끈끈한 여름의 기운이 아직 물러가지 않았지만 아침저녁으로는 날씨가 꽤 춥다. 새벽에 맺힌 백로가 떨어지는 걸 보니 가을이 내 곁에 맴돌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지구 온난화의 영향으로 예전보다 더워진 날씨에, 가을의 발걸음이 더뎌진 듯하다.
양력으로 9월 9일경 가을이 수줍게 웃으며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백로(白露)이다. 맑은 날씨로 황금빛 벼가 허리 늘어지게 여무는 시기이다. 제주도 속담에 "백로전미발(白露前未發)"이라고 해서 이때까지 패지 못한 벼는 더 이상 크지 못한다고 전해진다. 제주도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백로 이전에 곡식을 거둬드리고, 벼 이삭을 유심히 살펴 그해 농사의 풍흉(豊凶)을 가늠하기도 한다.
농부들이 벼를 거두어 황금빛 이불을 만들어야 하는 시기, 풍성한 백로를 누군가 시기했는지 올해는 유난히 짓궂다. 더위가 할퀴고 간 자리에는 상처밖에 남질 않았다. 보듬지 못한 상처에 날씨까지 변덕이니, 땅도 울고 사람도 울었다. 그래도 바람에 몸을 맡긴 벼는 백로를 머금고 농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으니 다행이다.
기후 변화로 인해 예측할 수 없는 날씨가 계속되면서, 농부들의 고민은 깊어만 간다. 폭염과 가뭄, 그리고 갑작스러운 폭우까지, 자연의 변덕스러움에 농작물은 시달리고 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끈질기게 자라나는 벼의 모습은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
유난히 더운 가을이고 앞으로 더워질 가을이지만 가을이 없어질 거라고 예상하기엔 아직 이르다. 다시 비춰오는 따스한 가을 햇살에 상처를 이겨내고 가을을 맞이해야 한다. 비록 자연은 예전과 달라졌지만, 우리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가을이 살아있고 남아있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면, 코스모스가 흔들리고, 들판은 황금빛으로 물들어간다. 높고 푸른 하늘 아래, 우리는 또다시 가을의 정취를 만끽하며 새로운 계절을 맞이한다. 변화하는 자연 속에서도 변치 않는 가을의 아름다움을 느끼며, 우리는 앞으로 나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