타브를 저녁 식사에 초대한 자리에서, 그녀는 그의 눈을 보면서 존경심을 표하는 반면 그녀 주변에 앉은 인물들은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다 "저도요"라고 짧게 동조할 뿐이다. 또 다른 장면. 에리크의 생일 파티를 위해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에리크가 계속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자 구스타브는 "왜 계속 저것만 들여다보고 있는 거니"라고 묻는다. 그러자 노라는 옆에서 함께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는 형부를 보며 '스크린타임이 언제 끝나냐'라고 비꼰다.
이와 반대되는 인물은 구스타브이다. 이를 테면 그는 휴대폰을 잘 다루지 못하는 이유도 있겠지만, 굳이나 아날로그 힘을 믿는 인물이다. 예컨대 그는 손자의 생일 선물로, 이제는 집에서 볼 수도 없는 영화 DVD를 선물하는 사람이다. 그것이 그가 인생을 배운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후 구스타브가 영상을 찍으며 노는 방식을 손자에게 알려주자, 에리크는 더 이상 휴대폰에 몰두하지 않고 직접 주변을 찍으며 놀기 시작한다. 그가 살아온 방식은 각자의 세계에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보고, 카메라를 들고, 직접 눈을 맞추는 방식인 것이다.
구스타브는 연극배우인 딸을 두었음에도 그녀의 공연을 제대로 본 적이 없다고 한다. 그건 그가 연극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는 실망한 노라에게 이렇게 답한다. "연극은 눈빛을 제대로 볼 수 없잖아." 구스타브의 말에 따르면 '눈빛'이라는 힘은 연극보다는 영화의 전유물이다. 그렇다면 연극은 할 수 없고, 영화는 할 수 있는 게 있다는 말이다. 그건 무엇인가.
'눈은 영혼의 창'이라는 유명한 격언처럼, 영화에서 눈을 통해 상대를 들여다보는 것은 그 인물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 이상의 힘이 있다. 노라가 세워진 연극무대를 멀리서 바라본다고 해보자. 관객은 그녀가 '된다'기보다 그녀를 객체로서 바라보게 되는 것에 가깝다. 그러나 이런 지점에서 영화는 조금 다르다. 마지막 장면, 영화의 엔딩을 완성하고 노라와 구스타브는 서로를 한참 동안이나 바라본다. 그들이 하는 것은 서로의 영혼의 창을 통해 서로가 되는 경험이다. 이를 바라보는 관객은 더 이상 그들을 객체가 아닌 '나'로 본다. 영화는 눈빛을 통해 '내가 되는 경험'을 선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