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인 생각 수필로 끄적이기 #0
요즘은 예전과 달리 일상생활 속에서 손 글씨를 쓸 일이 별로 없다. 친구와 주고받던 편지도 전자우편이나 휴대전화기가 대신하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보고서와 서류 작성도 컴퓨터로 전환된 지 오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글씨 좀 못 쓰면 어때?” 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꽤 많다. 글씨를 못 쓴다고 해서 혜택이나 불이익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가끔 악필 때문에 당황스러운 예도 있다. 살다 보면 손으로 직접 글씨를 써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래서 나는 직접 글씨를 쓰곤 한다. 컴퓨터로 문서 작업하기 전에는 한 번쯤은 종이에 글을 쓰는 버릇이 있다. 글을 쓸 때 항상 연필이나 펜으로 꾹꾹 눌러쓴다. 글을 쓰다 보면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는데 가끔은 힘이 너무 들어가 손이 아릴 정도다. 흔히들 글씨는 제2의 얼굴이자 마음의 거울이라고 한다. 사람이 자주 사용하는 단어나 말투, 습관이나 행동 등을 살펴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듯이 글씨체를 보아도 그 사람이 어떤 성격인지, 마음가짐과 성품이 어떤지 미루어 집적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 걸까? 나는 어린 시절 유난히 내 글씨체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앙상하게 생긴 나뭇가지처럼 날카로워 보이려고 부득부득 애를 쓰는 것 같다. 내가 이런 글씨체를 가지게 된 초등학교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국립이 아닌 사립 초등학교였다. 공부를 잘하는 것도 중요하였지만, 학교에서 무엇보다 강조한 것은 예의범절과 윤리 도덕이었다. 그래서 일반적인 과목 외에도 예의범절에 관한 수업이 따로 있었다. 그중 ‘바른 글씨 쓰기’라는 수업이 나의 글씨체를 만든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수업 시간에 궁서체와 바탕체를 수백 번 연습하는 시간이었다. 어린 시절 나는 유난히 이 수업을 싫어했다. 당시에 연필을 제대로 잡지 못해서 손에 무리가 가던 상황이었다. 하루는 숙제하기 너무 싫어서 글씨를 날림으로 마구 써서 낸 적이 있다. 그래서 호되게 혼났다. 그때 당시에는 체벌이 있던 시절이어서 배꼽 주변 살을 들어 올리는 벌을 받았던 기억이 났다. 아프기도 했지만, 당시 애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당하는 벌이라 망신까지 당했던 기억이 난다. 그 이후로 나는 글씨 쓰기 연습을 게을리한 적이 없었다. 손이 힘들고 정말 재미없는 수업이었지만 다시는 혼나지 않기 위해서 열심히 했던 기억이 난다. 수업을 통한 연습은 습관이 되었고 나의 글씨체는 느리지만, 체계적으로 완성되어 갔다. 또한, 일기 쓰기를 통해 나의 글씨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는 결과를 만들었고, 장담하건대 어느 시절보다 글을 많이 쓰던, 글씨체를 연습하는 시기였다고 생각한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글씨 연습도 내 글씨체를 만드는 것이 도움 되었지만 쓴다는 행위 자체가 더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사립학교에 다니는 것은 초등학교가 마지막이었다. 이사를 하면서 아주 새로운 환경에서 학교를 다녔고 그 시절 나에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아이들이 글씨를 잘 못 쓰는 것에 대해 꽤 충격을 받았던 걸로 기억한다. 왜냐하면, 그 시절 나는 모든 아이가 글씨 연습을 거쳐서 졸업해서 모든 아이들이 글씨를 잘 쓰는 줄 알았다. 물론,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 학생 아이들도 모두가 글씨를 다 잘 쓰는 것은 아니었지만… 많은 아이의 글씨체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글씨를 못 썼다. 여자 아이들은 글씨를 못 쓰는 경우가 드물었는데 남자아이들은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을 찾기 힘들 정도였다. 또 하나 재미있었던 것은 여자아이들의 글씨체였다. 내가 항상 연습하고 본 글씨체는 궁서체와 바탕체였다. 그것에 대한 영향으로 내 글씨체는 동글동글하고 부드러운 느낌보단 날카롭고 각진 느낌이 뿜어져 나온다. 그런데 여자아이들의 동글동글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나는 나와 아주 다른 느낌의 글씨체를 쓰곤 했다. 나는 그것을 되게 부러워했고 닮고 싶어 했다. 결정적인 계기는 어떤 여자아이의 한마디 말이었다. 2학년 때는 여자애들과 모여 노트에서 낙서나 그림을 그리며 놀곤 했는데, 한 여자애가 내가 쓴 글씨를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야, 너는 글씨를 잘 쓰긴 하는데 뭔가… 이상하다? 되게 날카롭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잘못 쓰는 것 같기도 하고?”
웃으면서 넘겼지만, 그때의 나는 그 말이 여린 마음에 되게 상처를 입었던 것 같았다. 그 아이도 유난히 글씨를 잘 쓰는 편이었는데 그 동글동글하고 부드러운 느낌의 잘 표현했다. 나는 그것을 되게 부러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질투했다. 그래서 그랬던 걸까. 나는 여자애들이 쓴 글씨를 가져와서 심심할 때마다 연습하곤 했다. 그리고 그 이후로 남 앞에서 내 글씨체를 보여주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점점 내 글씨체를 보고 많이 날카로워진 글씨체에 섬뜩함을 넘어서 거부감을 느끼곤 했다. 습관처럼 굳어져 버린 글씨체를 바뀐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영향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나는 받침 자를 쓸 때 다른 글씨는 몰라도 ‘ㄴ’과 ‘ㄹ’을 쓸 때 흩날리면서 부드럽게 쓰는 습관이 있다. 아마 중학교 시절에 연습하던 습관이 지금은 완전히 굳혀져 버린 것 같다.
커가면서 나는 내가 글씨를 잘 쓴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자존심이 낮은 성격과 겹치면서 글씨 쓴 것을 보여주는 것을 부끄러워하였다. 오히려 나는 내 글씨체를 싫어했던 것 같고 스스로 글씨를 못 쓴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내 글씨체를 싫어한 지 시간이 좀 지났다. 나는 내가 쓴 노트나 필기를 남에게 절대 보여주지 않았고, 남들에게 보여주지 않는 일기나 인터넷에 글을 올리는 것을 즐거워했다. 또한, 소설가라는 꿈을 이루고자 글을 계속해서 썼고 고쳐나갔다. 신기한 것은 컴퓨터가 없던 것도 아닌데 굳이 노트에 쓰는 것을 고집하고 그랬는데 아마 남들에게 글씨체를 보여주기 싫었던 마음과 글솜씨가 늘려면 직접 써야 한다는 논술 학원 선생님께서 말씀에 더 그랬던 것 같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독서실을 새로 등록하려고 필요양식을 쓰는 도중이었다. 독서실 아줌마가 내 글씨를 빤히 보더니 말씀하시길 요즘 아이들답지 않게 글씨를 잘 쓴다고 칭찬해 주셨다. 내가 글씨를 잘 쓴다니…. 고맙다고 인사는 했지만 내가 글씨를 잘 쓴다고 생각해 본 적 없는 나로 매우 당황스러웠다. 점점 자라고 어른이 되면서 글씨를 쓸 일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지만 내가 글씨를 잘 쓴다는 말을 오히려 더 많이 들었던 것 같다. 군대에 있을 때도 통신병 생활을 하면서 무전일지를 쓸 때도 선임들이 내 글씨체를 칭찬하거나 부러워했다. 오죽하면 행정병이 아닌 내가 월중행사 및 계획표를 쓰는 커다란 화이트보드를 쓰는 것을 담당하기도 했고, 선임 중 한 명은 여자 친구에 쓰는 편지를 나에게 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글씨를 잘 쓴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인정하지 않았다.
내가 결정적으로 글씨를 잘 쓴다고 인정하고 내 글씨체를 자랑스러워하게 된 계기는 따로 있다. 휴학하면서 필리핀에서 1년 이상 머물며 영어공부를 할 때였다. 한글보다는 상대적으로 영어를 많이 쓰고 말하면서 지내고 있었는데, 선생님 대부분이 내 글씨체를 보고 놀라워했다. 영어를 자주 쓰는 것도 아닐 텐데 어떻게 그렇게 또박또박 알파벳을 잘 쓰느냐고 물어보고 했다. 학원에 가장 높은 원어민 선생님도 칭찬하면서 자기는 영어를 자주 쓰는데도 이렇게 글씨를 못 쓴다며 너의 글씨체를 뺏어가고 싶다고 농담을 하곤 했다. 영어를 배우면서 언어에 대한 자신감도 올라감과 동시에 내 글씨체를 부끄러워하던 생각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또한, 방학 기간에는 초중고 학생들이 영어 공부를 하러 왔는데 그때 아이들을 감독하거나 가르치곤 했는데 아이들은 내 글씨체를 보고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곤 했다. 그렇게 내 존재를 인정받는 느낌이 들면서 자존심도 상승하며 나의 글씨체에 대한 자신감 그리고 자부심이 생겼던 것 같다. 내 존재 의미나 자존심을 인정받는 것이 이런 기분이구나 하고 느꼈던 것 같다.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느낀 건데 몇몇 아이들은 정말 알아볼 수 없는 글씨체를 가지고 있었다. 문제는 아이들이 오답 노트나 영어단어 시험을 볼 때는 내가 알아볼 수 있어야 하는데 알아보기 힘든 아이들이 대다수였다. 내가 글씨를 바르게 쓰지 않으면 채점을 안 하겠다고 혼내기도 하고 다른 경우는 몰라도 시험 볼 때만큼은 글씨를 예쁘게 썼으면 좋겠다고 했지만, 그때뿐 소용이 없었다. 요즘 아이들은 필기구와 종이를 접하고 쓰고 연습하기도 전에 휴대전화기와 컴퓨터로 먼저 접해버리고 그것에 익숙해지는 것 같다. 시대가 변하여 점점 디지털화되어 가며 아날로그적인 감성들이 작아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손글씨를 아예 안 쓰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죽하면 요즘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뜻밖에 손글씨로 고민하는 사람이 많다. 앞에서 말했듯이 글씨는 제2의 얼굴이자 마음의 거울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글씨를 못 쓴다고 해서 사람 됨됨이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디지털에 물들어 자신의 얼굴인 글씨를 못 써서 표현 못 하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연필의 감각을 익히기도 전에 키보드와 휴대전화기 자판에 익숙해져 손이 키보드와 자판에서는 날아다니지만, 필기구만 잡으면 버벅거리니 한심한 노릇이다. 디지털과 미디어에 물들 대로 물들어 쓰기에 익숙하지 못
한 세대가 돼버린 것이다.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면 사실 어린 시절에도 어른들에게 글씨를 잘 쓴다는 칭찬을 받았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그런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고 남자애들이 잘 쓴다고 칭찬을 해주는 것을 동정심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닮고 싶지만 맘대로 되지 않았던 여자애들의 글씨체에 대한 질투심과 내 글씨체를 싫어하던 감정이 오묘하게 섞여 내 손글씨를 싫어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생각해 보면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내 글씨체는 누구보다 뚜렷하고 개성 있는 나만의 표현 방법이었는데 그것을 부끄러워한 것이다. 중학교 시절 내가 닮고 싶었던 동글동글하고 귀여운 글씨는 생각보다 개성적이지 못한 것이다. 그 시절 미묘한 차이는 있었지만 대부분 다 개성 없이 비슷했다. 바른 글씨를 쓰기 위해 수백 개의 지우개 똥을 날리며 연습했던 나와 내 동창들은 적어도 자신만의 개성적인 글씨체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동글동글하고 귀여운 글씨체를 질투하고 부러워하며 그 당시 여자애가 했던 한 마디 때문에 나만의 개성적인 표현 방법을 억지로 고쳐나가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수많은 표현 방법 중에서 왜 하필 글씨를 쓰는 방법으로만 자신을 표출하게 되었냐고 묻는다면 사실 복합적인 요소가 많다고 말할 수 있겠다. 사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은 정말 많다. 지금은 꽤 변했지만 어린 시절부터 고등학교까지 나의 성격은 거의 한결같았다. 왠지 모르겠지만 유난히 자존심과 자존심이 낮은 아이였고 무언가를 표현하거나 말하는 것에 대해 매우 부끄러워하였다. 그러나 남들을 부러워하고 동경하는 마음은 매우 크고 무엇이든지 잘하고 싶은 욕심은 많았던 것 같다. 내가 잘하는 것에 대해서는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속으로 자랑스러워하기도 했다. 과거에도 그렇고 지금도 나는 아주 꿈이 많고 하고 싶은 게 많은 사람이다. 그런데 무언가를 시작하고 나서 절반 정도 혹은 절반 이상 하게 되면 슬럼프를 극복하지 못하고 쉽게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글씨를 쓰는 것은 그렇지 않았다. 어린 시절에 호되게 혼나면서 억지로지만 연습을 엄청나게 했었고 나중에 그것이 습관으로 굳어져 갔다. 바른 글씨 시간에 쓰던 연습은 내가 초등학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쓰는 일기 때문에 연습에 연습을 거쳐 내 글씨체가 점점 완성되었던 것 같다. 또한, 한
가지 이유가 더 들자면 나는 펜이나 연필이 종이에 써지는 느낌을 매우 좋아한다. 연필의 사각거리는 소리, 펜이 종이 위에 쓰이면서 북북 거리는 소리 또한 아주 좋다. 아마 이런 여러 요소와 함께 내가 가장 잘하는 것에 대해 속으로 자랑스러워하던 것이 아마 글씨체가 아닐까 생각한다.
어떻게 보면 내 글씨체는 나의 존재, 나의 자존심을 말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과거에 나약하고 유난히 부끄러움을 많이 타던 조용한 성격이었고, 예의범절과 윤리 도덕을 바탕으로 한 수업 중 글씨체는 나의 존재를 형성하는 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것이 글씨체로 표현되면서 누구보다 개성적이고 싶었고 나를 표출하고 싶었던 속마음이 글씨를 잘 쓰고 싶었던 욕망으로 드러났던 것 같다. 그렇게 나의 존재와 자존심을 말해주던 글씨체는 중학교 시절 여자아이의 한 마디로 엄청나게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고 그 때문에 부득이 노력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유난히 낮았던 자존심과 겹치면서 더 절망했던 것 같다. 지금 되돌아봐서 생각해 보면 글씨를 더 잘 쓰고 싶다는 욕망, 그 때문에 내 글씨체를 싫어했던 마음이 잘못된 방향 때문인 원인이 나의 존재이자 자존심인 글씨체를 부정하기에 이른 것이 아닌가 싶다. 글씨를 못 쓴다고 해서 죽는 것도 아니고 살아가는데 별문제는 없지만 나에게 있어서 존재 의미를 나타내는 하나의 표현이었고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다. 지금에 와서 잘 써야 한다는 욕망보다는 지금 쓰는 글씨체를 유지하자는 마음을 가지고 글을 쓰는 편이다.
‘글씨 좀 못쓰면 어때! 되는대로 살면 되지’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솔직히 인생을 살아가는데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손글씨 연습을 위해 학원에 다닌다든지 캘라그라피 같은 것이 유행을 하는 것을 보면 글씨체는 무시할 수 없는 요소라고 생각한다. 추사 김정희는 글씨를 위해 명필들의 글씨를 본받고 연습하고 연구해 자신만의 글씨체를 만들어내기까지 했다. 글씨라는 것은 단순한 기술과 멋스러움이 아닌 수양을 거듭하여 얻어지는 인격의 표현 같은 것이다. 나의 글씨체는 날카롭지만 어떻게 보면 인격과는 매우 다른 느낌이 난다. 아니면 글씨체가 날카롭다고 느끼는 것은 나만 그렇게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글씨를 잘 쓴다고 인정하지만, 아직도 연습하는 중이다. 더 잘 쓰고 싶다는 욕심 때문에 손글씨를 멈추지 않을 것 같다. 확실한 것은 손글씨는 내 인생에서 생각보다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나는 여러 경험을 토대로 나의 글씨체를 만들었고 이제 그것은 내가 가장 잘하는 것이자 자랑스러운 나의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난 앞으로도 내 글씨를 자랑스럽게 여길 것이다. 암호나 이상한 그림 같은 글씨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글씨체는 나만의 표현방법이자 자존심이고 그것을 잘 표현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