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을 연주한다는 것(3)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카라얀의 선택, 그리고 관객의 자리

by 클래식덕후문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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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7


이 조합이 만들어내는 감상은 분명합니다.


이 연주는 조금도 위로하지 않습니다.


청중을 대신해 흥분하지도, 감정을 정리해 주지도 않습니다.


청자는 음악 앞에서 혼자가 됩니다.


어디에도 기대지 못한 채, 음악이 만들어 놓은 구조 안에 그대로 남겨집니다.


저는 이 녹음을 들을 때마다,


‘좋다’는 말보다 ‘끝까지 들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Episode.8


이 경험은 자연스럽게 페터 한트케의 <관객모독>을 떠올리게 합니다.


한트케의 희곡은 관객을 공격하기 위해 만들어진 작품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이 작품은 연극이 관객에게 제공해 온 모든 보호 장치를 제거함으로써,


관객을 지나치게 정직한 상태로 노출시킵니다.


서사도, 인물도, 감정의 통로도 사라진 자리에서 관객은 단지 ‘여기 앉아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됩니다.



960px-Peter_Handke.jpg 페터 한트케(1942~ )(출처: 위키미디어)



Episode.9


스트라빈스키와 한트케는 서로 다른 예술 언어를 사용하지만,


관객을 대하는 태도만큼은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습니다.


두 사람 모두 관객을 설득하지 않습니다.


이해를 돕지 않고, 감동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대신 관객이 작품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지 스스로 묻게 만듭니다.



Episode.10


카라얀의 <봄의 제전>이 정밀함을 통해 청중을 음악의 의식 속에 고정시켰다면,


<관객모독>은 언어를 통해 관객을 공연의 상황 속에 묶어 둡니다.


둘 다 출구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감상은 완료되지 않고, 경험은 끝나지 않습니다.


음악은 멈추고, 언어는 사라지지만, 관객은 제자리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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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11


그래서 이 작품들은 오래 남습니다.


쉽게 소비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스트라빈스키의 음악과 한트케의 언어,


그리고 카라얀의 선택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같은 사실을 말합니다.


예술은 관객을 편안하게 만들어야 할 의무가 없으며,


때로는 관객을 한 자리에 남겨 두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사실입니다.



Episode.12


<봄의 제전>은 한 세기가 지났지만 여전히 낯섭니다.


그리고 카라얀의 1963년 녹음은 그 낯섦을 줄이기보다, 오히려 정확하게 유지합니다.


그 덕분에 우리는 지금도 이 음악 앞에서 묻게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감상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 안에 서 있는가.


이 질문이 사라지지 않는 한, 이 작품은 계속해서 현재형으로 남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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