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여행(1) : 아가페정원, 고스락, 달빛소리수목원
♡추억이 서린 익산 여행♡
하루 종일 비가 온다는 소식에 여기저기 산악회 산행지를 살펴만 보고 예약을 하지 않고 망설이고 있었다.
'이번 주에는 수원화성성곽길을 걸어야겠다. 이곳은 비가 와도 우산 쓰고 걷기 좋으니까.'
마음속으로 혼산을 정해놓고 있는데, 예전에 자주 가던 여행스케치에서 문자가 왔다. 특별 할인가로 갈 수 있는 여행지 안내이다. 그렇잖아도 대부분의 여행지가 지자체 후원으로 꽤 저렴한 값으로 갈 수 있는데, 그보다도 더 싼 가격이다. 얼른 들어가 살펴본다.
"비가 와도 걷기 좋은 곳이면 된다. 1주1산은 아니지만 쉬는 것보다는 여행이라도 가는 게 좋다."
그러다가 익산 여행을 가기로 한다.
익산은 추억이 서려있는 곳이다. 초등학교 시절 내가 좋아했던 첫사랑의 그 남자애가 살고 있는 곳이다. 또 초등학교 시절 친구끼리 결혼을 해서 아들딸 낳고 잘 살면서 소와 돼지를 키우는 일을 크게 하는 친구가 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졸업 후 거의 몇 십 년 만에 모두 함께 만나서 그 시절 단짝친구였던 이의 오빠가 고깃집을 해서 그 집에서 맛있는 고기를 구워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었다. 그때 찍은 사진이 두어 장 있어서 책갈피에 끼워 두었는데, 어디로 들어갔는지 안 보인다.
그리고 그 후 나는 초등 동창회에는 안 나가고 있어서 친구들 소식은 잘 못 듣는다. 추억을 되짚어보며 익산여행을 가보기로 한다. 아가페정원, 고스락, 근대문화예술의 거리, 달빛소리수목원, 백제문화 미륵사지 등을 돌아보는 일정이다. 촉촉이 비를 맞고 있는 나무와 꽃들을 보며 천천히 걷는 기쁨도 그 어디에 비할 수 없는 소중한 추억의 페이지를 장식해 주리라 기대를 한다.
여행스케치에서 여행 신청을 하면 친절한 안내가 온다. 여행 전에 한두 번, 여행 하루 전날과 당일에 탑승지와 탑승시간, 탑승차량번호, 여행안내를 문자로 해준다. 또한 탑승지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그날 가이드한테서 10여 분 전에 도착을 알려주는 전화도 온다.
"제가 A4용지 흔들면서 차량 앞에 있을 거예요. 정류장 뒤쪽에 서 계셔요."
산악회와는 다른 특별한 대접을 받는다는 느낌이 든다.
"하긴 산악회는 비영리단체이고, 여행사는 영리 단체이니까 다를 것이다."
그렇지만 실은 산행비보다 여행비가 훨씬 더 저렴하다. 지자체의 지원이 있어서이다. 이러니 자주 가면 좋다.
나는 오전 7시 20분 죽전하행정류장에서 탑승을 한다. 비탓인지 자리가 7자리나 비어있단다. 내 옆자리에 앉으신 여자분이 편하게 가고 싶다며 다른 자리로 이동을 해서 나는 좌석 두 개를 차지하고 앉아서 간다. 가는 길에는 비가 살짝 내리고 있어서 운치가 있다. 그렇지만 나는 늘 그렇듯이 새벽 3시 정도에 잠이 깨서 이것저것 하고 나왔기에 좀 피곤하다. 눈을 붙이니 금방 잠이 든다.
가이드님이 정안알밤휴게소에서 쉬어간다며 안내를 하기에 눈을 뜬다.
가이드님도 날씨 요정이란다. 간혹 비를 몰고 다니는 사람이 두세 명 있으면 못 이길 때도 있지만 대체로 가이드를 하는 날 여행지 날씨가 좋단다.
'나도 날씨 요정인데, 그럼 오늘 비가 안 오겠네!'
창밖은 비가 개었다. 나는 속으로 한 마디 하고 우산 없이 밖으로 나간다. 화장실 들렀다 나오는데 그새 보슬비가 살짝 뿌린다. 그래도 하늘에 구름이 없는 걸 보니 많이 쏟아질 정도는 아니다.
또 눈을 감고 조용히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간다.
'우비도 우산도 여벌옷도 다 챙겼고, 신발도 운동화를 신고 왔으니까 비가 와도 상관없다.'
금세 또 한잠 달게 잔다.
♡아가페정원♡
오전 10시 아가페정원에 도착했다. 개인정원이란다. 이곳에서 어떤 신부님이 살다가 돌아가셨다는데, 지금은 기초수급자 노인무료요양소인 아가페정양원으로 사용하고 있단다. 비가 살짝 내리고 있어서 가지고 온 분홍 우의를 입고 노란 우산도 쓴다. 들어가는 길에 멍석을 깔아놓은 곳도 있고 흙길인 곳도 있는데, 밤새 내린 빗물이 고여 푹푹 밟으면 물이 쑥쑥 올라온다. 그렇지만 신발이 젖을 정도는 아니다.
봉숭아, 맨드라미, 꽃길을 지나 메타쉐콰이어길로 간다. 갈 때는 꽃사진은 찍지 않고 오래된 커다란 밤나무 두 그루와 소나무만 담는다. 꽃은 이따 나올 때 천천히 보면서 찍으면 된다.
메타쉐콰이어길은 하늘로 쭉쭉 뻗은 나무들이 장관이다.
"어찌 저리 키가 클까? 하늘에 닿고 싶어서일까?"
하늘 쪽으로 나무들이 원형을 이룬 모습도 멋스럽다.
빨간색 숲속 한평도서관과 황화코스모스가 길 쪽으로 늘어져 피어있고, 향나무가 줄지어 서 있다. 닭벼슬 같은 빨간 맨드라미가 탐스럽고, 향이 짙은 하얀 옥잠화가 무리 지어 피어서 반겨준다. 빨간 봉숭아가 일부는 꽃을 피우고 일부는 주렁주렁 꽃씨 열매를 매달고 영글어간다.
아가페정원 잔디 이름표, 천사의 날개 등 포토존이 있는 정원을 지난다. 함께 온 이들이 이곳에서 유난히 사진을 많이 찍기에 나도 몇 장 찍어본다. 보랏빛 비비추와 맥문동, 봉숭아, 황화코스모스에 줄무늬 나비와 벌이 날아들어 꽃술에 담긴 꿀을 빨아먹는 모습을 담아보려고 애를 써보지만 금방 날아가 버린다. 깊은 가을에 단풍이 들고 낙엽이 떨어져서 쌓인 모습과 한겨울에 하얀 눈이 쌓인 모습도 꽤나 멋지겠다.
이렇게 개인정원을 가꾸는데 얼마나 큰 수고를 했을까?장성 축령산에 갔을 때 그곳 숲을 가꾸는데 평생을 바쳤다는 분의 이야기를 들었다. 많은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데는 이런 소중한 뜻이 담겨 있다. 고마움을 느낀다.
♡고스락♡
익산 고스락은 장독대 풍경이 아름다운 곳이다. 전통 장과 한식당과 카페가 있는 개인공간이라는데 일반인에게도 공개가 되어서 고풍스런 풍경을 담을 수 있다.
꽤나 넓은 공간인데, 장독대가 아주 많다. 장독대마다 장이 담겨 있는 듯 구수한 냄새가 난다.
우리는 무얼 사지도 않고 먹지도 않고 둘러보기만 하고 왔다. 그런데 이곳에서 발효장으로 만든 한식요리를 직접 맛볼 수 있는 체험여행도 있다면 한 번 참여해보고 싶다.
전망대로 올라가니 전체 장독대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어느 책이나 잡지의 표지를 해도 좋을 만큼 참으로 근사하다.
"인생샷을 남겨야지!"
비가 온 후 날이 개어 하늘이 너무 예쁘다. 한옥과 돌담과 장독대와도 잘 어우러진다. 그 풍경 속으로 들어가 사진을 여러 장 남긴다.
카페 안에 토굴숙성실이 있어서 들어가 보니 장 발효되는 맛있는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점심때가 되어가기에 배가 고프다. 발효장을 사볼까 싶어서 카페로 들어가 보니 생각한 것보다 값이 꽤 나간다. 보통 10만 원대가 넘는다. 구경만 하고 그냥 나온다.
"옛날 시골에 살 때 우리 집 뒤란에도 장독대가 있었고 장을 직접 다 담가 먹었는데!"
그때는 직접 발효한 장들이 그리 소중한 줄도 몰랐다. 햇볕에 장을 삭히느라고 뚜껑을 열어놓았다가 비가 오면 급히 가서 닫고는 했다. 그러고 보니 빗물도 꽤 들어갔던 장들이었는데 그래도 잘 먹었다. 그때는 공해가 적을 때라서 염려는 없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아마도 산성비가 내려서 발효장에 비를 맞힌다면 그 장을 모두 버려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엄마는 일을 하러 나가고, 할머니와 함께 메주를 쑤고 빻고 네모나게 만들어 천장에 매달고 장독대에 넣어서 고추장, 된장, 간장을 만들던 일, 고스락 장독대가 불러다 준 아련한 추억이다. 지금은 돌아가신 할머니가 아주 많이 보고 싶다.
♡달빛소리수목원♡
달빛소리수목원은 개인 수목원인데, 입장료가 3천 원이다.
달빛소리수목원 입구 담장에 하얀 꽃 으아리가 넝쿨을 이루고 화사하게 피어있다.
안으로 들어서니 커다란 황순원의 소나기나무가 서 있다. 아주 커다란 느티나무 고목인데 수령이 500년이나 되었다고 한다. 달빛소리수목원의 마스코트 나무란다. 아래쪽 밑동이 파여서 몇 사람이 들어가 앉아서 피를 피할 수 있는 나무이다. 황순원의 <소나기>에 나오는 소년소녀를 생각하며 다들 거기 들어가 앉아서 기념사진을 남긴다.
멍석이 깔린 꽃길을 걸어 달빛소리 카페는 건물만 쳐다보고 다음을 기약한다. 애기동백꽃길 돌계단을 올라가니 달빛소리 카페 앞마당이다. 멋진 고목들이 있고 망사 모양의 철재 데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어서 분위기가 꽤나 근사하다. 그곳에 달빛소리수목원 주인 분이 기다리고 있다가 직접 해설을 해주신다. 향수의 재료가 된다는 향이 짙은 꽃나무와 오래된 수령의 나무들 설명을 아주 자세히 해주신다. 그런데 들을 때는 조금 알 것 같은데 돌아서면 그 나무가 그 나무 같고, 그 꽃이 그 꽃 같다. 애정을 가지고 직접 키워본 사람이 아니라면 나무와 꽃 이름 알아두는 건 그리 쉽지 않은 듯하다.
나무 이름은 애기동백, 청괴불나무, 산사나무, 당단풍나무, 금목서, 은목서, 산수유, 향나무, 계수나무, 꽃 이름은 목화와 핑크뮬리, 맨드라미 이외에는 거의 기억이 안 난다. 아주 희귀한 꽃도 몇 개 알려주셨는데 집에 와서 생각해 보니 모르겠다. 그때 핸드폰에라도 기록을 해두는 건데 아쉽기만 하다. (※그래서 AI에게 꽃 사진을 보여주고 물어보니 꽃 비교뿐만 아니라 특징까지도 자세히 알려준다. 참 편리한 세상이다.)
나무를 심어 만든 미로길을 걸어 커다란 거울공 앞에서 내 모습을 비춰보며 사진에 담는다. 거울공에 비친 하늘 구름이 그림책 표지라도 된 듯 신기방기하다. 마침 내가 그린 그림책 <탄생> 표지와도 닮아 있어서 그 위에 한 번 앉아보면 좋겠다 생각을 해보지만 높고 미끄러워서 올라갈 수도 없겠다. 이곳에서 시간을 한참 보내고 주인 분을 따라가며 설명을 듣는다. 나무로 지은 정자, 핑크뮬리, 목화밭 등을 지나간다. 핑크뮬리는 아직 물들기 전이고, 목화는 꽃송이들이 아직 남아있고 몇 군데는 솜이 터져 나온 곳도 있다.
"가장 미운 사람 누군가요?"
갑자기 주인 분이 질문을 하며 멈춰 선다.
"이 꽃잎을 하나씩 따서 가장 미운 사람에게 가져다주세요."
가리키는 꽃잎을 보니 하트 모양이다. 계수나무란다.
나도 하트가 가장 예쁜 것으로 한 잎 딴다. 미운 사람은 없고 가장 예쁜 울 외손녀 주어야겠다.
설명을 듣느라 사진도 못 찍어서 나오면서 아무 데서나 한 장 찍는다. 커다란 고목은 황순원의 소나기나무에서 찍었으니까 괜찮다.
"예쁜 꽃밭에도 들어가 한 장씩 남겼으면 좋았으리라."
그렇지만 이미 늦었다. 나무와 꽃을 배우느라 그리 된 것이니 위안을 해본다.
"배우는 것도 좋지만 내게는 사진도 소중한데!"
주인 분이 얼마나 많은 애정을 가지고 나무와 꽃을 가꾸었는지 달빛소리수목원을 가능하면 아주 자세히 이야기해주고 싶으셨던 것이다.
"이렇게나 넓은 공간을 개인이 가꾼다는 일은 참 대단한 일이다!"
다들 이야기를 한다. 오늘 돌아본 개인 공간들, 아가페정원, 고스락, 달빛소리수목원 등 모두에 해당한 것이기도 하다.
몇 년 전에 귀촌을 해볼까 하여 지리산 지역에 일터를 얻어 3개월, 1개월 살아본 적이 있다. 그런데, 시골에 사는 일은 자그만 공간이라도 있어서 무얼 심어 보면 풀과의 전쟁은 조금도 쉴 틈을 주지 않는다. 사무실에 앉아서 하는 일이 직업이라도 쉬는 날은 그렇다.
그런데 이렇게나 넓은 공간을 어찌 관리할 수 있으랴! 그저 대단하다고 감탄할 수밖에 없다. 그것도 많은 사람이 와서 보고 배울 수 있는 공간이 되려면 그만큼 많은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소중한 개인 공간들을 여행하며 감사한 마음을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