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핍된 영웅

#036

by 이로


당신의 능력을 증명하십시오. 토요일 저녁 7시, 문래동 철강 단지 내 3번 창고.


서른두 살의 평범한 물류창고 계약직 직원인 저에게 능력이라니요. 매일 아침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똑같은 상자를 나르고 재고를 확인하는 것 외엔 내세울 게 없는 제 삶에서 가장 이질적인 단어였습니다. 하지만 무미건조한 일상에 지쳤던 탓일까요. 저는 홀린 듯 약속 장소로 향했습니다.


기름 냄새와 쇳가루가 날리는 어두운 창고 안, 낡은 캠핑 의자에 둘러앉은 세 사람을 본 순간 저는 숨이 멎는 줄 알았습니다. 그들은 놀랍게도 매일 물류센터에서 마주치는 제 동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늘 말수가 적고 느릿느릿 걷던 지게차 기사 철수 씨, 식당에서 말없이 반찬만 깨작거리던 경리 영희 씨, 그리고 늘 피곤함에 절어 구석에서 졸던 검수원 민수 씨였습니다. 그들이 고백한 초능력이라는 것은 더 황당했습니다.


철수 씨는 하루에 딱 한 번, 10분 동안 시속 100km로 달릴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10분이 지나면 다리 근육이 마비되어 누군가 업어줘야 하는 반쪽짜리 능력이었죠. 영희 씨는 손을 대면 부서진 기계나 물건의 시간을 10분 전으로 되돌려 고칠 수 있었지만, 10분 뒤엔 다시 원래의 고장 난 상태로 돌아가 버린다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민수 씨는 일주일간 잠을 자지 않고 버틸 수 있지만, 그 기간이 끝나면 사흘 동안 시체처럼 잠만 자야 했습니다.


이게 무슨 능력입니까? 그냥 다들 정신이 좀 이상해진 거 아닌가요?

저는 실소하며 자리를 박차고 나왔습니다. 매일 보던 동료들이 이런 허무맹랑한 소리를 늘어놓는 것이 한심하게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정확히 사흘 뒤, 세상은 지옥으로 변했습니다.

규모 7.8의 강진이 수도권을 강타했습니다. 우리가 일하던 물류센터는 굉음과 함께 무너져 내렸고, 정신을 차렸을 땐 서늘한 지하 하역장의 콘크리트 잔해 틈에 갇힌 상태였습니다. 제 곁에는 공포에 질린 마흔 명의 생존자가 고립되어 있었습니다. 통신은 끊겼고, 지상은 화재와 여진으로 구조대의 접근조차 불가능한 고립무원의 상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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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이 지나자, 희망은 절망으로 바뀌었습니다. 갈증과 굶주림보다 무서운 것은 어둠 속에서 번져가는 공포였습니다. 그때였습니다.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누군가 미친 듯한 속도로 달려와 멈춰 섰습니다. 철수 씨였습니다.

그는 온몸의 핏줄이 터진 듯 붉은 얼굴로 바닥에 쓰러지며 등에 메고 있던 아주 작은 생수 한 병을 던졌습니다.

도로가 다 끊겼어요. 헬기도 못 떠요. 외곽 구호소까지 왕복 80km를 한 번에 달려왔습니다. 겨우 이거 하나 챙겨오는 게 제 한계였어요.

철수 씨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습니다. 겨우 물 한 병으로 마흔 명의 목숨을 구할 수는 없었습니다.


절망이 우리를 덮치려던 찰나, 제가 일하던 물류센터의 구조가 머릿속에 번뜩였습니다. 바로 옆 구획이 비상식량과 재난 구호 물품을 대량으로 보관하던 특수 창고였던 겁니다. 하지만 그곳으로 가는 길은 뒤틀린 철제 셔터가 가로막고 있었고, 제어 장치는 여진에 완전히 파손된 상태였습니다.

그때 영희 씨가 나섰습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박살 난 셔터의 제어 엔진에 손을 얹었습니다.

제 능력을 믿어주세요. 딱 10분입니다!

그녀가 집중하자 기적처럼 엔진의 불꽃이 다시 튀고 찢겨나갔던 철판들이 원래의 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10분 뒤면 다시 고철이 될 시한부 기적이었지만, 그 찰나의 순간에 우리는 전력을 가동해 육중한 셔터를 들어 올렸습니다.

콰르릉 소리와 함께 셔터가 올라가자, 어둠 속에서 수천 박스의 생수와 통조림이 가득 차 있는 비상식량 창고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10분의 시간이 지나 셔터가 다시 굉음을 내며 무너져 내렸지만, 이미 우리는 생존에 필요한 충분한 물자를 확보한 뒤였습니다.


하지만 진짜 고비는 밤이었습니다. 여진이 계속되는 와중에 어디가 추가로 무너질지, 잔해 너머에 아직 사람이 살아있는지 알 길이 없었습니다. 그때 민수 씨가 눈을 부릅뜬 채 나섰습니다. 그는 다른 이들이 지쳐 잠든 깊은 밤에도 뜬눈으로 잔해 속 미세한 진동과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영광 씨, 거기 수첩 있죠? 제가 부르는 위치를 정확히 기록하세요. 3시 방향 20m 지점 생존자 신음, 11시 방향 가스 누출 의심 지점.

민수 씨는 잠들지 않는 눈으로 어둠 속 위험을 읽어냈고, 저는 그의 말을 한 글자도 놓치지 않고 기록했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신뢰하지 않으면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었습니다. 철수가 목숨 걸고 달려온 의지, 영희가 억지로 되돌린 10분의 기회, 그리고 민수가 지켜낸 잠들지 않는 밤. 이 모든 조각은 저의 기록을 통해 하나의 생존 지도가 되었습니다.


구조대가 도착하고 일주일 뒤, 우리는 다시 그 낡은 창고에서 만났습니다. 저는 동료들 앞에 고개를 숙였습니다.

제 오만함을 용서해 주세요. 매일 같이 일하면서도 당신들이 이런 대단한 사람인 줄 몰랐습니다. 저는 결국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무능력자였습니다.


그러자 철수 씨가 제 어깨를 짚으며 웃었습니다.

영광 씨, 당신은 아직도 모르는군요. 당신의 능력은 우리를 하나로 묶는 신뢰의 눈이었습니다. 제가 죽을힘을 다해 달릴 수 있었던 건, 제가 가져온 작은 단서를 당신이 절대 포기하지 않고 기적으로 연결할 거라는 믿음 때문이었어요.

영희 씨가 덧붙였습니다.

10분 뒤면 다시 망가질 물건을 고치는 게 늘 허무했어요. 하지만 영광 씨가 그 짧은 틈에 식량 창고를 찾아내고 사람들을 지휘할 거라 믿었기에 손을 뻗을 수 있었죠.

민수 씨 역시 피곤한 눈을 비비며 말했습니다.

내가 밤새 찾아낸 정보들을 당신이 믿고 기록해 주지 않았다면, 난 그저 헛것을 보는 불면증 환자에 불과했을 겁니다. 당신의 능력은 우리 각자의 결핍된 조각들을 모아 생존이라는 그림을 완성하는 신뢰의 힘이었습니다.


저는 깨달았습니다. 대단한 능력은 개인의 비범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의 평범함을 인정하고 타인의 서툰 재능을 절실하게 믿어주는 그 마음이야말로 세상을 구하는 가장 본질적인 능력이라는 것을요.

자, 영광 씨. 이제 다음 편지를 쓸 시간입니다. 우리가 함께 일하는 또 다른 영웅들을 찾으러 가야죠.

동료들이 건넨 새 봉투를 받아 든 제 손엔 더 이상 망설임이 없었습니다. 저는 이제 압니다. 매일 마주치는 평범한 사람들 속에 숨겨진 기적을 끌어내는 것은, 바로 그들을 향한 저의 간절한 믿음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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