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란 흐르는 강물처럼

<하나 그리고 둘>, 에드워드 양

by 주울


image.png Yi Yi(2000), Edward Yang


대만 영화를 많이 본 것은 아니지만 대만 뉴웨이브 시절의 영화들이 주는 특유의 감각이 있다. 홍콩의 자유분방함과, 일본의 현대적인 느낌과는 또 다른 대만 영화만이 주는 도회적이고 쓸쓸한 감각이 있다. 정적인 숏들의 나열과 차가운 색감, 그 위로 종종 비치는 햇살은 스크린 너머 나에게 쬐여주는 듯 따듯하게 느껴진다. 단순히 시각적인 부분뿐만이 아니다. 이 영화는 사운드적으로도 그 감각을 훌륭하게 자극한다. 비유하자면 이 영화의 사운드는 스테레오가 아닌 모노에 가깝다. 실제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요즘 영화가 주는 입체적인 감각과는 다른 아주 단편적이고 때로는 과장되리 만큼 단순한 사운드 - 문을 여는 소리, 목으로 침을 삼키는 소리, 발을 구르는 소리, 물건을 매만지는 소리 - 는 정적인 연출의 아주 특별한 축을 담당하여 더욱 몰입하도록 만든다.


<하나 그리고 둘>은 개인적으로 오래도록 벼르고 벼르던 영화 중 하나다. 드문드문 재개봉을 하긴 했지만 장난처럼 매번 시간이 맞지 않아 포기했는데, 드디어 극장에서 보게 되었다. 긴 러닝타임과 정적인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거의 3시간 동안 그 영화에 푹 빠져있었다. '드라마를 쓰려면 이렇게 써라'라며 에드워드 양은 이 영화로 답을 대신한다. <하나 그리고 둘> 어린 '양양'의 가족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드라마를 깊게 탐구하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 영화에는 인물의 표정을 깊이 들여다보는 클로즈업이 (없다고 해도 좋을 만큼) 극히 드물다. 스크린에서 멀리 떨어진 관객이라면 끝까지 인물의 이목구비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할 수도 있다. (과장이 아니다) 그 말은 즉 인물에 대한 감정의 동화 없이, 항상 한 발 자국 멀리 떨어져 인물을 관찰하고, 관객이 감상적이기보다 객관적으로 영화를 바라보도록 하는 것이다.


인물들이 겪는 일은 때때로 별 것 없다고 하곤 하는 우리 일상과 맞닿은 듯하다가도, 동시에 남의 일처럼 너무 멀게 느껴진다. 극의 중심은 고등학생 딸 '팅팅'과 어린 아들 '양양'을 둔 'NJ'라는 남자의 가족이다. 그리고 모든 사건은 팅팅의 할머니가 쓰레기를 버리러 집을 나섰다가 알 수 없는 사고로 인해 혼수상태에 빠지게 되며 촉발된다. 팅팅은 자신이 버렸어야 할 쓰레기 때문에 할머니가 사고를 당했다며 죄책감에 빠지고, 양양은 움직이지도 말을 할 수도 없게 된 할머니로 인해 홀로 고민에 빠지며, NJ의 아내는 자신의 어머니를 보며 ‘죽음’을 가까이 느끼게 되어 집을 나가고, NJ는 우연한 계기로 첫사랑을 만나게 되며 지난 청춘을 다시 돌아보기 시작한다.


휴먼 드라마, 다시 말해 인간사는 동상이몽이다. 같은 컵을 보면서도 물이 반이나 있다고 하고, 누구는 물이 반밖에 없다고 한다. 오해와 이해. 이것이 드라마의 출발이자 끝이다. 영화의 초반부 NJ는 처남의 결혼식장에서 우연히 첫사랑과 30년 만에 재회한다. 어색한 인사와 함께 헤어지는구나 싶던 찰나, 여자가 다시 돌아와 그에게 토해내 듯 따져 묻는다. “30년 전에 왜 나를 떠났어? 왜 말도 없이 나타나지 않았던 거야!” 그 순간 둘의 친구가 끼어들어 둘은 애매한 공기 속 다시 헤어진다. "내가 여기 왜 왔더라" 끼어들었던 친구는 내려온 엘리베이터를 타고 그대로 다시 사라진다. NJ는 두 번을 놓친 끝에 결국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라진다. 뭔가에 휩쓸려 원래의 목적을 잃기도, 알지 못한 방향을 찾아내기도 하는 것이 오해와 이해의 역할이다. 30년 전 헤어진 두 연인은 끝내 오해가 쌓여 다른 길로 갈라졌지만 다시금 만났다. 그리고 일본에서 다시 재회한 둘은 30년 전 이루지 못한 이해를 완성하려 하지만 끝끝내 실패하고 다시 자신의 삶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실패일까?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NJ에게는 분명히 달라진 것이 있다.


또 오해와 이해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인물은 바로 어린 양양이다. 그는 아버지가 준 카메라를 들고 무언가를 찍는다. 그가 찍는 건 사람들이 보지 못한 것이다. 양양은 누군가가 결코 알지 못한 것, 다시 말해 누군가가 완성하지 못한 자기 이해를 위해 그들이 보지 못한 것을 찍는다.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건 그들 자신의 뒷모습이다. 사람들이 스스로의 뒷모습을 보지 못하는 건 당연하다. 거울을 통해 보는 앞모습은 자기가 보는 ‘나’고 내가 보지 못하는 뒷모습은 남이 보는 ‘나’다. 양양은 가장 순수한 눈으로 남이 보지 못하는 자신을 담는다. 양양이 찍은 무수한 뒷모습은 흔들리고 밝기도 제각각이지만 분명한 메시지를 지녔다. 그가 삼촌을 찍은 사진을 그에게 건네자, 그는 "이런 걸 왜 찍었어"라고 핀잔 아닌 핀잔을 준다. 삼촌에게는 더 이상 순수한 눈으로 바라볼 능력이 없다. 자신의 뒷모습을 마주하고도 말이다.


NJ는 한참이 지나 집으로 돌아온 아내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 청춘을 돌아볼 기회가 있었어. 후회하는 일들이 있었는데, 돌아가도 난 똑같은 선택을 할 것 같아” 그의 말은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서 실수를 없던 일로 하지는 못한다는 얘기다. 만약 하나의 중요한 실수를 없던 일로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어떻게든 다른 후회를 낳게 될 운명이기 때문에 그 불완전한 운명을 받아들인다고 말한다. 이 말을 함으로써 그의 인생에는 현재만이 존재하게 된다. 소설 '싯다르타'에서는 불교 사상에 빗대어 인생을 '흐르는 강물'이라고 설명한다. 흘러간 물은 '과거'이고 앞으로 흐를 물은 '미래'이며, 우리는 둘 다 알 수 없으므로 오로지 현재 흐르는 물(현재)만이 존재할 뿐이다. 후회를 낳은 과거와 또 다른 후회를 낳게 될 미래는 알 수도, 갈 수도 없기 때문에 우리는 현재에 충실해야 한다. 그의 말은 현재를 긍정한다기보다 현재를 묵묵히 받아들이는 태도에 가깝다. 그의 말을 들으며 각자는 생각할 것이다. 내가 돌아가고 싶은 인생의 순간은 언제인가. 에드워드 양의 시선은 조금은 냉소적이고 쓸쓸하다.


우리 각자가 볼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영화는 필요하다. 극 중 팅팅과 패티가 나누는 대화에는 영화에 대한 함의가 있다. 방금 보고 나온 영화가 '슬퍼서 재미없었다'는 말은 스스로에 대한 자조적인 농담처럼 들렸다. 그는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을 영화는 보여준다고 말한다. '우리가 알 수 없는 걸 보여주는' 영화는 곧 우리가 알 수 없는 뒷모습을 보는 것과다. 예를 들면 살인자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다기 때문에 영화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팅팅은 살인자의 시각을 보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되묻는다. 그는 그것이 우리의 삶을 더 풍부하게 한다고 말한다. 이 말이 와닿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절대 알 수 없다고 가정한 살인을 하게 되었다. 평생 우리의 일이 아니라 타자의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살다 보면 내 자리가 되곤 한다. 생각지도 못한 자리에 서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이치다. 그리고 영화는 그것을 깨우쳐 준다. 영화가 필요하다면 그렇기 때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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