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는 다 기억한다

혹등고래의 한

by 니노의성

혹등고래가 돌고래를 구했다.
TV 화면 속엔 범고래 무리가 돌고래 떼를 쫓고 있었고,

갑자기 거대한 혹등고래 한 마리가 나타나 훼방을 놓았다.
지느러미로 휘둘러 범고래를 밀어내고, 범고래들이 당황한 사이에 돌고래들은 도망쳤다.

처음엔 그냥 자연의 우연인 줄 알았다. ‘뭐지, 왜 굳이? 자기 새끼도 아닌데?’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우연이 아니라 기억이었다.
혹등고래는 바다에서 가장 많이 범고래에게 당한 종이다.
그들은 기억한다.
필사의 저항 끝에 자식을 눈앞에서 잃은 그 순간,
어릴 적 극도의 공포감에 짓눌리며 범고래에게 쫓기던 나날들.
그 모든 감정들이 혹등고래들의 행동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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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등고래는 오래 산다.
기억도 오래 간다.
그리고 그 기억은 고래의 행동을 만든다.

혹등고래가 범고래 사냥에 훼방을 놓는 사례는 전 세계에서 수십 건 이상 관찰됐다.
놀라운 건, 자기 종도 아닌 물개나 돌고래, 다른 고래의 새끼까지 적극적으로 구한다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이타성’, ‘소리 착각’, ‘문화적 반응’ 같은 다양한 가설을 붙인다.
어떤 연구자는 농담처럼 말한다.
“혹등고래가 열 받아서 개입하는 거 아닐까요? 시끄럽게 사냥하니까 짜증 나서…”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건 단순한 짜증이 아니라 *한(恨)*이다.
그건 어떤 대단한 윤리도, 낭만적인 동정도 아니다.
그건 수십 년 동안 새겨진 고통이,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몸에 배어버린 감정의 잔재다.

혹등고래는 범고래의 포악함을 안다.
한두 번 겪은 게 아니다.
그리고 자기 새끼가 아니어도, 자기 종이 아니어도,
그 익숙한 비명 소리를 듣는 순간,
그때 그 고통이 되살아난다.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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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기억이 고래를 움직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그 장면은 오히려 너무 인간적이다.
때로는 과거를 견딜 수 없어서,
다시 그 일이 반복되는 걸 그냥 못 견뎌서,
몸이 먼저 반응할 때도 있는 거니까.

혹등고래는 그런 고귀한 존재다.
힘이 세서가 아니라,
기억이 깊어서 움직이는 생명체.

그리고 그 기억이,
어쩌면 바다에서 가장 오래된 정의감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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