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 강릉!

허진호 감독 각본집

by 주울


봄날은 간다(2001), 허진호


"<8월의 크리스마스>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서 당시 작가였던 오승욱 감독과 주문진에 가서 머문 적이 있어요. 그때 술을 많이 마셨죠.

방파제 쪽에 술상을 차리고 달을 바라보며 쪼그리고 앉아 먹기도 했어요. 무슨 사연인지 모르겠지만 저희처럼 그렇게 혼자 술을 마시는 여자도 있었고요. 그런데 그게 오승욱 감독의 최근 영화 <리볼버>(2024) 마지막 장면에 딱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리볼버>를 보고 오승욱 감독에게 그 장면이 혹시 그때 거기서 온 거 아니냐고 물었더니 맞다고 하더라고요. 물론 제 영화가 아니라 남의 영화 얘기이긴 한데, 세상의 모든 감독에게는 그런 '원형' 같은 게 마음속에 분명히 있는 것 같아요.

<8월의 크리스마스>에는 제목과 영화 속 계절에서 오는 거리감 같은 게 있어요. 한여름 무더위에서 선선한 초가을로 넘어가는 느낌.

그렇게 아주 가깝지도 않고 멀지도 않게 세상을 바라보는 거리감, 혹은 관조를 좋아하는데요. 그런 적당한 거리감으로 인물과 세상을 바라보고자 하는 마음이 데뷔작에 담겼다고 해야 하나. 타인에게 깊이 들어가서 마치 다 아는 것처럼 얘기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보거든요. <8월의 크리스마스> 이후 지금까지 그런 태도가 계속 유지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웃음). 아무튼 감독으로서 언제나 변함없이 추구하고 싶은 것입니다.“

- <8월의 크리스마스 각본집> 176p.


“각본집에서는 카페에 상우가 남아있는 채로 은수가 자리를 뜨는데요, 다음과 같이 지문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카페를 나가다가 뒤돌아보는 은수. 상우에게 손을 흔들어주며 희미하게 웃어 보인다. 상우도 그렇게 웃는다. 앉아 있는 상우. 창밖 벚나무들 아래로 사람들 속에 은수가 가고 있다. 벚꽃 구경하듯 천천히 걸어가는 은수. 환한 빛이 스며드는 창가. 화분을 바라보는 상우.” … 강원도 삼척 삼보장 사거리인데, 벚꽃이 정말 예쁘더라고요. 그런 아름다운 시간을 함께 보낸 사이니까, 두 사람이 벚꽃 풍경에 함께 있으면 좋겠더라고요. 그런데 아무래도 촬영 자체를 실내에서 야외로 바꾸니까 사람들이 엄청나게 몰려들었고, 제작진은 햄버거를 먹으면서 바쁘게 촬영할 수밖에 없었죠. 4분 정도 되는 긴 장면이라 굉장히 힘들었는데, 스태프 중에 촬영하다가 우는 친구들도 있었어요. 왜 우는지 물었더니 그냥 무척 슬프다고 하더라고요.“

- <봄날은 간다 각본집> 186p.




2월인데도 벌써 봄이 오는 것이 희미하게 느껴진다. 며칠 전 한강 공원에 다녀왔을 때도 이미 돗자리를 펴고 피크닉을 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더랬다. 2월의 피크닉이라니. 오늘은 강릉 바다에 다녀왔다. 바닷바람은 역시 강력했지만 햇볕이 꽤 따듯했기 때문에 발을 담그는 아저씨가 보였다. 마음만 먹으면 물에도 들어갈 수 있겠다.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봄이 온다고 생각하면 ‘봄날은 간다’를 듣는다. 자우림의 버전과 백설희가 부른 두 곡을 다 듣는다. 그리곤 <봄날은 간다>를 보고 싶어진다. 강원도의 한산한 바람이 부는 듯한 기분을 느끼고 싶어진다.

허진호 감독을 좋아했지만 최근 나온 영화는 보지 못했다. 사실 허진호 감독을 특히 좋아한다기보다 그 ‘두 영화’를 아주 좋아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살아 보지 못한 시대에 대한 향수를 느끼게 해주는 영화들. 아껴두고 있다.

무턱대고 도착한 강릉에서 놀다가 대충 아무런 모텔방이나 잡아 친구들과 들어갔다. 침대는 싫었고 장판에 눕고 싶었다. 이불에 누워서 <라디오 스타>를 틀었다. 그게 유독 보고 싶었던 건 아닌데 왠지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나오는 비와 당신을 듣고 싶었다. 맥주를 마시다 누운 채로 괜히 노래를 따라 불렀다. 다음으로는 <봄날은 간다>를 보자는 얘기를 했다. 친구도 역시 엎어진 채로 중얼거린다. ”아저씨 강릉!.. 진짜 멀리도 산다.“ 이불 밑으로 손을 넣으니 장판 바닥이 따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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