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이 보는 나, 내가 아는 나

존재의 시선

by 한서진


Aujourd'hui, maman est morte. Ou peut-être hier, je ne sais pas.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른다.


『이방인』은 읽지 않아도 첫 문장은 들어봤을 정도로 유명하다. 그리고 칼날에 태양빛이 반사되어 뫼르소의 이마를 찌르고 주인공은 현기증을 느낀다. 결국 그는 '태양이 너무 눈부셔서' 자신도 모르게 품에 있던 권총을 쐈다고 말한다. 『이방인』을 읽으면서 내가 가장 이상하다고 느낀 건 왜 우리는 이 첫 문장을 낯설게 느끼고 살인의 이유가 말이 안 된다고 여길까?


인간은 철학이나 종교를 통해 실존과 존재의 중요성을 찾아가며 본질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는 존재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러한 본질은 보통 타인이나 외부의 시선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나는 『이방인』을 읽으면서 주인공의 본질과 타인이 생각하는 본질이 다른 점에서 오는 부조리. 그 부조리 속에서 아이러니를 느꼈다.



결론적으로 인간이라는 존재는 자기 객관화가 불가능하고 본질적으로 주관적인 동물이다. 그래서 주관성에 순응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사르트르의 희곡 『닫힌 방』에서는

타인은 지옥이다


라는 유명한 문장이 나온다. 이는 인간의 실존이 종종 타인의 판단과 시선 속에서 왜곡되고 고통받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결국 '나'의 존재를 이해받고 싶은 욕망과 세상의 피상적인 판단이 충돌하며 발생하는 '부조리'의 한 단면인 셈이다.

최근에 MBTI가 유행하는 이유 중 하나가 남이 생각하는 내가 아니라 내가 생각하는 나를 가장 잘 보여주기 때문에 사람들이 좋아한다고 생각한다.

『이방인』에서도 주인공 뫼르소는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았다는 이유로 "비정한 살인자"로 재단된다. 그의 행동과 존재 자체는 변하지 않았지만 사회는 그의 태도와 감정을 기준으로 실체를 왜곡해 버린다.


이 부분은 [현상학(Phenomenology)] 과도 연결될 수 있다.

현상학은 세계가 의식에 나타나는 그대로의 모습을 '현상'으로 보고 그 현상 자체의 보편적 조건을 탐구한다. 사회는 뫼르소의 행동에 대한 '의미'와 '해석'을 요구하지만 뫼르소는 해석을 거부하고 오직 자신이 느낀 감각, 즉 '현상' 그 자체에만 머무른다. 사회와의 거대한 균열 즉 부조리가 발생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객관적인 본진로 환원될 수 없다.


사르트르가 말한

인간은 존재 이후에 본질을 만든다.


라는 말처럼 인간은 사물처럼 정의될 수 없고 자신을 정의해 가는 과정 속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뫼르소는 이런 의미에서 자기 객관화를 거부하는 인물처럼 보인다. 소설에서 "나는 지금 이렇다"라는 표현은 자주 하지만 "나는 본질적으로 이런 사람이다"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카뮈는 니체의 사상을 기반으로 인생에 대한 질문을 소설로 구체화한다. 인간이 세상을 이해하려는 방식이 무너지며 부조리를 인식하고 그 상태에서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살아가려는 의지를 드러내는 존재임을 말한다.

카뮈의 부조리는 단순한 허무나 절망이 아니라 삶에 대한 집착 살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그것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다른 실존주의자나 니체와 달리 '고독'을 통해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하고, 가치관을 창조해 나가는 존재임을 강조한다.


부조리 속에 홀로 선 존재

삶의 부조리는 개인의 욕구와 사회 현실의 불일치가 충돌하면서 생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그 부조리를 끊임없이 인식하면서도 삶의 무의미함을 견디고 받아들이는 존재가 된다고 한다.


『이방인』은 이 부조리를 문학적으로 잘 보여준다. 뫼르소는 사회 규범에 반항했고 감정을 강요당하는 재판 앞에서도 진실과 침묵을 유지했다. 그는 사회에 의해 사형당하지만 죽음을 앞둔 마지막 순간 삶을 받아들이고 수용하며 오히려 더 깨어 있는 인간이 되며 소설이 마무리된다.


죽음 앞에서 마주한 고요한 긍정

삶의 의미 없음과 죽음의 불가피함을 모두 인식하면서도 그 순간을 온몸으로 긍정하며 살아내는 것.

'깨어있는 삶'이야말로 카뮈가 말하는 부조리에 대한 가장 치열한 반항이자



이 소설에서 말하는 '인간다움'이 아닐까?



그렇다면 카뮈는 이 '인간다움'을 완성하기 위한 장치로 왜 하필 '죽음'을 선택했을까? 그리고 그는 왜 죽음을 『이방인』을 통해 보여주려고 했을까?


이 질문은 다음 글의 시작이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