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내 이름과 별명

by 서순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이름을 가지고 살아갈까? 예전에는 하나의 이름으로 평생을 살고, 심지어는 그 이름을 불리어 본 적도 없이 살아간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이름 하나로 살아가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다.


내 이름도 여러 가지이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할머니가 지어주신 본명 ‘서순오’가 있다. 큰 부자로 살아가라고, 동네 부자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했다. 나는 내 이름이 흔하지 않아서 좋았다. 할머니의 소원대로 물질적인 부자는 되지 못했지만, 하고 싶은 것은 제법 하면서 살고 있으니 마음만은 부자이다.


나는 인터넷도 잘 활용하고 있어서 아이디가 여러 가지이다. 산행이나 여행을 예약할 때, 블로그에 글을 쓸 때 ‘수선화, 코스모스, 주형, 단비, 겨울기차, 눈꽃열차’ 등의 별명을 쓴다.


'수선화’는 자아도취에 가까운 나르시스의 자존감이 마음에 들었고, 그 고상함이 좋았다. ‘코스모스’는 사춘기 시절 추억이 담긴 꽃이다. 조금은 부족해 보이는 꽃, 가냘프고 어설프지만 볼수록 청초하다. 색깔도 다양해서 무리 지어 피어 있으면 참 예쁘다.


‘주형''단비'는 성경적인 이름이다. '주형'은 '주님의 형상'이라는 뜻이고 '단비'는 '주님의 은혜가 단비처럼 내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주형‘은 필명으로 쓸까 하다가 호로 정해서 쓰고 있다.

겨울기차’와 ‘눈꽃열차’는 내가 기차여행을 좋아해서 붙인 별명이다. 중학교 1학년 겨울 전학서류를 떼려고 처음으로 고향에 내려갈 때 기차를 탔다. 갈 때는 휙휙 지나가는 창밖 풍경을 보며 갔고, 돌아올 때는 옆자리에 앉은 목포 문태고 2학년 오빠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청계천 헌책방에 책을 사러 온다고 해서 함께 둘러보았다. 교복 입은 그 오빠의 가슴 앞 이름표에 눈이 갔었는데도 지금은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목포에서 서울까지 책을 구하러 올 정도면 아마도 그 오빠는 문학 소년이었던 듯하다.


기차에 얽힌 이야기는 또 있다. 초등학교 시절, 서울로 이사 오기 전, 나는 전기도 안 들어오고, 버스도 다니지 않는 촌 시골에 살았다. 우리 집 큰방에는 벽장이 하나 있었는데, 어른들이 일하러 가거나 장에 가서 집에 아무도 없는 날이면 가끔 그 위로 올라가 안에 무엇이 있나 살펴보곤 했다. 벽장문을 열어놓아도 어두컴컴한 그 안에서 나는 진기한 것들을 찾아냈다. 꿀단지. 실타래, 읍내 사진관에서 찍은 아주 오래된 사진 같은 것들이다.


어느 날 나는 그 안에서 노끈으로 묶은 누런 화선지로 된 책을 몇 권 발견했다. 제목은 기억이 나지 않는데, 아마도 아버지 어머니가 읽던 연애소설이 아닌가 싶다. 기억나는 내용은 두 연인이 기차를 타고 긴 여행을 하는데, 간이역 같은 데 내려서 찐한 사랑을 나누는 것이다. 다음 날 또 기차를 타고 가다가 날이 저물면 다른 역에 내려서 또 사랑을 나눈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다른 아이들에 비해 키도 크고 조금 조숙한 편이었다. 막 사춘기에 접어들 무렵, 초등학교 6학년 때쯤이거나 중학교 입학을 앞둔 시점이었는지도 모른다. 온몸이 달구어지면서 나는 숨어서 그 책을 읽고 또 읽었다. 시골에서 책이라고는 교과서가 전부였기에 나는 그 책을 무척 아꼈다. 어른이 되면 나도 그런 사랑을 해보는 것이 로망이었다.


물론 이루지 못하고 결혼했지만, 나는 지금도 기차를 타면 몸에 약간의 열이 오른다. 가슴도 벌렁벌렁 때로는 숨이 멎을 것처럼 헐떡이기도 한다. 기차는 나의 첫사랑이고 설렘이다. 특히 나의 별명 중 하나이기도 한, 하얀 눈이 내리는 겨울에 타는 '눈꽃열차'는 그리운 사람과 만나 막 키스를 하거나 포옹을 하려는 순간처럼 순백의 떨림을 안겨 준다.


그리고 또 하나, 아직 아무 데서도 사용해보지 않은 '그리움'이 있다. 문인화를 그리면서 작품에 낙관을 찍으려고 호와 이름 도장을 만들면서 그때 두인도 함께 새겼다. 내 두인은 '그리움'이다. 글, 그림, 그리움은 하나이다. 그리움이 있어야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릴 수 있다. 내 안에 그리움이 가득 차오를 때 글도 그림도 술술 나온다.


'그리움'은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 아름답다! 나는 내가 하는 모든 일들 속에 그리움이 담기기를 바란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순간, 책을 보고 영화를 보는 시간, 그리고 산행이나 여행을 할 때, 언제나 그리움이 함께 했으면 좋겠다.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 나무 한 그루, 구름 한 점, 해 달 별, 일출과 일몰, 산 정상과 바다, 걷다가 문득 만나는 그 모든 순간에 그리움이 묻어나기를 꿈꾼다. 그래서 어느 날은 살포시 웃기도 하고, 어느 날은 눈시울을 홍건하게 적실 수 있으면 좋겠다.


내 안에 있는 그리움을 담아 매일 글을 쓰고, 매주 그림을 그리고, 산행이나 여행을 한다. 매 달 몇 권의 책을 읽고, 두세 편의 영화를 본다. 특별히 내가 써놓은 글과 직접 찍은 사진을 바탕으로 물감과 붓, 연필이나 펜 등을 사용해서 그림을 그리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깊이 빠져든다.


이번에 그림책 <탄생>을 전자책(유페이퍼)과 종이책(부크크)으로 냈다. 딸아이가 외국에 살고 있어서 출산 때 가보는 게 쉽지 않아 딸을 생각하며, 5월에 태어날 첫 외손주를 기다리며 그리움을 담아서 낸 그림책이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동안 어떤 신비스러운 힘이 내 안을 휘감는 것 같은 잔잔한 전율이 있었다. 내 두인이기도 한 ‘그리움’의 단지에서 꺼내는 보물들이 하나하나 예쁜 그림책이 되어 계속해서 탄생하기를 빌어 본다.



그리움 / 서순오

다른

모든

사람은

페이드 아웃 되고

너만

오롯이

클로즈 업

되는 것

시공의 막을

걷어내고

밝아지는 조명

닿을 듯

닿을 듯

어리는 얼굴

내 눈동자에

눈물방울로

네가 산다

글 그림 그리움
서순오 그림책 <탄생> : 전자책 (유페이퍼), 종이책(부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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