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앞에서 인간은 누구인가

뫼르소의 마지막 깨달음

by 한서진

카뮈는 왜 죽음을 인간다움의 완성으로 택했을까? 먼저 그의 일생을 살펴봐야 한다.


카뮈가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세계 1차 대전이 일어났다. 아버지가 전쟁에서 전사했다. 열일곱 살 젊은 나이에 폐결핵에 걸려 죽음의 위협 앞에 놓였다. 병마 때문에 어려운 시기를 견뎌야 했고, 대학 교수와 군인의 길은 막혔다. 대신 프랑스 레지스탕스에 가담하며 동지들의 참혹한 죽음을 직접 목격했다.

이런 개인사 속에서 카뮈에게 죽음은 삶을 관통하는 문제이자 철학이었다. 『이방인』을 비롯한 그의 작품들에서 죽음은 핵심 주제로 자리한다.


무심한 죽음 앞에서

뫼르소가 어머니의 죽음에 담담하다 못해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은 어쩌면 카뮈 자신의 경험과 닮아 있다. 그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아무런 기억도, 아무런 감동도 없다"고 기록한 적이 있다.

자연사라는 죽음을 그는 의미를 덧입히지 않은 채 받아들인다. 그래서 뫼르소 역시 엄마가 언제 죽었는지 무심하게 이야기한다. 장례식 후에도 그의 행동은 사회적 기대와 어긋난다. 우리는 거기서 이미 부조리를 감지한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죽음을 마주할 때조차 사회가 요구하는 감정 표현과 개인의 내적 체험 사이의 간극이다. 이 간극은 이후 재판 장면에서 본격적으로 드러난다. 사회가 '죽음을 어떻게 애도했는가'를 죄의 근거로 삼는 아이러니로 이어진다.


부조리한 살인

무심함은 살인 장면까지 이어진다. 작열하는 해변 햇빛 아래서 아랍인과 마주쳤다. 그가 든 칼에 눈이 부셔 총을 당겼다. 뫼르소는 이를 "불행의 문을 두드린 네 번의 짧은 노크"라고 표현한다.

햇빛 때문에 방아쇠를 당겼다는 설명은 '이해할 수 없는 동기'를 드러낸다. 죽음이 인간에게 어이없는 계기로, 즉 부조리한 방식으로 다가옴을 상징한다. 아이러니 하게도 뫼르소는 이 살인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는 생각과 태도를 가진다는 것도 부조리를 더욱 부각시킨다.


사회의 심판

재판에서도 그의 태도는 불리하게 작용한다. 변호사가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나치게 솔직하게 말한다. 살인의 이유를 묻는 배심원 앞에서 "햇빛 때문"이라고만 대답한다.

결국 법정은 살인 자체보다 다른 것을 문제 삼는다. 어머니 장례식에서 울지 않은 점, 놀러 다닌 점, 어머니 나이조차 몰랐다는 사실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사회는 죽음의 진실보다 감정을 어떻게 표현했는가를 기준으로 삼는다. 뫼르소를 그 기준으로 판단한다. '사형'이라는 죽음의 부조리, 그리고 사회적 규범이 한 개인을 얼마나 철저하게 파괴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죽음 앞에서의 깨달음

그는 결국 사형을 선고받고 항소를 포기한다. 교도소에서 집행일을 기다리며 어머니의 삶과 자신의 죽음을 곱씹는다.

부속 신부가 찾아와 죄를 고백하라 권하자, 그는 위선을 꾸짖으며 거부한다. 여기서 뫼르소는 초월적 구원이나 신앙에 기대지 않는다. 죽음 자체를 긍정하려 한다. 이는 카뮈 철학에서 중요한 지점이다. 죽음 앞에서 삶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결단이다.

혼자 남은 그는 마침내 어머니의 삶과 세상의 무심함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뫼르소는 죽음의 순간에 이르러 삶 전체를 긍정하는 '깨어남'을 경험한다.

죽음을 수용한다는 것은 단순히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곧 삶을 수용한다는 것이다. 죽음을 의식할 때 비로소 삶이 더욱 명료하게 드러난다. 인간은 자신이 살아온 삶을 긍정하거나 부정할 수 있다. 뫼르소는 그 긍정을 택했다.


죽음은 카뮈에게 단순한 끝이 아니라, 삶을 가장 명료하게 긍정할 수 있는 장치였다. 삶의 무의미를 피하지 않고 끝까지 직시하며, 그 무의미마저 사랑하려는 태도이다.

카뮈는 인간이라는 존재는 '부조리'를 겪을 수밖에 없지만, 그것을 회피하지 않고 각자만의 방식으로 견디고 수용하며, 그 속에서 삶의 의미를 다시 찾아가는 존재임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우리는 다시 묻게 된다. 뫼르소가 사회가 요구한 감정을 거부한 것처럼, '정상'이란 무엇인가? 사회가 말하는 정상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이 질문은 다음 편에서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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