뮌헨과 전혜린의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두근두근 첫 해외여행, 문장 속 도시가 현실로 내려앉은 날 — 뮌헨의 겨울
독서 수업을 하는 아이들과 함께 한 2017년 1월에 7박 9일의 6개국 동유럽 여행이 나의 첫 세계여행이었다.
인천에서 프랑크푸르트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1박을 하고, 비행기 안에 식사를 세끼 정도하고 나니
다음날 자정이 훌쩍 지난 시각,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했다.
프랑크푸르트 공항의 첫인상은 차거웠다. 현지시간으로 자정이 넘은 시간이라 그런지 공항은 한산했다.
여권에 입국 도장이 찍히던 그 몇 초의 정적 ―
입국 심사는 간단히 도장 하나 찍어 주는 것으로 끝이났다.
나는 "당케"라고 입국심사 도장에 응수했다.
무표정하지만 의외라는 표정으로 입국대의 직원은 잠시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첫 외국의 관문을 통과한 장면이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익숙한 세계의 내부’에서 밀려나
‘바깥 세계’로 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몸으로 인지했다.
공항입구에 기다리고 있는 버스를 타러 일행들은 각자의 케리어를 끌고 서둘러 걸었다.
버스가 '아우토반'을 달리고 있다고 가이드가 설명해 주었다. 그 당시 TV 에서 '아우토반'을 무한질주하는 자동차 광고를 하던 터라, 나는 아우토반이란 말에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와, 우리가 무한질주를 하게 되나??
그런데 '아우토반'이라는 말은 자동차전용도로라는 뜻이고, 한국의 티비에서처럼 무한질주 할 수 없으며, 속도제한이 있다고 했다. 상상과 현실의 괴리! 2시간 정도를 달려서 숙소로 향하는 도중, 버스안의 일행들은 잠에 스며들어 있었다. 나는 내도록 차창밖을 내다보았다. 눈이 내리는 어둔 풍경만이 이어지는 광경인데도 한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다음날 관광 1일차. 뮌헨.
시골 호텔에서 낯선 아메리카식 조식을 서둘러 먹고,
여독이 풀릴 틈도 없이 우리는 다시 버스에 올랐다.
창밖에는 밤새 쌓인 눈이 들판과 지붕과 삼나무 위에 눌러앉아 있었고, 그 풍경은 한국에서는 동화책에서만 가능한 장면이었으나 이곳에서는 그저 일상의 배경처럼 아무렇지 않게 존재했다.
내가 ‘상상화’라고 믿었던 서양의 겨울 풍경이 이 대륙에서는 그저 ‘사실화’라는 사실이 충격으로 다가왔다.
버스는 독일의 뮌헨으로 가고 있었다.
뮌헨이라니! 오랜 노스텔지어 속의 이상향과 같은 곳인 뮌헨을 가고 있다니!
여러분은 뮌헨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회백빛 겨울 하늘, 맥주, BMW, 뮌헨 대학, 바이마르공화국...
나는 뮌헨하면 전혜린과 그녀의 에세이집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가 떠오른다.
버스가 아직도 아침잠이 덜 깬 이른 도시로 들어서자 회색의 돌 건물들이 시야에 들어왔고,
우리는 마리엔광장에 도착했다.
(사진1왼쪽 : 뮌헨의 마리엔 광장의 신 시청사 건물: 화려한 석조 장식·조각상·고딕 리바이벌 양식이 특징인 뮌헨 신시청사 건물 일부.
(사진2 외른쪽 : 신 시청사 주변의 마리엔광장 중앙 Mariensäule(마리엔 기둥) 광장 중앙의 상징인 마리엔기둥(Mariensäule)과 분수대 주변 풍경.)
광장을 둘러싼 시청사의 석회질 건물들은 눈 위에서 더 차갑고 더 무겁게 보였고, 역사의 질량이 고스란히 굳어 있는 도시의 얼굴이 나타났다.
여고 시절 전혜린의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를 탐독했다. 그 책을 읽으며 영혼을 뒤흔들게 하는 지적인 문장을 쓰는 작가가 되길 꿈꾸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음속에 저장해두었다.
문장 속의 뮌헨을,
"오렌지빛 가스등 아래 서늘한 겨울의 거리 ―"
전혜린(全惠麟, 1934–1965)은 1960년대 한국 지성계를 대표하는 수필가이자 번역가로 기억된다. 짧은 생애 동안 깊이 있고 섬세한 언어로 존재와 사랑, 자유, 절망과 같은 실존적 주제를 다뤘으며, 특히 수필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감성적 지성”의 대표 문장으로 꼽힌다.
그녀는 한국인 최초로 독일에 유학을 갔던 여성으로 알려져 있다. 아니, 최초인지는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독일에 유학간 여성 중에 최초로 알려진 유명한 지성인 중 한명으로 표기해두자. 그녀가 쓴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에서는 뮌헨대학에서 유학시절의 이야기가 잘 그려져 있다. 책 속에 나오는 슈바빙거리, 대학, 맥주, 오렌지빛 가스등, 이란 단어 들이 선명하게 아직도 내 뇌리에 새겨져 있다. 감수성 예민한 시절에 그녀의 책에서 읽었던 그 뭰헨은 마치 갈 수 없는 고향처럼 아스라히 새겨져 있다. 이미지가 그 현실의 뮌헨 위로 겹쳐 떠올랐다.
그러나 전혜린의 뮌헨은 오렌지빛 가스등이 켜진 밤이어야 했다. 그날 내가 마주한 뮌헨은 이른 아침이었다. 감성과 낭만이 아니라 돌과 침묵과 공기와 도시의 무게가 느껴졌다. 문학이 만든 뮌헨과 현실의 뮌헨이 충돌하는 순간, 나는 처음으로 여행이란 “현실이 기억을 수정하는 과정”임을 이해했다.
시청사 근처 성 미카엘 성당에 들어갔다. 처음보는 유럽의 성당은 그 규모가 압도적이었다. 외부보다 내부가 더 화려했다. 스텐드글라스의 예쁜 유리창과 은은한 오렌지빛 촛불, 많은 사람들이 앉아서 예배볼 수 있도록 한 긴 나무 의자들. 내가 가 보았던 우리나라 성당과는 스케일이 압도적이다. 나도 잠시 짧은 묵도를 드렸다. 평화와 안전을. 그것은 여행자의 본능이자 낯선 땅에서 스스로를 다독이는 방식이었다.
성당을 나와 다시 광장에 섰을 때, 또 한번 놀랐던 것은 겨울바람 속에서 여호와의 증인 전도자들이 아무 말도 없이 조용히 서 있는 장면을 보았다. 대표 책자를 앞에 펼쳐놓고 잔잔한 미소를 지은 얼굴들 ―
나는 그 낯선 도시의 한복판에서, 한국의 익숙한 풍경이 그대로 반복되는 장면을 보고 있었다.그 장면은 이방성의 감각을 무너뜨리고, 인간의 신념이 국경을 넘어 동일한 구조로 재현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처럼 보였다.
(사진: 뮈헨의 마리엔 광장 주변의 상가 , 스위스 시계 브랜드 Swatch(스와치) 단독 매장 전경.
(사진2: 노란색 외벽과 동일한 리듬의 창문이 반복되는 전통 유럽식 건물. 1층에는 Carl Thomass / Chafor / C. Thomass 등 보석/시계/명품 관련 상점들이 입점.)
그렇게 나의 첫 해외 여정은 뮌헨에서 시작되었다. 좀더 진실하게 말하면 뮌헨은 전혜린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막연히 동경 속에 새겨져 있던 뮌헨을 방문하게 될 줄이야. 그 설렘과 감동에 뒤섞힌 여행 첫날의 공기는 지금도 내 마음의 가장 깊은 서랍 안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반나절 동안의 아쉬운 뮌헨 여정을 마치고 다음은 오스트리아 짤즈캄머굿으로 떠나야 했다. 여행은 새로운 꿈을 갖게 한다. 다음에, 다시 이곳에 오고 싶다. 그때는 좀더 자유로운 일정으로 샅샅이 뮌헨을 보고 싶다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