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책 (26):그리스 편

에게해와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by 향지소피아


-공동체의 비극이 된 개인의 선택과 욕망-


아테네에서 돌과 기둥의 세계를 지나, 바다로 나왔다. 바다는 그리스에서 언제나 시작이자 끝이다. 육지에서는 비극이 태어나고 철학이 사유되었지만, 바다에서는 이야기가 노래가 된다. 푸른 수평선 위를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배를 바라보며, 나는 이곳이 여전히 호메로스의 세계 안에 있음을 느낀다. 바다는 설명되지 않고, 서술된다.

(고린토운하)


그리스의 바다는 단일한 풍경이 아니라, 서로 다른 층위의 기억을 품은 공간으로 다가왔다. 고린토 운하를 지나며 보았던 바다는 인위적으로 잘린 대륙의 틈을 흐르는 바다였고,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항구 도시 나플리오(Nafplio) 앞바다는 그리스 본토의 역사와 맞닿아 있는, 보다 현실적인 항해의 바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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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로폰네소스 반도의 항구 도시 나플리오(Nafplio) 앞바다)


산토리니의 바다는 노을 아래에서 배들이 섬으로 돌아가는 귀향의 바다였다. 서로 다른 장소의 바다를 누비는 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것은 고대 서사시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의 이야기였다. 둘 다 그리스 바다와 관련이 있는 이야기이다. <일리아드>는 떠남의 바다 이야기이고, <오디세이아>는 돌아옴의 바다 이야기이다.

(산토리니 앞바다)



우선 <일리아드>이야기를 먼저 해보자.

<일리아드>라는 제목은 이 서사가 무엇을 중심에 두고 있는지를 분명히 드러낸다. ‘일리아드(Iliad)’는 일리온(Ilios), 즉 트로이의 또 다른 이름에서 비롯된 말로, 문자 그대로는 ‘트로이에 관한 이야기’라는 뜻이다. 이 제목은 영웅의 이름이나 전쟁의 승패가 아니라, 특정한 장소—트로이—에 묶인 사건과 감정의 기록임을 암시한다.




<일리아드>의 출발점은 거대한 전쟁이 아니라 한 개인의 선택이었다.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가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와 함께 도주하면서, 사적인 사건은 곧바로 집단적 폭력으로 확장된다. 헬레네를 되찾기 위해 그녀의 남편 메넬라오스는 형인 아가멤논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아가멤논은 그리스 연합군을 조직해 바다를 건너 트로이로 향한다. 이렇게 트로이 전쟁은 개인의 욕망에서 비롯되어 국가 간 전쟁으로 전환된다.


하지만 파리스의 선택은 우연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트로이 왕가에 내려온 오래된 저주가 드러난 결과였다. 이 저주의 뿌리는 파리스의 조부 라오메돈에게서 시작된다. 그는 성벽을 쌓아 준 신들과의 약속을 어기며 신들의 분노를 샀고, 그 이후 트로이 왕가는 재앙의 운명에 놓인다. 파리스가 태어나기 전에도 그의 탄생이 도시의 파멸을 부를 것이라는 예언이 있었고, 아버지 프리아모스는 그를 산에 버린다. 왕족이지만 책임을 배우지 못한 파리스는 성장 후 ‘미의 심판’에서 권력이나 지혜가 아닌 욕망을 선택하고, 헬레네와 도주함으로써 전쟁의 불씨를 당긴다. 결국 트로이의 멸망은 파리스 개인의 잘못이라기보다, 가문의 저주가 한 인간의 선택을 통해 현실이 된 사건이었다.


이 전쟁에 참여한 영웅들은 이후 그리스 문학과 연극의 핵심 인물이 된다. 아킬레우스, 헥토르, 아가멤논, 오디세우스와 같은 인물들은 전장에서의 선택과 파국을 통해, 훗날 그리스 비극에서 반복적으로 변주된다. 트로이 전쟁은 단순한 신화적 사건이 아니라, 비극적 인간상을 집약적으로 생산한 서사의 원천이었다.


전쟁의 결과 트로이는 멸망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트로이의 영웅 아이네이아스는 폐허가 된 도시를 탈출해 서쪽으로 향하고, 그의 여정은 로마 건국 신화로 이어진다. 이처럼 트로이의 파괴는 곧 로마라는 새로운 문명의 기원이 된다. 하나의 도시가 무너짐으로써, 또 다른 세계가 시작된 것이다.


이 전쟁에 참여한 인물들은 이후 그리스 비극의 핵심 소재가 된다. 아킬레우스의 분노, 헥토르의 죽음, 아가멤논의 오만, 오디세우스의 생존은 모두 비극 작가들에게 반복적으로 소환되며, 인간의 한계와 파멸을 탐구하는 인물형으로 자리 잡는다. 트로이 전쟁은 단순한 신화가 아니라, 그리스 비극 세계를 떠받치는 서사의 원천이었다.


전쟁의 끝에서 트로이는 멸망하지만, 이야기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트로이의 영웅 아이네이아스는 도시를 탈출해 서쪽으로 향하고, 그의 여정은 로마 건국 신화로 이어진다. 이렇게 보면 〈일리아드〉는 하나의 도시의 파괴를 노래하는 동시에, 새로운 문명이 시작되는 출발점을 기록한 서사이기도 하다.




트로이 전쟁의 이야기를 떠올릴 때마다 나는 바다를 함께 떠올리게 된다. 그리스 짙은 코발트빛 바다를 바라보며, 이 바다를 건너 수많은 병사들이 전쟁으로 향했을 것을 생각했다. 그들 중 대부분은 아킬레우스도, 헥토르도 아니었을 것이다. 이름 없이 배를 탔고, 이름 없이 죽었을 사람들이다. 〈일리아드〉가 노래하는 것은 영웅의 분노이지만, 내가 그 서사 앞에서 느끼는 감정은 오히려 돌아오지 못했을 이들의 침묵에 가깝다.


그래서 이 서사는 멀지 않게 다가온다. 파리스의 선택이나 아가멤논의 오만보다도, 전쟁이라는 결정 앞에서 개인이 얼마나 쉽게 소모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트로이의 성벽 앞에 서 있지 않아도, 바다를 바라보는 순간 〈일리아드〉는 다시 현재형이 된다. 전쟁은 끝났지만, 인간의 감정—분노와 욕망, 그리고 뒤늦은 연민—은 여전히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지혜, 권력, 아름다운 여인(미) 중에서 한가지를 선택해야 한다면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파리스는 이 셋 중에서 한가지를 선택했고, 이 선택은 개인뿐만 아니라 공동체를 멸망시켰다.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지 상상해보라. 그러면 (일리아드)는 어떤 이야기가 되었을까?


다음화는 <오디세우스> 이야기를 이어서 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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