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고시 2차에서 처절함을 맛보다
재학 중 고시 1차에 합격하자 당당한 고시준비생이 되었다. 2차 시험은 국민윤리, 행정법, 행정학, 경제학, 통계학, 재정학, 화폐금융론 등 7개 과목을 하루에 2과목씩 4일에 걸쳐 보았다. 오전과 오후 2시간, 하루 4시간 씩 시험을 보게 되는데 “00을 논하라”는 식의 주관식 2∼3문제에 대한 답을 10페이지 정도의 답안지에 기술해야 했다. 대자보에 사용되는 정도의 큰 종이에 문제를 적어 칠판에 펼쳤는데 문제지가 펼처지는 순간 ‘아’ ‘어’ 등 탄식이 흘러나오기도 했다. 시험이 치루어지는 학교 고사장 정문에는 촛불을 켜거나 엿을 붙여 놓고 시험이 끝날 때까지 기도하는 어머니들도 있었다. 사회적 명예와 직위를 합법적으로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의 순간임을 느낄 수 있었다.
대학교 차원에서도 자기 학교 출신의 합격자를 많이 배출하기 위해 고시 1차 합격자에게는 장학금 명목으로 약간의 생활비도 지원해 주고 고시특강을 여는 등 경쟁이 치열하였다. 특히 고시 2차 문제의 경우 자기 학교 출신의 응시자에게 유리하도록 학교에서 논의된 쟁점 등을 시험문제로 낸다는 소문도 들렸다. 또한 주관식 시험은 문제 해석부터 답안 작성까지 주관적 요소가 미치므로 다소간 운이 작용하고 합격예측이 어렵다. 1차는 객관식이므로 어느 정도 안정적인 점수가 나올 수 있으나 2차는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1차 시험을 합격하면 당해 및 다음 연도까지 2차 시험을 볼 수 있었다.
대학교 3학년 때 2차 시험에 본격 응시했는데 첫 날 시험인 국민윤리 점수가 40점 과락 수준인 41점이 나와 다른 과목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불합격하였다. 4학년 때 1차 다시 시험에 응시하였고 합격하였으나 졸업 후 2차 시험에 다시 떨어졌다. 답변이 비교적 명확한 경제학 관련 과목은 점수가 괜찮았는데 이와 반면에 다소 두리뭉실한 행정학과 국민윤리 과목의 점수가 잘 나오지 않아서였다. 그러던 중 화장실에서 신문을 보다가 우연히 연세대 3학년 편입시험 공고를 보았다. 당시에는 편입시험이 있는지도 몰랐는데 이런 제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즉시 응시했다. 졸업 시 전공하지 않은 학과에 응시할 수 있었는데 필자는 경제학과를 졸업했으므로 행정학과에 응시할 수 있었다. 고시공부를 통해 실력을 배양한 덕에 편입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다.
연세대 행정학과에 다니면서 고시공부를 계속 했다. 당시 연세대는 행정학과를 중심으로 일반행정 분야는 고시합격생이 10명 이상 배출됐다. 그런데 고시 재경직은 당시 2명 내외의 소수만이 합격을 해서 학교 차원에서 재경직 고시합격을 위한 오리엔테이션을 개최하기도 했다. 고시 재경직을 준비하던 필자에게는 다소 사기가 떨어지는 성과였고 주류에서 멀리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서울대 행정대학원 진학을 준비했다.
당시 행정고시 준비생들은 서울대 행정대학원 진학을 하나의 성공코스로 생각했다. 학교공부과목과 고시과목이 겹치고 졸업생은 6급 특채가 가능했다. 또한 고시합격도 많이하고 석사 학위도 받을 수 있었다.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시험에 응시했는데 10 : 1 정도의 경쟁이 있었다. 다행히 합격했고 시험점수가 좋아 장학금수혜자로도 선정됐다. 연세대를 졸업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고민 끝에 고시합격을 위해 연세대를 중퇴하고 서울대 행정대학원에 입학했다.
바. 한 송이 꽃으로 돌아온 결실
서울대 행정대학원을 다니면서 다소 의외였던 것은 그렇게 죽기살기로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은 것 같은데 입학생의 절반 이상이 고시에 합격한다는 점이었다. 대학원 합격자들은 고시공부가 어느 정도 수준에 올라와서였을 수도 있고 약간은 여유로운 마음이 2차 시험성적을 더 잘 나오게 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대학원 1학년 때 고시 2차 시험을 보았는데 아깝게 떨어졌다. 행정대학원생 동료들이 많이 합격했는데 공부를 열심히 한 사람은 떨어지고 조금 덜 공부한다고 생각했던 원생들은 합격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운칠기삼” 이라더니 맞는 말이 었다. 1994년 갑술년 대학원 2년 차에 다시 1차 시험을 보아야 했다. 이제 고시 베테랑이 되었으므로 1, 2차 합격을 동시에 노렸다. 다행이 1차 시험에 합격했다. 2차 시험을 치루었는데 큰 실수는 없었다고 느꼈다.
합격자 발표날이 되었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합격자 명단을 확인했는데 필자의 이름이 보였다. 너무 기뻐서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다.
“어머니, 너무 놀라지 마시고 우황청심원있으시면 먼저 드시고 들으세요”
“그래 말해봐라”
“저 합격했어요”
세상에 태어나서 최고로 기뻣던 순간이다. 아버지는 30년 묶은 것이 쑥 내려가는 느낌이라고 하면서 ‘효자’라고 했다. 친인척이나 주변 사람들도 많이 놀랬다. 공부를 잘하는 모범생이고 명문대를 다녀도 고시합격하는 사람을 보기 드문데 전혀 다른 행로를 걸어온 필자가 합격을 하니 “망치로 머리를 맞은 기분이다”, “기어이 뚫어 버리는 구나”라며 자기가 다 시원하다고 말하는 분도 있었다. 필자의 합격에 자극을 받은 명문대 출신의 사촌동생은 법원고시에 도전하였고 나중에 결국 합격하였다.
“긴 어둠의 터널은 한 송이 꽃이되어 돌아오고”라는 제목의 합격기를 써서 고시전문 잡지인 ‘고시계’에 기고하였다. 고등학교 시절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아 내신 14등급인데도 고시에 도전하여 합격한 독특한 스토리가 알려지게 되었다. 한선교와 허수경이 진행한 MBC ‘아침마당’에 출연하기도 했다. 필자의 고모 아들이 다니던 학교에서는 교장선생님이 필자의 사례를 들어 공부 못하는 학생들을 독려하기도 했다. 외아들이 공부를 하지 않아 고민이 많던 어떤 학부모님은 필자의 사례를 보고 용기가 생겼다며 찾아 왔다. 필자의 사례를 보고 아들을 설득하여 공부를 시켰고 대학원은 명문대로 진학시켰다며 다음 행로에 대해 조언을 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