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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백지 Nov 21. 2024

규칙

어떤 면에서는 성인인 나보다 아이들이 더 뛰어나다고 볼 수 있다. 지금은 규칙들을 숙지하는 시기다. 어쩌면 그 이전부터 내재된 내규가 있었을지 모른다. 아들은 대체적으로 수용하고 실행하지만 딸은 거부하고 거절하기를 즐겨한다. 옆 동에 사는 언니가 학교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오빠는?"

"몰라, 그 걸 왜 나한테 물어?"

더이상의 대화에 진척은 없었다. 아들이 먼저 자전거를 타고 자리를 떠났고 자신에게 적대적인 언니를 남겨두고 딸 역시 자리를 떴다. 딸은 엄마를 닮아 타인에게 질서를 강요하기도 한다. 좋은 것과 싫은 것, 옳고 그름이 확연하다. 자신에겐 관대한 편인 규칙의 담장도 엄마를 닮아있다.




숨바꼭질은 놀이터 외부로 벗어나지 않아야한다는 내규가 존재한다.






어쩌면 누군가 말한 가장 신뢰를 보이는 사랑의 형태는 부모가 자식을 향한 사랑이 아닌 아이들의 부모를 향한 사랑이라는 말을 실감했다. 가히 절대적이다. 나는 육아 초기에 공포로 아이들의 사고와 행동을 제어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다소 마음이 무거워지는 판단이지만 부모가 옳다고 믿는 것을 아이에게 강요하면 아이는 아무런 저항없이 독을 약이라 믿을 수도 있겠다고 여겼다. 부모가 더 예민하고 지혜로울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했다. 우둔한 부모 곁에서 보고 배운 자녀가 대부분의 가정이 이런 환경을 기본값으로 오인할지도 모른다는 착각에서였다. 지금은 자신의 주장을 일정부분 내지를 수 있는 시기가 되었다. 부모가 바빠지고 혼란을 겪는 시기이기도 하다. 아이는 올바른 방향으로 성장하고 있는데 부모는 오로지 늙어간다. 그뿐이다. 헤엄치지 않으면 물결에 휩쓸리고만다.

하원 하기 전 미리 계획을 세웠다. 먼저 학습지 숙제를 시킨 다음 TV를 보게 해주어야겠다고. 집에 돌아오기 전 놀이터에서 잠깐 놀게 해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어제 놀던 아이가 있다. 할머니로 보이는 분과 함께 놀고 있는데 지나던 아저씨 한 분이 반갑게 인사한다. 그는 자신이 아이의 아빠라 주장했고 딸은 반가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유쾌한 사람이었다. 일하다 자동차 사고가 났는데 대인보험은 접수하지 않았다며 아직 그 정도의 인간성은 아니라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런데 곁을 지키던 할머니는 그 아저씨와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존대를 하며 어려워했다. 아이의 급똥 귓속말에 함께 놀던 아이와 헤어지며 할머니의 신분을 알게 되었다. 자신을 돌봄 선생님이라 하셨다. 엄마는 병원에서 일하시고 아빠 회사는 집에서 멀지 않다. 아이들 하원을 돕고 계셨던 분은 친할머니도 외할머니도 아닌 돌봄 할머니였던 것이다. 어제 만났을 때에도 자기 손주 보는 느낌이 아닌 교회에서 전도하러 오신 느낌이었는데 그녀에게 이 장소가 일터였던 셈이다. 다시 일터로 돌아왔다. 밀린 빨래와 아이들 저녁 준비, 그리고 오늘 계획했던 선 학습 후 TV 시청, 소파에 앉아 한글 단어 퀴즈 출제, 영어 단어 카드를 넘기며 내일 이 시간에도 아빠 선생님이 다시 나타난다고 알려주었다. 딸 아이는 내일도 TV 보는 시간을 줄이고 아빠와 함께 공부하고 싶다고 고백했다. 잠들기 전 사랑한다는 말과 함께 꿈나라에서도 만나자 약속한다. 그 약속은 수면 마취 주문처럼 절대적인 힘을 지녔다.








약속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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