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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백지 Jun 25. 2024

남한의 적은 북한이지만 여자의 적은 여자였다. 전 날 여섯 살 아이들이 어지럽힌 거실을 정리하는 아침이었다. 아내는 거실 반대편에 앉아 복권을 긁고 있었다. 다소 비현실적인 아침풍경이었다. 몇 년째 복권에 호소하는 현실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전 날 아내의 친인척 결혼식에 다녀왔다. 나이 40이 넘어서면 결혼식보다 장례식에 다닐 일이 더 많아진다. 이번 결혼도 장례식장에 가는 기분처럼 슬픔이 밀려왔다. 젊은 베르테르들은 호텔에서 식을 올렸다. 식 당일에 비가 오면 잘 산다는 미신은 업계 종사자가 만들어낸 소문이 아닐까를 의심해볼 무렵 신부가 입장했다.


결혼 전 날, 저녁 식사자리에서 신부 욕을 맛있게 들었다. 정확하게는 신랑 욕이었지만 나야 뭐 내 지인도 아니고 아내 쪽 친인척이다보니 '요즘 친구들, 그럴 수 있지'라고 생각했다. 요즘엔 '엑셀 결혼'이라해서 신랑 신부가 각자 준비한 결혼 자금이나 물품들을 엑셀로 정리해서 이혼할 때도 자신이 준비한 것들만 깔끔하게 정리해 헤어진다는 이야길 들었다. 이 친구들 역시 이런 식으로 결혼을  준비하지 않았을까 궁금했다. 아내에게 신혼 여행은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냐고 물었지만 모른다고 했다. 이미 눈 밖에 난 커플이었다.


결혼을 반대하는 친인척이 그득한 결혼식에 가본적 있는가? 호텔에서 진행하는 식인데도 의자에 가시가 박혀있다. 나는 신부의 여유로운 모습에서 아내의 모습이 보였다. 수줍은 신부의 모습이나 눈물로 훌쩍이는 모습은 연속극 최종화에서나 나올만한 장면이었고 '혹시 두 번째 결혼인가?' 의심이 들 정도로 자연스러워 보였다. 아내는 그런 신부의 모습에서 신부가 몹시 화가 나있는 상태를 느꼈다고 한다. 여자가 느끼는 촉이라며 무표정한 표정으로 활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화살촉에 살기를 바르며 말을 이었다. 함께 살기위해 결혼한 이들에게 외나무다리에서 나올법한 어색한 눈인사가 오고갔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신경전이 오고갈때 남자들은 신부가 연예인 누구를 닮았네 따위를 생각했다. 전쟁 중에도 위문 공연이 펼쳐지듯 흥에 겨웠다.


시댁을 어려워하는 예비 신부를 위해 어머니와 따로 서울로 올라왔다는 아들의 일화가 시발점이었다. 아내는 '너도 같은 편이 되어 욕해주지 않을래?' 라고 손을 내밀었지만 나는 한사코 거절했다. 나 역시 내 부모에게 그리 좋은 자식은 아니었고, 아내 역시 시댁을 잘 챙기는 이미지는 아니어서 아내와 같은 편이 되어 욕할 수가 없었다. 나이가 들수록 타인을 욕한다는 게 거울을 보며 자신에게 욕하는 모습처럼 보일때가 많다. 당장 우리만 하더라도 시댁 식구가 집에 놀러왔을때 너네집 식구는 너가 챙기라며 식사나 과일 대접도 제대로 못했던 기억이 있다. 인스턴트 핫도그를 전자레인지에 돌려 내드린 전적이 있다보니 딱히 누굴 욕할 수가 없었다. 축복하는 자리에 적들이 많다. 적들의 시선에 젊음은 슬픔이다. 과거 자신도 그런 시기를 지나왔을터인데 누군가는 자기 편을 많이 만들어두었으며, 또 다른 누군가는 적들만 만들어왔다. 삶의 끝자락에 아군이 많을지 적이 많을지는 끝까지 두고볼 일이다. 아내는 젊거나 예쁜, 남편이 호감을 보이는 여자는 모두 적으로 경계하는 듯하다. 아직 우리나라는 휴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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