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진 동전이 옆면으로 설 확률

<럭키 데이 인 파리>, 우디 앨런

by 주울
image.png Coup de Chance(2023), Woody Allen


<럭키 데이 인 파리>의 원제는 <Coup de Chance>, 직역하자면 ‘뜻밖의 행운’이라는 뜻이다. 본래의 의미를 두고 <럭키 데이 인 파리>라는 뜻밖의 제목으로 개봉한 것은 분명 우디 앨런의 전작인 <레이니 데이 인 뉴욕>과 비슷한 이미지를 만들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나 역시 전작과 비슷한 로맨스를 생각하며 영화를 보기 시작했지만 결국 제목에 크게 속아버렸음을 알았다. 이 영화는 결코 로맨스가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1부까지는 로맨스였고, 충격적인 전개와 함께 2부가 시작되면 일종의 수사극 혹은 서스펜스 장르로 변한다. 그러나 우디 앨런 식의 서스펜스는 격투나 혈흔이 낭자한 정통 장르극과는 거리가 멀다. <돈을 갖고 튀어라> 같은 하찮은 범죄극처럼, 오히려 긴박한 상황을 비틀어 우스워보이도록 연출하거나, 살인이나 범죄 장면에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재즈 음악을 삽입하기도 한다. 적어도 우디 앨런식의 수사극에서는 가능하다.


영화의 초반부는 최근 10여 년간 우디 앨런이 보여준 대부분의 로맨스와 크게 다르지 않다. 트로피와이프로 불리는 결혼 생활에 점점 지쳐가는 '파니'는 우연히 길거리에서 작가가 된 고등학교 동창 '알랭'을 만나고 급속도로 일상을 벗어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영화가 파리를 배경으로 한다는 점에서는 <미드나잇 인 파리>를, 우연한 만남에서 비롯된 사랑이란 점에서는 <레이니 데이 인 뉴욕>을 연상시킨다. 이런 정보를 끼워 맞추기 시작할 때쯤이면 머릿속으로 ‘결국은 둘이 또 그렇게 되겠구나’하는 예측을 한다거나, 최근 우디 앨런이나 홍상수의 커리어에 드러난 수많은 자가 복제라는 상관관계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물론 그것을 알면서도 그들의 영화를 볼 가치는 충분히 많다)


그러나 영화는 파니의 남편 ‘장’이 아내를 의심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다른 국면으로 치닫는다. 장은 알랭의 존재를 알게 되자 그를 없애기로 한다. 그는 이미 여러 번 경험이 있는 것처럼 수월하게 그를 '태평양에 던져버려라'라고 부하에게 지시한다. 이때까지도 이 영화가 로맨스라고 믿었던 나는 '그래, 여기서 한번 반전을 주는 것도 좋지'하면서 보고 있었지만, 허무하리 만큼 쉽게 알랭은 정말로 태평양에 던져지고야 만다. '그래.. 하지만 그가 어떻게든 돌아올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나의 순진한 믿음에도 불구하고 알랭은 그것을 마지막으로 영화에 돌아오지 못한다. 여기서부터 예측하지 못한 수사극이 시작된다.


파니는 알랭이 자신을 버리고 떠났다고 믿으며 절망하지만, 파니의 엄마는 장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과거 장의 동업자도 비슷하게 자취를 감췄던 일이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녀는 장의 뒤를 밟고, 그가 탐정과 부하를 고용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된다. 그러자 장은 한 발 더 나아가 장모님을 없애기로 결정하고 그녀를 숲으로 유인한다. 마침내 장이 숲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놓인 그녀를 향해 (사슴으로 오인했다는 핑계로) 총을 쏘려던 찰나, 되려 장이 사슴으로 오인되어 어이없게 다른 이의 총에 맞아 죽는다.


로맨스에서 수사극으로 치닫는 이 일련의 사건들은 한 편의 우화에 가깝다. 하마구치 류스케가 ''우연'이란 요소가 인생에 틈입하는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우연과 상상>을 만들었다'면, 이 영화는 우디 앨런 버전의 <우연과 상상>이라고 할 수 있다.


원제에 쓰인 'Chance'는 '행운 혹은 기회' 같은 긍정적인 단어로 읽히기도 하지만, '확률 혹은 우연'이라는 중의적인 단어로 읽힐 수도 있다. 전자는 의도적(으로 긍정)이지만, 후자는 맥락에 따라 관점이 달라진다. 우디 앨런의 모든 영화에는 불행이나 행복에 대한 일종의 관조적인 태도가 있다. 마치 그 스스로 연기할 때 보였던 ‘데드팬 코미디’처럼 말이다. 행운을 눈앞에 두고도 웃지 못한다거나, 불행이 닥쳐도 울기보다 실소라도 터뜨리는 것이 그의 영화가 가진 재치다. 무언가에 대해 좋다고 하지도, 나쁘다고 하지도 않고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살아야 한다는 듯한 태도로 일관한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알랭'이라는 인물의 존재는 뜻밖이다. 관조적으로 일관할 것 같은 흐름 속에서 그는 유일하게 긍정을 믿는 사람이다. 그는 우연히 길거리에서 재회한 첫사랑에게 운명을 말한다. "우리가 태어나는 확률은 40 경분의 1 이래. 태어나 존재하는 게 기적이라고. 그러니 그 기적을 허비하지 마." 길거리에서 첫사랑을 알아본 것도, 그녀와 사랑을 나눌 수 있던 것도, 그것이 다시는 사랑하지 않기로 했던 파리인 것도 모두 우연이면서 행운이었다. 그러나 그 우연이 되려 그를 태평양 한가운데로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게 만들었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반면 '장'이라는 인물은 정 반대로 우연과 운을 믿지 않는 인물이다. 그는 자신이 운명을 장악할 수 있다고 믿고 그렇게 만든다. 두 남자 사이에 놓인 파니는 다시 말해 '우연을 믿을 것인가 말 것인가'라는 갈림길에 서있는 모양이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결국 어떤 결과에 당도한다. 뜻밖에도 우연(알랭)과 非우연(장)이 모두 사라지게 된다. 동전을 던졌는데 옆면으로 선 꼴이다. 그녀는 그런 현실 앞에 절망도 환희도 하지 않고 그저 바라볼 뿐이다. 다만 그녀는 알랭이 남긴 글을 곱씹는다. 그의 말처럼 삶은 우연의 산물이고, 그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게 무슨 소리냐고? 그런 질문을 하는 관객에게 영화는 담담히 말할 것이다. "이 영화가 너의 인생에 영향을 준다면 좋고 별로라면 어쩔 수 없는 거지.."







*장을 연기한 배우 ‘멜빌 푸포’의 이름이 익숙해 찾아보니, 에릭 로메르 감독의 <여름 이야기>의 주인공이었다. <여름 이야기> 속 여자에게 둘러 쌓인 유약하고 가냘픈 그 배우가, 이제는 범죄를 사주하는 부자 남편 역할을 하게 되었다니.. 전혀 매치가 되지 않지만 반가운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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