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와 동일성에 관한 사유

by 파선

사람들이 움직이는 것이 문득 대단해 보일 때가 있다. 신경이 예민해 작은 것 하나도 쌓아 올리기는 좋지만, 작은 행동조차 조절해야 한다면 그 조절마저 노력이 된다. 몸이 아플 때는 그것마저 할 수 없음을 탓했다. 그런데 공든 탑도 무너진다. 낡고 부식된 탑을 보며 우리는 그것이 원래 어떤 형태였는지, 정성이 깃들었는지, 완성되지 못한 채 멈춘 것인지 알 수 없다. 우리는 다만 의도와 추론을 근거로 짐작할 뿐이다. 심지어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탑조차 처음부터 그런 모양이었는지, 하나씩 쌓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인지 모른다. 결국 아무리 공들여도 완벽은 없다.

그렇게 열심히 살아도 이룬 것은 없다고 느낄 때가 있다. 삶의 모든 부분을 구상하니 머리는 지끈거리고, 효율을 추구하다 공들임이 부족하면 금세 무너진다. 사람들은 내게 열심히 산다고 말하고, 나는 실속이 없는 과업을 달성하며 이를 위안으로 삼는다. 하다 망쳐놓고도. 특히 사람들 앞에서 그랬다. 완벽한 개인주의란 존재하지 않고, 그것은 타인에게 상처를 남긴다. 사람은 조금 더 본질적이어야 한다. 나를 위한 배려는 보통 가닿지 않는다. 그러나 내 몸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것을 한다. 내가 모든 것을 내려놓았을 때도 여전히 수많은 일을 동시에 한다.

유한한 것들을 사랑하기에 무한을 바랐다. 의식이 끊겼을 때의 경험은, 내가 결국 뇌의 작용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이어졌다. 그 두려움은 다시 질문으로 바뀌었다. 존재는 무엇으로 가능해지는가? 왜 무가 아니라 유가 존재하는가?

이 질문은 단지 우주의 기원만이 아니라, 내가 여전히 여기 있다는 사실 자체를 겨냥한다. 나는 병원에서 기절하며 의식의 완전한 부재를 겪었다. 그 순간 나는 나 자신을 느낄 수 없었고, 시간조차 흐르지 않았다. 그러나 깨어난 후 경험은 이어졌고, 나는 여전히 존재한다고 느꼈다. 그렇다면 의식이 부재한 순간에도 나를 존재하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뇌가 멈춘 상태에서도 작동한 어떤 ‘의지’는 과연 무엇이었는가?

빅뱅 이론은 우주의 시작을 설명하지만, 왜 존재가 시작되었는지는 말하지 못한다. 과학적 무는 진공 상태로 정의되지만, 여전히 물리학적 법칙에 기초한 개념이다. 그러나 나의 기절 경험은, 의식의 완전한 부재조차 설명하기엔 부족함을 드러냈다. 철학적 무는 단순한 ‘없음’이 아니라,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다. 하이데거가 말했듯 무는 존재가 드러날 수 있는 가능성의 장이다. 내가 의식이 없는 동안에도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무가 배경으로 작용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기절의 순간, 나는 시간과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경험을 잃었지만, 깨어난 후 그 공백은 단절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통합되었다. 뇌는 이 공백을 메우고 경험의 연속성을 재구성했다. 동일성은 단순히 의식의 연속성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그것은 뇌의 작용과 더 근원적인 ‘의지’에서 비롯된다.

의지는 뇌의 활동을 초월한다. 기절 상태에서 뇌의 활동은 거의 정지되었지만, 존재는 유지되었다. 그것은 단순히 뉴런의 활동이 아니라, 존재를 가능케 하는 비물질적 힘으로서의 의지 때문일 것이다. 무는 단순한 공백이 아니라, 의지가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이다. 존재는 무에서 시작되고, 의지는 그 속에서 존재를 형성한다.

여기에서 다시 정체성의 문제로 돌아온다. 사람이 죽는 이유는 결국 삶을 지탱하는 DNA가 재생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무리 복제를 해도 그것이 동일한 존재일 수 있을까? 기존의 뇌가 죽는다면 지금 생각하는 ‘나’는 사라진다. 완전히 똑같이 복제된다고 해도 똑같은 존재가 두 개 생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약 정말 동일하다면, 겹쳐 곧 하나가 될 것이라는 과학적인 이야기도 들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복제 인간을 원래의 ‘나’라고 부를 수 있을까? 처음의 내가 죽으면 새로운 복제 인간이 뒤를 잇겠지만, 진짜 나는 그 이후를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복제 인간은 내가 되고 싶은 방향이기도 하다. 죽어도 기억이 이어지고, 특정한 물리적 개체에 얽매이지 않은 채 계속해서 ‘나’라는 경험을 지속할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이다.

나는 의식의 공백 속에서도 여전히 존재했다. 그것은 뇌의 작용을 넘어선 의지가 무와 상호작용하며 동일성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무는 단순한 부재가 아니라 존재의 장이며, 의지는 그 속에서 존재를 드러내는 힘이다. 과학은 이 과정을 설명하지 못한다. 그래서 존재와 동일성에 대한 탐구는 과학적 설명을 넘어, 철학적 사유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잊지 않는다. 이 모든 사유의 바탕에 있었던 것은 언제나 나의 몸이라는 것을. 내가 모든 것을 내려놓았을 때에도 끊임없이 나를 지탱하던 몸, 연약해 보이지만 강하게 제 일을 수행하는 몸. 내가 되고 싶은 것도 결국 그와 같은 존재다. 유한성을 안고도 스스로를 버티는 힘, 바로 그 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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