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프 - 가끔은 옛날처럼
"회의 내용을 샤프로 기록하시네요?"
나는 샤프의 사각사각 소리가 좋다.
어딘가 듣기만 해도 차분해지는 이 느낌.
샤프소리를 내면서 뭔가를 기록하고 있으면 뭔가를 훌륭하게 해내고 있는 기분이라도 든다.
비단 이런 기분이 드는 것은, 어린 시절부터 접한 샤프와의 추억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나의 첫 필기구는 연필이었다.
연필로 글씨를 써 내려가던 학창 시절, 쓰다 보면 금방 뭉툭해져서 글씨가 두꺼워지고 자주 깎기 귀찮다는 이유로 샤프를 쓰기 시작했다.
오백 원짜리 샤프통 하나면 필통을 가득 채운 연필보다 더 많이 쓸 수 있다는 신기함도 있었지만, 샤프 특유의 날렵한 필기감이 글씨를 더욱 돋보이게 해주는 이유도 제법 컸다.
간혹 너무 어려운 수학문제라도 만나면 입체를 그리고, 수식을 휘갈기며 샤프심을 몇 번이고 새로 넣으면서 씨름하기도 했고, 지각이라도 한 날에는 노트 가득 깜지를 채우면서 샤프를 혹사시키기도 했다.
말하자면, 샤프는 내 학업의 동반자였다.
대학에 간 뒤로, 샤프의 경쟁자가 생겼다.
필기감이 너무 좋아서 샤프의 자리를 제법 꿰찬 시그노 0.5mm 펜.
이 녀석의 필기감은 샤프보다 부드럽고 훨씬 날카로워서 샤프의 제법 많은 부분을 대체했다.
그럼에도 샤프의 모든 부분을 대체할 순 없었다.
마치 샤프의 모든 부분이 대체될 것처럼, 샤프는 필통 구석에서 좀처럼 나오지 못했지만 중요한 시험이나 공간이 한정적이라 지우개가 필요할 때는 다시 필통 속에서 샤프를 꺼내 들었다. 중요한 기회마다, 샤프는 최후의 보루이자 구원타자였다.
성인이 되고, 취업을 했다.
필기를 할 일이 줄어드니 샤프도 그 쓸모를 다했다.
간혹 있는 필기는 펜으로 하게 되었고, 가끔씩 글을 적으면 그 필기감이 어색할 지경이 되었다.
깐깐하게 필기감을 고르던 내 손은 무뎌졌고, 집히는 대로 아무 펜이나 들어서 급한 메모를 휘갈기고는 했다.
샤프를 다시 만난 건 서점을 간 어느 날이었다.
우연히 눈에 들어온 샤프는 우연히 다시 만난 친구처럼 무척이나 반가웠다.
삭막한 회사생활에 변주를 주고 싶던 나는 잊고 있던 필기감을 다시 찾기 위해, 어쩌면 필기감으로 대변되는 향수와 편안함을 찾기 위해 샤프를 다시 구매했다.
회사에서의 회의 메모도, 간혹 기분 내킬 때 하는 외국어 공부도, 그리고 취미가 된 글쓰기도 모두 샤프로 쓴다.
어린 시절의 신기함을 다시 되새기면서,
학창 시절의 안정감을 채워보면서,
다시 한번 어른의 글들을 샤프로 적어본다.
나는 샤프의 사각사각 소리가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