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예술이란?
얼마 전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에세이를 읽었다. 책은 저자 룰루 밀러가 고생물학자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걸어간 삶의 여정을 뒷밟으며 모호했던 삶의 지표를 다시금 발견하는 과정을 그려낸다.
그녀는 혼돈이 가득한 세상 속에서 붙들고 나아가야 할 삶의 질서를 포착하고, 세상이라는 망망대해 위에 작은 부표 하나를 띄우며 혼돈으로 넘실대는 또 다른 파도를 헤쳐 나아간다.
그녀가 거친 물결 위에 띄워둔 보잘것없는 삶의 부표는 파도 위에서 이리저리 휩쓸리며 제자리를 찾기 위해 발버둥 치기도, 거친 풍랑에 저 멀리 떠내려 가버리기도 한다.
더 눈물겨운 사실은 그녀가 자신을 짓누르는 혼돈에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는 것. 긴 숨을 머금고 파도를 헤엄치며 혼돈으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살아있음을 느꼈다는 것. 또 한 번 큰 숨을 들이킨 채 스스로가 살아가고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끝없이 파도를 헤쳐나가고 또 다른 부표를 붙들고 투쟁했다는 사실이다.
나는 그녀가 혼돈 속에서 쟁취한 질서를 통해 머리 깊숙이 소용돌이치는 또 다른 나의 혼돈을 그녀가 재배치해둔 질서 속에 투영시켰고, 이 모양은 곧 그토록 애증 하는 공연 예술을 통해 왕왕 포착하는 질서와 혼돈과 다를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대의 예술가들은 이 세상을 가득 채우는 유형과 무형 그리고 그 너머에 존재하는 모든 혼돈의 생김새를 포착해 시공간에 재배치하며 저마다의 질서를 만들어 관객들에게 선보여 왔다. 때로는 예술은 한 개인이 구축해 둔 질서의 성벽을 두드리는 혼돈이 되어 남몰래 우리를 찾아온다.
질서로 둔갑한 예술은 저마다 세워둔 성벽의 문을 두드리고, 자그마한 진동은 점점 끓어오르기 시작해 지각을 뒤흔드는 커다란 지진해일이 되어 질서의 성벽을 와르르 무너뜨린다.
비로소 마주하게 된 또 다른 혼돈.
무너진 성벽의 벽돌 조각들은 끊임없는 신호와 소음 그리고 사회적 가면을 쓴 관계들로 굳어지고 무뎌진 원초적인 감정의 파편들이었다.
퍼즐 조각처럼 이리저리 흩어져있던 파편의 조각을 들어 올려 가만히 바라본다. 이리저리 짓눌려 뭉쳐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실오라기 같았던 인생의 장면들과, 수많은 사람들, 사람을 통해 느꼈던, 스스로를 되돌아보며 느끼는 감정의 단상들로 가득하다.
그렇게 진실을 마주하다 보면 굳어져있던 파편들은 다시 한 줌의 부드러운 재가 되어 손 틈으로 흘러내리지만 우리는 예술이라는 질서가 선사한 혼돈의 잿더미를 질료로 삼아 새로운 질서의 벽돌을 빚어나가기 시작한다.
"질서-파괴-혼돈-질서-파괴-혼돈.."
예술은 끊임없이 우리를 단련시킨다. 예술의 창조자가 빚어낸 질서로 혼돈을 느끼고 우리는 그 혼돈의 소용돌이 속에서 또 다른 질서를 발견한다. 마치 끝없는 미로 속을 헤매다 어느새 출구에 당도하게 되지만 기꺼이 미로 속을 헤매는 일을 자처하는 사람처럼.
깊이 담가졌다 한 순간에 소멸하는 시공간의 예술(나의 경우에는 대체로 '뮤지컬')은 외면하고 소외했던 자신뿐만 아니라, 나로 인해 외면당하고 소외당한 것들에 시선을 돌릴 수 있게 돕는다.
다시는 볼 수 없지만 보게 되는 것.
다시는 붙잡을 수 없지만 남아있는 것.
다시는 되돌릴 수 없지만 나아가는 것.
한 치 앞도 내다보이지 않는 혼돈의 세상, 우리는 예술이 파괴한 질서에서 만들어낸 또 다른 질서를 붙잡은 채 한 발자국 나아간다. 저마다의 예술을 통해 다 함께 숨 쉬고, 위로를 받고, 용기를 얻고, 또 다시 혼돈 속에서 질서를 붙잡을 수 있다는 믿음과 연대를 넌지시 인지한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