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그러진 알루미늄 캔 두 개 만큼의 휴식

by 감자네

이 글은 기존에 '기력 없는 가족의 유럽 여행기 - 더 비기닝'으로 발행했던 글을 손 보아 새 제목과 함께 올리는 글입니다. 마치 길고 긴 여행기의 서막을 알리는 것과 같은 제목과 내용 때문에 주위에서 '도대체 본 편은 언제 나오는 것인가?' 하는 꾸중(?)을 많이 들었더랬습니다. 처음에 마음먹었던 바와 달리, 험난하고도 아름다웠던 22일간의 여정을 가만가만 돌이켜보고 글로 담아내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한 점이 내내 마음에 걸려 해당 글은 '발행 취소'와 '재 발행' 신세를 오갔고, 현재는 멈춘 자리 그대로 남겨 두었습니다. 언젠가 쓰일 유럽 여행기는 '미래의 나'에게 부탁해 두고, 지금은 나의 남편과, 오늘도 묵묵히 자기 몫의 하루를 살아내었을 세상 모든 '어른이'들에게 다정한 응원 한 조각을 건네고 싶습니다.





"나, 팀장님한테 휴직하겠다고 말했어."


연말을 두어 달 앞둔 어느 날이었다. 퇴근해서 늦은 저녁을 먹고 거실에 앉은 남편이 툭하고 말을 건넸다. 20대에 입사해서 40대 중반이 될 때까지 자신의 모든 기력을 회사일에 쏟아부어온 사람이었다. 늘 안쓰러웠고 자주 위태했다. 한창 바쁠 땐, 간밤에 언제 들어왔는지도 모르겠는 남편이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나서는 뒷모습을 보며 잘 다녀오라는 인사를 전하는 것이 그날의 유일한 만남이자 대화일 때도 있었다. 남편은 나와 아이가 잠들고 난 후에야 집에 들어와 작은 컵라면 하나를 후후 불어 먹고는 딱히 볼 것 없는 TV 채널을 하염없이 돌려가며 늦도록 맥주를 마셨다. 매일 같이 500cc 알루미늄캔 두 개가 잔뜩 구겨진 채 재활용 통에 추가되었다. '안 그래도 피곤할 텐데 저녁도 제대로 안 챙겨 먹고 그렇게 매일 새벽까지 술을 마시면 어쩌겠다는 말이냐?'는 잔소리가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극한의 압박감에 체할 듯 위장이 쪼그라드는 것도, 피곤한 눈을 부릅뜨고 맥주라도 마시다 자야 '직장인 아닌 인간, 나'가 소멸되지 않을 것 같은 절박함도 이해가 되었다. 옛날에 회사 다닐 때 나도 딱 그랬으므로.


평일을 이렇게 필사적으로 버텨낸 남편은 주말이면 의식 불명 수준으로 잠을 잤다. 밥 먹자고 깨우기도 쉽지 않을 정도의 완전 방전이었다. 이렇게 계속 살다가는 사람 잡겠다 싶어 이런저런 휴직을 권해봐도 잠시 뜸을 들이고는 '생각해 보고.' 하는 말 뿐이었다. 언제나 생각은 많고, 말은 많지 않은 사람이다. 그랬던 남편이 이렇게 예고도 없이 큰 일을 저지르고(?) 훅! 하고 통보할 줄은 몰랐다. 하긴, 사실은 아주 오랫동안 고민했겠지. 혼자 생각을 하도 많이 하느라 머릿속에서는 이미 나와의 상의를 다 마쳤는지도 모르겠다. 일단 정신을 가다듬는다.


"... 진짜? 잘했어, 잘했어! 오~우찌 이런 큰 결심을 했대?"

"응."

"우리 이제 좀 쉬어가면서 건강하게 살자."

"응."

"혹시 그동안 하고 싶었던 거 있으면 다아~ 해 보고!"


내게는 갑작스러운 결정이었지만 남편에게는 오랜 시간 생각하고 준비한 일이라 그런지, 계획이 줄줄 나온다. 정형외과를 아무리 다녀도 나아지지 않는 어깨와 허리 통증을 고쳐보게 필라테스도 배우고 싶고(남성 회원 받는 곳도 이미 찾아두었네?), 전문가에게 레슨 받아 달리기도 제대로 해보고 싶으며(러닝화 모델이랑 러닝 벨트는 또 언제 알아봤대?), 복싱장에서 펀치도 좀 날리고 싶다고. 하지만 그 무엇보다, 지금은 그저 푹 자고 싶다고 했다. 그래. 원래 힘들면 곰처럼 동굴에 들어가 내내 쉬어야 하는 사람인데, 도무지 걱정 없이 벌러덩 누워 소진된 배터리를 가득 채울 틈이 없었다. 그동안 무척이나 잠이 고팠을 남편에게, 오랜 허기를 달랠 겨울잠을 선물해 본다. 이것저것 배우고 싶은 것도, 사고 싶은 것도 있다는 말에 무엇이든 '그래, 그래' 해 본다. 그간 마음 한구석에 무거운 하루하루를 켜켜이 쌓아 올렸을 당신이, 버티고 버티다 끝내 부서지기 전에 스스로 멈추어 선 것에 감사하고 안도하며. 그렇게 마음껏 쉬고 난 다음에는 이런저런 허튼짓도 해 가며 신나게 꼼지락대면 좋겠다.


당신에겐 '찌그러진 알루미늄 캔 두 개' 보다 훨씬 더 온전하고, 근사한 휴식을 얻을 자격이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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