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베트남. 라오스. 태국 <1편>

by 박미미

여행 1일차(2025.10.9)


살면서 진정으로 혼자였던 적이 있었던가.
서로를 끌어당기는 만유인력처럼, 인간은 관계라는 중력 속에서 균형을 잡으며 살아간다. 가끔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도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관계가 허용하는 테두리 안에서의 작은 일탈일 뿐이었다. 나는 늘 관성에 몸을 맡긴 채 그 중력의 법칙을 충실히 따랐다. 그러다 깨달았다. 한 번도 나를 혼자 내버려 둔 적이 없다는 것을. 그래서 떠나기로 결심했다.

처음으로 가는 혼자만의 여행이다. 막상 준비하려고 보니 가족이나 친구들과 갈 때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 몰려온다. 낯선 공간에서 낯선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두렵다. 하지만 기대와 설렘, 호기심이 그 감정들을 상쇄시켜 버린다.

10박 11일의 일정으로 동남아를 여행하기로 했다. 베트남 다낭에서 라오스, 태국, 캄보디아를 거쳐, 다시 베트남 다낭으로 복귀를 계획했으나 캄보디아는 치안이 불안해서 제외시켰다. 모든 국경을 육로로 통과하고 싶었는데 시간과 체력이 문제가 될 것 같았다. 버스나 기차를 이용한다고 해서 반드시 경제적인 것도 아니니 짧은 기간밖에 쓸 수 없는 나 같은 여행자는 효율을 따져야 한다. 육로로 국경 통과는 베트남 하노이에서 태국 루앙프라방까지 슬리핑 버스 한 번만 타고 나머지는 비행기를 이용하기로 했다.

라오스와 태국은 아직 가본 적 없는 미지의 나라이다. 우리는 통틀어 동남아로 부르지만, 나라마다 특색과 문화가 다르다. 한국이 중국과 일본하고 다른 것처럼. 여행자의 입장에서 보면 여행에 관여되는 시스템의 차이도 있다. 시간이 촉박해서 여러 나라를 모두 공부할 수 없었다. 대충의 동선만 짜고 나머지는 현장에서 부딪쳐 보기로 했다. 여행이 너무 완벽하면 관광이 되어 버린다. 문제가 생기고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것이 자유여행의 묘미이다. 특히 혼자이다 보니 무조건이란 것이 없다. 발길 닿는 데로 가고, 가다가 힘들면 쉬고, 좋으면 눌러앉으면 된다. 미리 짜 놓은 일정은 그냥 일정일 뿐이다. 일정은 어떤 나라가, 어떤 이가 나를 더 매료시키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어쨌거나 급조한 여행의 주제는 베트남, 라오스, 태국의 수도를 가는 것으로 정했다. 사실 동선상으로 불가피하게 지나칠 수밖에 없는 곳들이다.

갑자기 계획한 여행의 부실이 바로 드러났다. 달러가 없다는 걸 출발 당일에 알게 되었다. 추석 연휴 기간에 출국이라 은행에서 인출할 수 없었다. 달러는 보조 결제 수단이라서 뭐 어떻게 되겠지, 하면서 공항을 가는데 진짜 문제가 발생했다. 비행기를 예매할 때 컴퓨터에 저장된 정보가 자동으로 입력되면서 예전 여권번호로 예매가 됐다. 새로 발급받은 여권은 번호가 달랐다. 이걸 김해공항에 다다랐을 때 여권을 보고 알게 되었다. 치명적인 실수다. 비행기 수속은 아주 원칙적이고 까다롭다. 여권에 작은 낙서만 되어 있어도 입출국이 거부되기도 한다. 공항이나 항공사에서 문제 삼으면 방법이 없다. 아직 여행을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허무하게 끝나버릴지 모른다. 공항으로 들어갈 때는 이미 절망한 상태였다.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면서 탑승 창구에 문의하니 여권만 있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했다. 나도 모르게 소리가 질러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여행을 시작하는 날, 가장 큰 고비를 넘기게 됐다. 그 순간은 여행 자체보다 문제가 해결되어서 기분이 좋았다. 성취감에 절은 채 자신 있게 출국 심사를 하고 비행기를 탔다.

언제부터인가 여행을 가면서 날씨를 보지 않는다. 물론 비행기의 연착륙에 문제가 생길 수 있는 태풍 같은 것은 보지만 우기, 건기 같은 계절적인 기후는 보지 않는다. 우기든 건기든 나름대로 낭만이 있기 때문이다. 다낭 공항에 비행기가 착륙하는데, 활주로에 비가 때려 붓는다. 베트남이 우기라는 걸 승무원을 통해 알게 되었다. 상관은 없다. 하지만 저녁에 미케비치에서 러닝을 못할 것 같아 그게 좀 아쉬웠다.

사람들 틈에 섞여 비행기를 빠져나왔다. 기내용 캐리어 하나와 노트북이 든 백팩뿐이라서 수화물을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같은 비행기에 탑승한 사람들보다 비교적 일찍 입국 심사장에 도착했음에도 줄은 짧지 않았다. 적당한 곳에 서서 심사를 기다리는데 한 줄이 아니다. 함께 온 일행들이 무리 지어 있어서 들쑥날쑥하다. 이 중에는 가족 여행도 있을 것이고 친구들, 연인과의 여행도 있을 것이다. 슬쩍 둘러보아도 나처럼 혼자 온 사람은 없다. 이때 머릿속에서 오직 단 하나의 사람이 떠올랐다. 셋째이며 유일한 딸인 별이가. 여행을 막 시작하는 시점에 별이가 생각난 것은 막막함 때문일 것이다. 두 아들에 비해 별이는 아빠와 함께 한 시간이 많았다. 같이 유튜브도 찍고 텃밭도 일구었다. 중1인데도 학교에서 친구들과 있었던 일들을 깨알같이 이야기하고 밴드 활동하면서 힘들었던 일들에 대해 의논을 해온다. 이렇게 아빠를 무한 신뢰하는 딸이 옆에 있으면 용기가 생길 것 같았다. 딸을 생각하면서 미소 짓다가 흠칫 놀랐다. 한편으로 딸에게 의지하고 있는 나를 보아서다. 딸을 아끼는 마음과 별개로 딸에게 분리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사랑인지 알았는데 정서적인 속박이었다. 별이는 언제나 아빠의 많은 부분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렇게 혼자가 되어 보니 보이지 않았던 관계의 선들이 선명히 나타난다. 이번 여행을 통해 다른 의미의 홀로서기를 해야 한다.

공항에서 나오는 순간 숨이 멎는다. 낯설다. 당연히 낯선 것이 맞는데 외부의 환경뿐만 아니라 나 자신도 낯설다. 쉽게 빠져나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길을 잃어버린 것처럼 막막했다. 일단 벤치에 앉았다. 본능적으로 그랩을 활성화했는 데 사용 방법이 기억나지 않는다. 무리 지어 다니는 야생의 짐승이 처음으로 무리를 이탈했을 때 이런 상태가 되지 않을까?
정신을 차리고 몇 번 만에 그랩을 호출했다. 새벽 비행기에서 내릴 때는 그랩이 잘 잡히지 않았는데 낮이라서 그런지 쉽게 잡혔다. 비를 뚫고 온 그랩을 타고 숙소로 출발했다.

비는 공항을 벗어나면서 약해지다가 숙소에 도착할 때쯤에는 그치고 해가 나기도 했다. 호텔 예약 사이트에서 가격과 한국인의 후기만 보고 예약한 숙소는 생각보다 괜찮았다. 무엇보다 접근성이 좋았다. 한시장이 걸어서 2분 거리였고 반대로 나가면 한강이 있었다. 가까이에 용다리가 보이는 걸로 봐서 미케비치도 그렇게 멀지 않아 보였다. 일단 짐을 풀고 카드가 흘러내리는 지갑을 새 걸로 교체하기 위해 한시장으로 갔다.

한시장 1층의 익숙한 냄새가 여기가 베트남이라는 걸 일깨워준다. 나는 이 냄새가 나쁘지 않다. 지갑을 사러 2층으로 올라가다가 어떤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우리는 아주 잠시지만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에 반가움이 스쳐 지나갔다. 아니 반가움은 내가 느낀 감정일 뿐이고 그녀는 그저 밝게 웃었다. 나는 그녀를 안다. 아마 한시장에서 한국말을 제일 잘하는 베트남 사람일 것이다. 그녀는 2층에서 크록스를 파는 신발가게의 점원이며 예전에 왔을 때 학생이라고 불렀다. 이미 눈빛을 교환했기에 인사를 했다. 그녀도 한국말로 ‘오랜만에 오셨네요.’라며 인사를 받아준다. 설마 나를 알까? 생각하며 ‘잘 지냈어?’ 물었다. 툭 던진 나의 물음에 ‘네’라고 대답까지 했다. 그리고 누구와 왔는지 묻는다. 혼자 여행 중이라고 하자, 그녀가 친구도 가족도 없이 혼자 온 거냐고 재차 묻는다. 그녀가 나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 이 질문으로 확실해졌다. 한시장에 여러 번 왔었는데 그녀가 나를 기억하는 시점은 3년 전 친구와 왔을 때이다. 그리고 1년 전에 가족과 왔었다. 그녀가 친구와 가족을 차례로 묻는 것은 내가 다녀간 순서를 그대로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수많은 한국 사람이 이 가게에서 신발을 샀을 텐데, 나를 기억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제는 학생이 아니라 23살 아가씨란다. 그래서 그런지 그때보다는 훨씬 덜 애처롭다. 그녀는 농담까지 섞어가며 반가움을 표현했다. 잠시 모든 관계를 끊으려 여행을 왔는데 관계는 여기에서까지 지속되고 있었다. 관계를 맺는 것은 당사자들의 일이지만 유지하고 이어가는 것은 당사들조차 어떻게 할 수 없는 불가항력의 영역인지도 모른다. 관계는 뿌려 놓은 씨앗처럼 알아서 자라난다. 고맙기도 하면서 놀랍기도 했다.


저녁에 다행히 비가 그쳐서 미케비치에서 러닝을 했다. 야자수가 솟은 해변에서 파도 소리를 들으며 모래 위를 뛰는 것은 한국에서 할 수 없는 생소한 경험이다. 문득 이곳이 참 아름다운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자연의 혜택 아래 살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얼굴에는 웃음이 넘친다. 내가 동남아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가 이 웃음 때문이다. 원래 나에게도 있었는데 잃어버린 물건 같은 느낌이다. 여행을 통해 꼭 찾아야 한다. 타국에서가 아닌 나의 내면으로부터.

베트남은 해안선이 긴 바다를 끼고 있다. 그래서 해산물이 풍부하다. 한국에서는 이미 비싼 식재료가 된 해산물을 다낭에서는 비교적 저렴하게 먹을 수 있다. 다낭에 올 때마다 들리는 해산물 식당에서 저녁을 먹은 후에 마사지를 받고 숙소로 들어가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