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는 조롱했고, 젤렌스키는 외쳤다. 진짜 ‘쇼’를 한 사람은 누구?
젤렌스키는 지금도 목숨 걸고 말하고 있다.
칼보다 날카로운 침묵 속에서,
탱크보다 무거운 책임을 짊어진 채,
그는 오늘도 "도와달라, 제발 도와달라" 외친다.
그는 멈출 수 없는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다.
자신의 국민이 피를 흘리고,
자기 땅에서 아이들이 폭격에 맞아 죽는 현실 앞에서
어떻게 멈출 수 있단 말인가.
자존심, 체면, 위신 그 모든 것을 내던진 채,
그는 오늘도 구걸하듯 손을 내민다.
하지만 그걸 두고 누가 감히
“구걸했다”라고 손가락질할 수 있을까.
그가 한 건,
자기 나라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저항,
죽어가는 국민들에게 남은 마지막 희망을 붙잡기 위한 사투였다.
세상 앞에 무릎을 꿇고 "조국을 살려달라"라고 외치는 그를
어떤 이는 무참히 조롱했다.
전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한때 ‘자유 세계의 수호자’라 불리던 나라의 대통령이
절박한 외침 앞에서 냉소적으로 웃으며 말했다.
“This is gonna be great television.”
(“이건 정말 멋진 방송 화면이 되겠군요.”)
그 순간, 조롱당한 건 젤렌스키가 아니었다.
전쟁 앞에서 아들들을 잃고,
국토가 무너지는 광경을 지켜보던 우크라이나의 국민들이었고
우크라이나 그 자체였다.
미국은 원하지 않으면 도와주지 않을 수 있다.
모든 나라는 자국의 이익을 우선하니까, 그럴 수 있다.
국민 여론이 반대하고, 돈이 없고, 정치적 부담이 크다면,
"우리는 도와줄 수 없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게 서운할 수는 있어도,
비열하지는 않다.
하지만 트럼프는 선택했다.
도와주지 않는 것에 그치지 않고,
조롱하는 쪽을.
그는 대통령의 얼굴을 벗고,
조롱이라는 광대의 탈을 뒤집어썼다.
조국을 지키기 위해
절박하게 외치는 사람을 두고,
자신의 정치적 계산 속에서
비웃는 쪽을 택했다.
젤렌스키는 외교에 능하지 못한 사람이었고, 감정호소에만 의존해 외교에 실패했다.
그러나 그게 조롱받아 마땅할 일은 아니다.
젤렌스키는 정치 외교 전문가도 아니고, 전쟁 지휘관으로 훈련된 사람도 아니다.
그는 그저 배우 출신이고, 국민들이 희망을 걸어 선택한 상징이었다.
그런데 대통령이 된 그에게 현실은 전쟁이었고, 그는 각 나라를 돌며 도움을 구걸해야 했다.
그리고 그 모습이 마치 전쟁을 피해 도망 나온 겁쟁이처럼 보였을 것이다.
사람들은 “연기하러 왔냐?” 같은 말로 쉽게 비웃지만 정작 자신이라면 그 자리에서 “말 한마디라도 할 수 있었을까?” 자존심 다 버려가며 연기라도 할 수 있었겠냔 말이다.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건, 아무도 쉽게 말하면 안 되는 것이다. 실력이 부족하다고 해서 그 사람이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건 아니니까.
그는 바보고 ‘실패한 지도자’ 일 수는 있다. 하지만 적어도 젤렌스키는 ‘게으른 지도자’, ‘비겁한 지도자’는 아니다.
그는 바보처럼 앉아 있지 않았고 나라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부족한 능력에도 불구하고 매일 움직였다.
그건 연기가 아니라, 그가 가진 방식의 투쟁이었다.
어떤 지도자도 부족함이 없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그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니 국민을 위해 최선을 다해 움직이는 사람은 비난보다 먼저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정치인에게 완벽함을 기대하지 않는다.
모든 국가를 구하라고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감정 없는 로봇이 아니다.
비참한 현실 앞에 선 인간을 향한 최소한의 존중
그것만은 지켜야 하지 않을까.
도와줄 수 없다면, 말하라.
“미안하다.”
“유감이다.”
“우리는 지금 너를 도와줄 수 없다.”
“우리에겐 여유가 없다.”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그 한 문장만 있었더라면,
젤렌스키는 그날 밤
조금 덜 참담한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힘을 과시하는 나라를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부끄럽지 않은 나라를 원한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품격을 잃은 세계는, 오늘도 조용히 무너지고 있다.
이 글을 마무리하며,
나는 오늘도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 우크라이나의 모든 이들에게
진심 어린 응원의 마음을 보낸다.
우크라이나에 평화가 오기를,
그들의 싸움이 부끄럽지 않게 기억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