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2월 5일, 그해 첫눈이 흩날리던 오후에 인천공항에서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다음 날 아침 호주 멜번에 도착해 공항을 빠져나오니, 한여름이었지만 공기는 조금 서늘했고 그 낯선 느낌이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그 당시 내 나이 마흔아홉.
손해보험사 업무직으로 17년, 이후 보험 브로커로 7년간 영업을 하며 한창 일하던 시기였다. 마침 그 무렵, 호주의 가족 초청 이민이 허락되었고(아내의 언니가 멜번에서 오래 살아 시민권을 취득해 형제 초청이 가능했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채 일말의 불안함과 한편의 막연한 기대를 안고 아내와 아이들을 먼저 호주로 보냈다.
그리고 거의 2년이 다 되어서야 나도 멜번에 오게 되었다.
금전적으로 가진 것도 없이 왔기에 이곳저곳을 구경할 겨를도 없었다.
한국에서 일식 학원에서 두 달간 배운 살몬 스시 기술 하나만 가지고 여기저기 이력서를 돌렸다. 그 나이에 인생의 여유를 느낄 틈도 없이 앞날 걱정만 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곳은 12월 중순부터 1월 하순까지가 휴가철이라 잡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력서를 내도 휴가를 가서인지 연락이 없었고, 그 사이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다. 이민 온 가정에서 흔히 겪는다는 부부 간의 크고 작은 트러블도 몇 번 있었다.
그러던 중 다음 해 1월 중순, 이력서를 냈던 한 클럽(Veneto Club)에서 연락이 왔다.
50년 전 이민 온 이탈리아인들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찾아가 보니 헤드 셰프가 “디시와셔 일이 힘든데 할 수 있겠느냐”고 묻기에, 나는 짧은 영어로 “Yes, I can do.”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옷 갈아입고 오후 5시 반까지 다시 오라고 했다.
이 클럽은 이탈리아인들이 50년전에 이민와 Melbourne Bulleen 지역에 대규모 땅을 구입후 정규 축구장 2개, 농구장, 테니스장, 그리고 3층 건물중 1층에 비스트로 약 80석, 포키.슬롯머신 룸, 2층에 펑션 200석 및 150석, 3층에 대규모 펑션 400석 규모를 수용하고 있으며 주차장에 약150대 이상의 차량을 주차할 수 있었다.
그날, 그 레스토랑 키친에서 새벽 1시까지 온갖 요리 그릇과 접시를 닦았다.
이민 온 사람들이 흔히 처음 시작하는 일처럼.
그날 손님이 180명이나 왔다고 했다.
서양식 코스 요리는 한 사람당 엔트리부터 디저트까지 접시가 많다 보니, 모두 합치면 플레이트만 800개가 넘었고 나이프와 포크는 큰 박스로 두 상자나 되었다. 왜 그렇게 많은지 모를 정도였다.
세척기(dishwasher)가 있어도 둘이서 꼬박 서서 해야 했다.
오후 5시 반부터 새벽 1시까지.
토요일이라 손님들은 밤 11시, 12시까지 밴드를 불러 먹고 즐겼고, 일은 끝날 줄을 몰랐다.
봉급은 외국인 클럽이라 시간당 19달러(세금 포함)라고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한국인 식당의 두 배쯤 되는 금액이었다.
헤드 셰프는 다음 주 토요일에 다시 오라고 했다.
어쨌든 합격점은 받은 모양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이었지만, 그날 집에 돌아와 어깨가 결리고 물파스를 바르고 나서도 온몸이 축 처져 며칠간 여파가 갔다.
화이트칼라에서 블루칼라로 변신한 첫날이었다.
한국에서 일식 요리 과정을 이수한 것을 보고 부른 것 같지는 않았다.
아마도 당일 손님은 많은데 일할 사람이 없어서였을 것이다. 그래도 태어나서 정신적인 노동만 하다 육체적인 노동을 처음 접해보니 몸은 피곤했지만, 외국에 이민 와서 취업 가능성을 얻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동안의 스트레스가 조금은 누그러졌다.
그 무렵 간간이 한국인이 운영하는 스시숍에서도 일했다.
아침 5시에 일어나 머리를 감고 밥을 먹은 뒤, 아내가 차로 6시까지 버스 정류장에 데려다주면 6시 40분에 일터에 도착했다. 오전 11시까지 스시를 만들고 다시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생활이었다.
그곳에는 유학생들도 있었는데, 당시 학생들의 시급은 7~8달러 정도였다.
나는 9달러로 시작했고 하루 4시간 일했다. 임금 단가를 따질 처지는 아니었다. 머나먼 타국에서 처음으로 속을 터놓고 이야기할 한국 사람을 만났다는 사실만으로도 반갑고, 여러 정보를 얻을 수 있어 큰 도움이 되었다.
한국에서처럼 정신적인 스트레스는 없었다.
보수는 작았지만 마음은 오히려 편안했다. 아내도 내가 일자리를 잡은 것에 안도하는 눈치였다. 아직 초기라 나이 든 몸이 온몸이 뻐근했지만, 이곳에서는 호주인들 대부분이 하루하루 노동하며 그렇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비록 풍족하지는 않아도, 직장만 있으면 큰 걱정 없이 만족하며 사는 곳 같았다.
오전에는 스시 일을 하고, 오후에는 쉬면서 영어책을 조금 보다 저녁을 먹고 아이들과 공원에 나가 한 시간쯤 잔디밭을 걸었다.
주말이나 저녁에는 가끔 외국 영화를 빌려 가족과 함께 보곤 했다.
온 지 한 달 반이 되었지만 외식다운 외식은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
아내는 이미 이곳에 온 지 2년이 되었지만, 외국인 지역 성당을 아이들과 다니느라 한국 사람들과의 교류는 많지 않았다. 나 역시 밖에서 한국 사람과 술 한 번 마신 적이 없었다. 술 좋아하고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는 이들은 과연 여기서 무슨 낙으로 살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1~2년 지나면 다들 그런대로 견딘다고 하니, 그동안은 그저 죽치고 일하며 사는 수밖에 없었다.
비록 사람들과의 교류는 적었지만, 공기 좋고 넓은 하늘과 푸른 잔디가 많은 이곳에서 공원 속을 거닐며 숨을 쉬다 보면 다소 무료한 삶 속에서도 ‘아, 내가 지금 새로운 인생길을 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또 하나 달라진 점이 있다면,
한국에서 영업사원으로 살며 돈에 집착하고 고객 관리에 신경 쓰던 내가 이곳에서는 노동의 대가로 일주일 치 급여를 받고 나니, 비록 풍족하지는 않아도 돈에 대한 미련과 집착이 많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물론 초기라서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아이들 과외비 걱정은 없었고, 당시 저소득 영주권자의 경우 중·고등학생 자녀에게도 한 달에 1인당 약 250달러의 양육비가 국가에서 지원되었다.
이곳은 웬만한 직장만 있으면, 큰 불안 없이 살아갈 수 있는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님, 커피 한 잔에 글 쓰기 좋은 오후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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