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와 쿤데라의 도시 프라하
몇해전 겨울, 동유럽 기행 중 체코 프라하에 도착했다. 나는 사실 체코라는 나라가 낯익기도 하고 생경하기도 했다. 나는 체코라는 단일 국가보다는 체코슬로바키아 시대에 세계사를 배운 세대이다. 체코슬로바키아가 왜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되었는지를 잘 알지는 못했다. 솔직히 동구권이라는 지역적 혹은 이념적 장벽으로 관심을 가질 수 없었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동구권을 여행하게 되리라는 예측도 거의 해 보지도 않았다. 그런 실정에서 체코가 막연히 먼나라 만이 아니었던 이유는 카프카나 밀란 쿤데라 때문이었다.
<변신>, <심판>, <시골의사>, <성>이란 작품을 통해서 카프카를 알게 되었고, 카프카가 체코 프라하 출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느림>, <농담>이란 작품으로 주목을 받았던 밀란 쿤데라 역시 체코 프라하 출신이라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내게는 이런 식으로 세계가 다가오는 편이다. 작가와 작품을 통해서 그 출신의 나라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정도였다.
동유럽 여행을 하면서 '체코'와 '슬로바키아' 2국으로 분리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1993년 평화적인 방법으로 분리되었기 때문에 그 사건을 '벨벳 이혼'이라고 한다고 했다.
체코의 역사는 중세 왕국의 전성기, 제국의 지배, 혁명과 분열, 유럽 민주국가로의 재탄생이라는 여러 층위가 겹쳐진 하나의 긴 시간의 이야기이다. 중세에는 ‘보헤미아 왕국’이라는 이름으로 유럽에서 중요한 정치 세력이었고, 프라하를 수도로 삼은 카를 4세(Charles IV)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즉위하여 도시를 학문과 문화의 중심지로 발전시켰다. 이후 16세기부터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 아래 들어가며 오스트리아 제국의 일부가 되었고, 19세기 산업혁명 이후에는 체코 지역이 제국의 경제 중심지 역할을 하면서 민족주의가 서서히 성장하게 된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붕괴되면서 1918년 체코슬로바키아가 독립 국가로 탄생했다. 그러나 1938년 뮌헨 협정으로 나치 독일에게 영토를 빼앗기고 2차 세계대전에서는 강제 점령을 당했다. 전쟁 후 소련의 영향 아래 사회주의 체제로 들어갔지만, 1968년 ‘프라하의 봄’으로 자유화를 시도했고 이는 소련에 의해 강하게 진압되었다.
1989년 ‘벨벳 혁명’으로 공산주의가 무너졌고, 1993년 ‘벨벳 이혼’을 통해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서로 평화롭게 독립 국가가 되었다. 오늘날 체코는 EU 가입국이자 자유민주주의 국가, “프라하”라는 중세와 근대의 기억을 모두 품은 도시를 가진 유럽의 문화 중심지로 다시 자리 잡았다.
[프라하 성이 보이는 야경 사진]
사실 관광 가이드가 안내하는 체코의 역사는 사실 귓등으로 흘렸다. 다만 카프카의 나라이며, 밀란 쿤데라의 고국인 체코는 어떤 모습인지가 궁금했다.
헝가리를 경우하여 도착했을 때 그곳은 밤이었다. 헝가리의 부다페스트 다음으로 야경이 아름다워 프라하의 야경을 보려는 계획아래 밤에 도착하게 된 것이다.
프라하의 밤은 빛으로 그려진 역사책 같았다.
강 건너 언덕 위의 프라하 성은 여전히 이 도시의 시간을 지켜보고 있었다.
강물(볼타바강)에 비친 불빛은 흔들렸지만, 그 위에 얹힌 과거의 기억만은 쉽게 꺼지지 않았다.
멀리 보이는 프라하 성을 보니까 카프카의 미완의 작품 '성'이 생각났다.
물론 카프카의 '성'은 '프라하 성'과 연관지어 생각할 수 없는 상징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생각이 그렇게 일차원적으로 생각이 치닿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카프카의 작품 <성城> 역시 그 계절적인 배경이 겨울이었다.
눈 덮인 마을에 도착한 측량사 케이(K)가 자신을 초대한 곳이라 믿는 성(城)에 들어가려 하지만 끝내 문 앞에서도 인정받지 못한 채 방황하는 이야기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성의 관료들은 불분명한 규칙과 절차만 늘어놓을 뿐이다. 케이가 성에 가까워질수록 진실은 더 깊은 안개 속으로 사라지고, 그는 “왜 나는 이곳에 왔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조차 답할 수 없게 된다. 결국 《성》은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고 끝나는 이야기이며,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애쓰지만 끝내 인정받지 못하는 실존적 고독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 프라하의 첫인상 —
야경으로 시작된 여행 도시는 밤이 더 깊을수록 또렷해지는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가로등은 차가운 돌바닥 위에 노란빛을 비추었고, 건물들은 조용히 중세의 윤곽을 드러냈다.
수면 위에 비친 불빛처럼, 도시는 잠들지 않은 이야기들을 조심스럽게 보여주기 시작했다.
-돌바닥 위의 발자국, 중세의 숨결을 밟다
프라하의 돌길은 낮보다 밤에 더 생생했다.
눈이 얇게 쌓인 돌바닥을 걸을 때마다, 마치 오래된 역사 위를 살며시 밟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가이드의 손을 따라 걷고 있었지만, 어쩌면 중세가 우리를 어디론가 데려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카를교 앞에 있는 이 작은 광장은 ‘크멘타 광장’이라고 불린다. 지도에는 조그맣게 표시되어 있지만, 프라하의 시간은 이곳에서 크게 갈라진다. 과거와 현재, 종교와 권력, 여행자와 역사 — 그 모든 것이 이 광장에서 서로 교차했다.
카를 4세 동상
조명을 받아 황금빛으로 빛나는 동상이다. 이 인물상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프라하 대학(현 카렐 대학)을 세운 카를 4세(Karel IV)이다. 체코는 그를 ‘체코의 아버지’라고 부르며, 지금도 국가에서 가장 존경받는 통치자 중 한 명이다. 이 동상은 단순한 조각상이 아니라, ‘프라하가 유럽의 중심이었던 그 찬란했던 시절’의 기억을 상징하고 있다.
<틴 성당의 두 개의 첨탑>
고딕 양식의 두 개의 첨탑은 틴 성당(Church of Our Lady before Týn)이며, 프라하의 스카이라인을 대표하는 상징이다. 어둠 속에서 두 첨탑은 마치 “두 손을 모은 인간의 마음”처럼 보인다. 프라하는 전쟁과 분열, 종교 갈등을 겪었던 도시이다. 그 어두운 역사를 품은 채, 성당의 불빛은 조용히 도시를 비추고 있다.
이곳은 프라하의 정신이 된 작가 프란츠 카프카가 자주 걸었던 길이기도 하다. 『변신』의 그 불안함, 『소송』의 부조리함은 이 좁은 골목들과 밤의 성당에서 태어난 상상인지도 모른다.
구시청사와 천문시계
프라하의 명물인 구시청사(Old Town Hall)이다. 그 아래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시계(Orloj)가 걸려 있다. 시간·태양·달·별자리·계절이 정교하게 움직인다. 내일 낮에 천문시계에서 열리는 퍼포먼스를 볼 수 있다.
이 시계를 바라보던 카프카는 이런 말을 남겼단다.
“프라하에서 도망칠 수는 있다. 그러나 프라하는 당신을 끝내 놓아주지 않는다.”
이 말은 단지 도시가 아름답다는 의미가 아니다. 여기서는 ‘시간’조차 단순히 흘러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프라하에서는 시간이 사라지지 않고, 기억이 되어 쌓여간다.
프라하의 야경 산책을 하고, 나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프라하야, 내일 만나자"
프라하의 숙소
그렇게 여섯째 날의 밤은 끝났고, 눈이 내리는 프라하의 아침이 기다리고 있었다.
프라하 성의 아침 모습.
트램을 타고 프라하 시가지를 투어했다. 그리고 카렐 교를 걸어서 건너왔다. 저 멀리에 프라하 성이 보였다. 어젯밤에 야경으로 보았던 성과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착한 얼굴을 한 성의 모습이었다.
- 프라하의 골목에서 만난 카프카
프라하의 아침은 조용했다. 구시가지 광장에는 어젯밤에 내린 눈이 남아 있었고, 돌바닥 위에는 관광객들의 발자국이 천천히 늘어나고 있었다. 이 도시는 나에게 건축보다 ‘인물’을 먼저 보여 주려고 하는 듯했다.
존재의 흔들림 좁은 골목을 지나며 나는 카프카를 떠올렸다. 그의 소설을 읽을 때 느꼈던 불안과 아득함이 바로 이 골목의 분위기와 닮아 있었다. 프라하를 ‘카프카의 도시’라고 말하는 이유를 이때 처음 실감했다.
이곳은 현실보다 꿈에 더 가까운 공간이었다. 나는 분명히 걸어가고 있었지만, 누군가의 꿈속을 지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카프카는 말을 남기지 않았지만, 이 골목은 그의 문장을 대신 들려주고 있었다.
아침의 카를 4세 동상
도시는 그에게 건축을 맡겼지만, 역사는 그에게 ‘도시의 철학’을 맡겼다. 그의 발밑에서 잠시 멈춰 선 순간, 여행자의 발걸음도 방향을 얻는 것 같았다.
프라하 구시청사의 외벽에 걸린 천문시계는 단순한 시계가 아니라 중세의 우주관을 압축한 하나의 세계다. 1410년에 제작되어 지금도 움직이는 이 시계는 낮과 밤의 시간뿐 아니라 태양과 달의 위치, 별자리, 계절, 그리고 달력까지 동시에 보여준다. 매 시 정각이 되면 해골 인형이 종을 울리고, 열두 사도가 창문을 지나가며 “시간의 행진”이 시작된다. 그 순간 광장은 조용한 극장이 되고, 우리는 하늘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이 겹쳐지는 장면을 목격한다. 죽음과 신앙, 지식과 기술이 한 몸이 되어 돌아가는 천문시계 앞에서,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무엇이 된다.
프라하 천문시계에서 가장 먼저 움직이는 것은 해골 인형이다. 사람들은 사도 인형보다도 먼저 이 해골의 움직임을 바라보며 시선이 멈춘다. 중세의 사람들은 그 짧은 손짓에서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는 메시지를 읽어냈다. 시간은 단순히 흐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씩 사라져가는 생의 조각이었기 때문이다. 이 시계 앞에서는 살아 있음이 곧 기적이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다.
1월의 프라하는 유럽의 겨울 도시답게 차분하고 고요하다. 사진 속 광장은 “시간이 멈춘 듯한 공간”처럼 보인다. 사람이 드문 겨울의 아침, 바람만이 조용히 광장을 가로지르는 순간, 도시는 침묵 속에서 더 깊은 말을 건다.
사람이 없는 아침 구시가 광장에 서니, 시간도 발자국 소리를 낮추어 걷는 듯했다. 고딕의 첨탑은 여전히 하늘을 향해 날카롭게 솟아 있고, 얀 후스의 동상은 눈을 뒤집어쓴 채 묵묵히 광장을 지키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역사가 박물관 속에 있지 않았다. 살아 있는 도시의 공기 속에, 여전히 숨 쉬고 있었다.
광장 속 황금 인간
건축이 아니라 사람으로 완성되는 도시 광장을 걷던 중, ‘움직이지 않는’ 황금의 사람 하나를 보았다. 퍼포머였지만, 마치 동상이 사람처럼 살아 있는 듯 보이는 순간이었다. 광장 자체가 연극 무대였다.
프라하의 도시는 박물관이 아니었다. 건축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완성되는 도시였다. 퍼포머는 말없이 서 있었지만, 광장은 그 앞에서 잠시 자신을 멈추어 보았다.
이 동상은 프라하에서 특히 인상적인 ‘벤치에 앉아 있는 남자 동상’이다. 관광객들이 자주 지나가는 길목에 놓여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옆에 앉아 사진을 찍곤 한다. 표정은 장난기 있게 웃고 있고, 한쪽 다리는 맨발로 벤치에 걸쳐 있다. 마치 “어서 와, 프라하는 처음이지?” 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다.
이 동상은 유명한 왕도 아니고, 철학자도 아니다. 하지만 내게는 프라하를 가장 잘 표현하는 얼굴이었다. ‘진지한 역사와 유쾌한 현재가 공존하는 도시’, 그 표정을 나는 이 벤치 위에서 보았다.
프라하는 내 생각을 끝없이 붙잡아두는 도시였다. 과거와 현재가 끊임없이 부딪히는 광장에서, 나는 스스로에게 너무 많은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카프카의 흔적을 박물관에서 만나다
프라하에서 카프카는 더 이상 책 속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 그는 도시 한가운데에서, 예상보다 가까운 거리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구시가지의 골목을 걷다 보면 카프카 박물관이 나타나고, 그 앞에는 설명 없이도 낯선 감각을 불러오는 조형물이 서 있다. 처음부터 친절하게 다가오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공간은 카프카의 문장과 닮아 있다.
카프카 박물관은 작가의 삶을 연대기적으로 정리해 보여 주는 장소라기보다, 그의 세계관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게 만드는 공간에 가깝다. 원고와 사진, 편지들이 놓여 있지만, 그것들이 카프카를 완전히 이해하게 해 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더 많은 질문을 남긴다. 그는 무엇을 그렇게 끊임없이 불안해했는지, 왜 세계를 끝내 설명하려 들지 않았는지. 박물관은 해답을 주기보다, 그 질문을 견고하게 만드는 장소다.
박물관 밖으로 나오면, 카프카의 동상이 다시 한 번 시선을 붙잡는다. 사람 위에 사람을 얹은 듯한 형상, 혹은 얼굴 없는 인물이 무언가를 짊어진 채 서 있는 모습은 쉽게 의미를 단정할 수 없게 만든다. 이 동상은 기념비라기보다, 하나의 질문처럼 서 있다. 왜 그는 이렇게 묘사되었을까, 왜 이 도시에서 카프카는 늘 온전한 얼굴을 갖지 못하는가.
프라하의 거리 곳곳에 놓인 카프카의 흔적들은 그를 영웅처럼 기념하지 않는다. 대신 그가 남긴 감각을 조용히 반복한다. 불편함, 어색함, 설명되지 않는 상태. 관광객들은 사진을 찍지만, 그 앞에서 오래 머무르지는 않는다. 카프카의 흔적은 오래 바라볼수록 편안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 앞에서 자주 멈추게 된다. 책에서 읽었던 세계가 이 도시의 골목과 광장, 박물관과 조형물로 이어져 있다는 사실이 묘하게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카프카는 이 도시를 떠나지 못했고, 도시는 그를 끝내 놓아주지 않았다. 프라하에서 카프카를 만난다는 것은, 한 작가를 기념하는 일이 아니라 이 도시가 품고 있는 불투명한 기억을 마주하는 일에 가깝다.
그래서 프라하의 카프카는 설명되는 인물이 아니라, 계속해서 질문을 남기는 존재로 남아 있다. 박물관과 동상은 그 질문을 눈앞에 놓아 둘 뿐이다. 이해하려는 순간, 그는 다시 한 발짝 물러난다. 마치 그의 소설 속 인물들처럼.
프라하에서 흔적을 찾을 수 없는 밀란 쿤데라
밀란 쿤데라는 1929년 체코슬로바키아의 브르노에서 태어나 프라하에서 성장했다. 음악가였던 아버지의 영향 속에서 예술과 사유에 익숙해졌고, 프라하에서 문학과 영화를 공부하며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1960년대 그는 『농담』을 통해 체코 문단의 주목을 받았지만, 1968년 프라하의 봄과 그에 뒤이은 소련의 침공 이후 체제 비판 작가로 낙인찍혀 작품 활동과 교수직을 잃었다. 결국 1975년 프랑스로 망명했고, 1979년에는 체코 국적마저 박탈당했다. 망명 이후에도 그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등 주요 작품을 통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점차 프랑스어로 집필 언어를 옮기면서 작가의 사적 삶과 해석을 철저히 거부하는 태도를 고수했다. 쿤데라는 고국을 떠난 작가였지만, 그의 작품 속에서는 끝내 프라하와 중부 유럽의 기억이 사유의 원점으로 남아 있었고, 그는 망명과 기억, 선택과 삶의 무게를 끝까지 탐구한 작가로 기억된다.
카프카가 프라하를 떠나지 못한 채 구조를 살아냈다면, 쿤데라는 그 구조를 견딜 수 없었기에 떠났다. 그의 삶에서 프라하는 현재가 아니라,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으로 남는다.
쿤데라의 소설 속 프라하는 억압의 공간이면서 동시에 선택의 장소다. 『농담』에서는 말 한마디가 인생을 무너뜨리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는 자유로운 선택이 오히려 삶을 공허하게 만든다. 그의 인물들은 질문할 수 있지만,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쉽게 얻지 못한다. 쿤데라는 권력이 인간을 어떻게 처벌하는지를 보여 주기보다, 권력 이후에 인간의 삶이 어떻게 가벼워지는지를 집요하게 묻는다.
쿤데라의 작품이 주는 충격은 서사의 반전에서 오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외면해 왔던 감각을 정확히 건드린다는 데 있다. ‘농담’, ‘가벼움’, ‘느림’ 같은 제목들은 설명 없이도 강한 메시지를 던진다. 그는 감정을 과장하지 않고, 아이러니와 거리 두기를 통해 독자가 스스로 무게를 느끼게 만든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읽는 동안보다, 읽고 난 뒤에 더 오래 남는다.
프라하에서 쿤데라를 떠올린다는 것은, 눈앞의 흔적을 찾는 일이 아니다. 이 도시에 그의 동상이나 박물관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은 오히려 쿤데라답다. 그는 기념되기보다, 기억되기를 원했던 작가다. 쿤데라의 프라하는 걷는 도시가 아니라, 되돌아보는 도시다. 떠나야만 비로소 보였던 프라하, 그리고 그 이후의 시간을 끝내 놓지 않았던 작가. 그래서 나는 프라하에서 카프카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자주 밀란 쿤데라를 떠올리게 된다.
쿤데라는 카프카의 영향을 받았을까. 이 질문은 쉽게 ‘그렇다’거나 ‘아니다’로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다. 왜냐하면 카프카는 쿤데라를 알 수 없는 사람이었고, 쿤데라는 분명히 카프카 이후의 세계를 살았기 때문이다. 카프카는 설명되지 않는 구조 속에 놓인 인간을 그렸고, 쿤데라는 이미 그 구조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구조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알고 있는 시대에 살았다. 두 사람은 같은 도시를 공유했지만, 서로 다른 시간 위에 서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쿤데라의 작품을 읽다 보면, 카프카의 그림자가 스쳐 지나가는 순간들이 있다. 『농담』에서 말 한마디로 삶이 붕괴되는 장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이유 없이 삶의 궤도가 꺾이는 경험은 카프카의 세계를 떠올리게 한다. 개인은 충분히 합리적이지만, 세계는 끝내 합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이 감각은 분명 카프카가 먼저 열어 놓은 세계다.
하지만 쿤데라는 그 세계에 머물지 않는다. 카프카의 인물들이 질문조차 끝까지 던지지 못한 채 구조 안에 갇혀 있다면, 쿤데라의 인물들은 그 구조를 해석하려 애쓴다. 그들은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묻고, 그 질문이 삶에 어떤 무게를 남겼는지 끝까지 생각한다. 카프카가 침묵으로 세계를 드러냈다면, 쿤데라는 아이러니와 사유로 그 침묵 이후를 건너간다.
그래서 쿤데라에게서 발견되는 카프카의 흔적은 문체나 분위기라기보다, 출발점의 공유에 가깝다. 세계는 더 이상 투명하지 않다는 인식, 개인은 구조보다 항상 늦게 도착한다는 감각. 쿤데라는 그 전제를 받아들인 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는 묻는다. 그런 세계에서 인간은 어떻게 사랑하고, 선택하고, 기억하며 살아갈 수 있는가를. 카프카가 열어 둔 문을 통과해, 그 다음 방으로 들어간 작가. 그렇게 보면 쿤데라는 카프카의 후계자가 아니라, 카프카 이후를 사는 작가라고 부르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프라하에서 쿤데라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의 흔적은 돌과 청동이 아니라 텍스트 속에 남아 있었다. 『농담』의 대학과 광장,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반복되는 귀환과 이탈의 감각, 정치와 사적인 삶이 충돌하는 분위기 속에는 분명 프라하의 공기가 스며 있다. 쿤데라의 프라하는 걷다가 발견되는 도시가 아니라, 읽다 보면 되돌아오게 되는 도시이다.
한 도시가 특별해 보이는 것은 위대한 작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