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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자네 Apr 01. 2024

기력 없는 가족의 유럽 여행기 - 더 비기닝

난데없이 이게 무슨 일이야?

  "나, 팀장님한테 휴직하겠다고 말했어."


   연말을 두어 달 앞둔 어느 날이었다. 퇴근해서 늦은 저녁을 먹고 거실에 앉은 남편이 툭하고 말을 건넸다. 20대에 입사해서 40대 중반이 될 때까지 자신의 모든 기력을 회사일에 쏟아부어온 사람이었다. 늘 안쓰러웠고 자주 위태했다. 한창 바쁠 땐 간밤에 언제 들어왔는지도 모르겠는 남편이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문을 열고 나서는 뒷모습을 보며 잘 다녀오라는 인사를 전하는 것이 그날의 유일한 만남이자 대화일 때도 있었다. 남편은 나와 아이가 잠들고 난 후에야 집에 들어와 작은 컵라면 하나를 후후 불어 먹고는 딱히 볼 것 없는 TV 채널을 하염없이 돌려가며 늦도록 맥주를 마셨다. 매일 같이 500cc 알루미늄캔 두 개가 재활용 통에 추가되었다. '안 그래도 피곤할 텐데 저녁도 제대로 안 챙겨 먹고 그렇게 매일 새벽까지 술을 마시면 어쩌겠다는 말이냐?'는 잔소리가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극한의 압박감에 체할 듯 위장이 쪼그라드는 것도, 피곤한 눈을 부릅뜨고 맥주라도 마시다 자야 '직장인 아닌 인간, 나'가 소멸되지 않을 것 같은 절박함도 이해가 되었다. 옛날에 회사 다닐 때 나도 딱 그랬으므로

   평일을 이렇게 필사적으로 버텨낸 남편은 주말이면 의식 불명 수준으로 잠을 잤다. 밥 먹자고 깨우기도 쉽지 않을 정도의 완전 방전이었다. 이렇게 살다가는 사람 잡겠다 싶어 이런저런 휴직을 권해봐도 잠시 뜸을 들이고는 '생각해 보고.' 하는 말 뿐이었다. 언제나 생각은 많고, 말은 많지 않은 사람이다. 그랬던 남편이 이렇게 예고도 없이 큰 일을 저지르고(?) 훅! 하고 통보할 줄은 몰랐다. 하긴, 사실은 아주 오랫동안 고민했겠지. 혼자 생각을 하도 많이 하느라 머릿속에서는 나와의 상의를 다 마쳤는지도 모르겠다. 일단 정신을 가다듬는다. 


  "... 진짜? 잘했어, 잘했어! 오~우찌 이런 큰 결심을 했대?"

  "응."

  "우리 이제 좀 쉬어가면서 건강하게 살자."

  "응."

  "..."

  "... 우리 이번 겨울에 유럽여행 갈까?"

  "유럽??"

  "응."

  "갑자기? 얼마나? 어디를??"

  "한 달 살기 어때?"

  "한 달??!"

  "응."

  "... 엉...?!!"


  이렇게, 내일은 오랜만에 근교로 나들이나 다녀오자는 정도의 무게감으로 남편은 휴직 예고와 장기 유럽여행 제안을 한 방에 투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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