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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근대 문화와 백제 문화를 돌아보는 시간

익산여행(2) : 익산근대역사관, 미륵사지, 국립익산박물관

by 서순오

♡익산문화예술의 거리, 익산근대역사관♡


버스를 타고 익산문화예술의 거리로 가는데 하늘이 넘 예쁘다. 파란 하늘에 하얀 양털구름이 퍼져서 뽀글뽀글 무늬를 이루고 있는 것이 영낙없이 한 폭의 명품 그림이다. 요즘 이우환 화백의 고액 그림이 정치계에서 뇌물수수청탁에 관한 일로 언론에서 자주 오르내리는데, 현대화나 추상화에 문외한인 나로서는 전혀 뜻을 잘 알 수 없는 그림이다. 그에 비한다면 자연이 그리는 그림은 이해가 쉬울 뿐만 아니라 한순간에 지나가는 실시간 그림이라서 그 값을 따지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저 순간을 포착해 사진에 담아서 남겨볼 뿐이다. 요즘 문인화를 그리고 있는 나로서는 기회가 된다면 찍어놓은 사진을 바탕으로 수묵화를 그려볼 수는 있겠다.


익산문화예술의 거리에 도착하니 익산역이 보인다. 친구들을 만나러 몇 번 왔던 곳인데 전혀 낯설다.

"이곳 어딘가에서 점심식사도 했던 것 같은데!"

기억은 있는데, 건물들이 새롭다. 그때처럼 익산역으로 들어가 거리로 나와 본다면 방향감각이 생겨서 어디가 어딘지 분간을 할 수 있으려나 싶다.


배가 고파 식당부터 찾는다. 가이드님이 한식, 중식 잘한다는 곳 두 군데를 안내해 주기에 한식당으로 간다. <백여사 식당>이다. 2인 이상 주문 가능이다. 혼자 오신 여산우님 한 분과 같이 들어간다.

"둘이 같이 먹어요."

우리가 첫 손님이다. 안쪽으로 자리를 잡고 앉는다.

"백반 2개요."


그런데 우리 일행 10여 명이 우르르 몰려 들어와 식당 입구부터 자리를 잡고 앉는다.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음식이 나온다. 입맛을 다시고 있는데, 서빙하는 남자분이 출입구 쪽에 앉은 이들부터 음식을 가져다준다. 거의 네다섯 테이블까지 갖다 주자 우리가 한 마디 한다.

"우리가 제일 먼저 왔어요. 옆 테이블도 일찍 왔고요, 배가 고프시대요."

그러자 우리 옆자리에 음식을 놓아주고 우리도 갖다 준다. 뚝배기에 수북이 올라온 계란찜이 먹음직스럽다. 고슬고슬한 밥과 된장찌개에 반찬이 총 13가지나 된다. 고등어조림, 오이무침, 멸치볶음, 고구마순, 콩나물, 버섯, 배추김치, 파김치, 메추리알장조림, 깻잎나물, 사과당근 샐러드, 무엇 하나 맛없는 게 없다. 음식이 깔끔하다. 밥을 거의 다 먹어갈 즈음 마지막으로 구수한 누룽지 숭늉이 한 대접 나온다. 공깃밥을 더 안 시켜도 누룽지만으로도 반 공기는 넉넉하게 더 먹은 셈이다.


"밥값이 너무 싼 거 아니에요? 한 3천 원 정도 더 받아도 될 듯요."

그렇지만 서빙하는 이가 고개를 흔든다.

"천 원만 더 비싸도 손님 끊겨요."

"지방이라서 수도권하곤 다르구나!"

백반 푸짐한 상차림에 맛있게 먹고 고마운 마음에 내가 건의를 해보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단다.


참, 식당 안에 휠체어에 앉아 계신 어르신이 한 분 있었다. 짐작해보건대, 아마도 그분은 식당 주인의 시아버지이거나 친정아버지이거나 일하시는 분의 아버지이거나 할 것 같다. 이리저리 혼자서 휠체어를 밀고 다니시는데, 여자분이 주방에서 나와서 위층으로 모시고 간다. 식당을 운영하면서 이프신 어르신을 모시고 사는 일은 쉽지 않을 듯하다. 그것도 손님이 몰리는 바쁜 시간에는 더욱 그러하리라. 식구 누구라도 나와서 함께 거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식당에서 나와 도로 건너편 시장이라는 곳으로 가본다. 혹시나 살 것이 있을까 싶어서이다. 그런데 시장 점포들이 몇 군데를 빼놓고는 대부분 문을 닫았다. 재래시장처럼 늘어놓고 파는 노점도 없다.


"익산근대역사관이나 가 보죠."

다시 익산문화예술의 거리로 건너온다. 거리가 한산하다. 작고 볼거리가 별로 없다. 이주일과 하춘화가 공연을 했다는 과거 문화예술공연장 삼남극장에서 발걸음을 멈춘다. 이리역 폭파사건으로 지붕이 주저앉기도 했다는데 지금은 복합문화예술공간으로 거듭났단다. 치키로드 3호점이 삼남극장 안에 있다고 한다.

익산아트센터를 지나간다. 몇 사람이 익산아트센터로 들어간다. 그곳을 서성이면서 익산근대역사관을 찾는다. 그때 가이드님이 오신다.

"익산근대역사관 어디 있어요?"

"조금 더 가면 왼쪽에 있어요. 근데 12시부터 1시까지 점심시간이에요."

"알아요. 1시 다 되었어요."


익산근대역사관은 앞마당에 온통 의자가 가득 놓여있다. 오후에 공연이 있단다. 고풍스러운 건물 전경을 밖에서 찍고 싶은데 그 앞에다 무대 설치를 하는 바람에 다 가려져서 겨우 이름표 부분 위쪽만 담을 수 있다. 가이드님도 우릴 따라와서 익산근대역사관 닫힌 문 앞에 선다.

"아직 10분 전이에요."

그때 안에서 어떤 여자분이 나온다.

"혹시 조금 미리 들어갈 수 있나요? 저희가 시간이 별로 없어서요. 1시 20분까지 버스에 탑승해야 하거든요."

"안에 가서 물어보고 올게요."

곧 문이 열리고 아이보리색 원피스를 입은 예쁜 여자분이 우릴 맞아준다.

"한 10여 분 정도만 해설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좋단다.


친절한 해설사 덕분에 이리와 익산에 대해 제대로 된 공부를 한다. 지나간 역사는 참 재미있고 유익하다. 신익희 선생님의 <비 내리는 호남선>과 이름을 꼭 알아두어야 한다는 이리의 독립운동가 문용기 열사의 태극기(※문용기 열사는 오른손으로 태극기를 흔들다가 일본인 순사에 의해 오른손이 잘리자 왼손으로 태극기를 흔들고 왼손이 잘리자 입으로 태극기를 흔들었다고 한다), 이곳이 은행자리여서 남겨두었다는 낡은 철 금고문, 오래된 건물임을 알려주는 천장의 서까래, 최고의 수재들이 모여들어 공부했다는 이리농림(※ 박정희 대통령도 이 학교에 다니고 싶어서 지원을 했지만 떨어졌다고 한다) 등 그냥 지나치고 말았을 것들을 눈여겨보며 새롭게 알게 된다.


가이드님과 나와 함께 한 여자분은 가고 나는 급히 2층 전시실로 올라가 쓰윽 돌아보고 사진을 남긴다. 자세히 볼 시간은 없다.


건물 밖으로 나오니 여자분이 천천히 가고 있다. 우리가 타고 길 버스는 아직 오지 않았다. 이곳 도로에 오래 주차할 수가 없어서 가이드님이 전화를 해야 버스가 온단다. 1시 20분 약속 시간보다 한 5분 정도 더 지났는 데도 다들 모이지를 않는다. 가이드님은 전화를 하기 바쁘다.

"어디 계세요?"

길을 헤맨 분이 몇 분 있는 모양이다. 결국 버스가 와서 타고 한 200여 m 정도 가서 멈춰 선다. 길을 잃었다는 네 사람이 올라온다.

'사람도 별로 없는 뻔한 길인데도 길을 잃는 사람도 있구나! 아무래도 길치인 거야.'

나는 신기해서 속으로 한 마디 해본다.

가이드님이 참 친절하고 마음이 너그럽다.

"제가 시간에 안 오면 택시 타고 다음 장소로 와야 한다고 미리 말씀을 안 드려서 이번에는 기다린 거구요. 다음 장소부터는 꼭 시간을 맞춰 주세요. 해설사와 약속시간을 잡아 놓아서 늦으면 안 돼요."

그렇다. 산악회도 여행사도 늦으면 버스가 출발해 버린다. 이것이 개인이 아니고 단체로 움직일 때 겪는 애로라면 애로일 것이다. 모두 함께 즐거운 여행이 되려면 약속시간을 잘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버스로 이동하면서 보는 예쁜 하늘 구름
익산문화예술의거리 이주일과 하춘화가 공연했다는 삼남극장
백여사식당에서 백반으로 점심식사
익산근대역사관
해설을 들으며 익산근대역사관 돌아보기
익산근대역사관에서
은행 자리였음을 알려주는 오래된 철 금고문과 천정 서까래 모습
꼭 기억해야 할 이름, 익산의 독립운동가 문용기 열사
익산근대역사관 2층 돌아보기


♡백제역사유적지 미륵사지, 국립익산박물관♡


나는 산행이나 여행을 할 때 절은 잘 안 보는 사람이다. 지금 내가 기독교신앙을 가지고 있어서 굳이 불교 유적을 들어가서 자세히 볼 필요는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절에는 불상이 있고 탑이 있다. 불상을 숭배하는 것은 기독교적 시각에서 보면 우상숭배이고, 또 중들이 죽었을 때 나온다는 사리를 보관하는 곳이 바로 탑이다. 궁금하지도 않고 그걸 믿지도 않기 때문에 절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다. 물론 지나가는 길이면 안 들어갈 수는 없기에 그냥 지나긴다. 절 안에 있는 오래된 나무나 꽃들은 살펴보고 사진에 담기도 한다.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내가 절에 대해서 더 관심을 두지 않으려 하는 데는 사춘기 시절의 아픈 추억이 있다. 여중학교 1학년 말에 엄마가 아버지와 심하게 싸운 뒤 온다 간다는 말도 없이 집을 나가버렸고 소식 두절 상태로 1년이나 지내야 했다. 나는 그때 3반 반장이었는데, 소풍 때 반장이 선생님 도시락을 싸 가던 시절이었는데, 그것은커녕 내 도시락도 제대로 싸 가지 못했다. 반장이 되면 1년을 할 수 있었는 데도 1학기가 끝나고 2학기에 나는 자괴감이 들어 스스로 반장직을 내려놓았다.

여중 1학년 말에 엄마가 발신인이 없는 편지를 써서 큰딸인 나에게 보낸 적이 있었는데, 우표에 찍힌 소인을 보고 아버지가 엄마를 찾아냈다. 엄마는 신림동 비구니승들이 사는 절에서 밥을 해주는 보살로 지내고 있었다. 엄마에게는 나를 포함해서 아이들이 넷이나 있었고, 그중에는 아직 젖을 떼지 못한 막내 어린 남자아기도 있었다. 그런데도 엄마도 절에서도 1년 동안이나 우리에게 아무런 소식을 주지 않았다. 다행히 우리 집에는 할머니가 계셔서 그나마 그럭저럭 지낼 수 있었다.


엄마를 찾으면서 우리 집은 서울로 이사를 했다. 그 후에 나는 엄마를 따라 그 절에 몇 번 가본 적은 있지만, 불상에 절은 하고 싶지 않아서 안 했다. 아니다. 나는 서울로 이사 온 그 주간에 옆집 아주머니를 따라 교회에 나가게 되었기에 그 영향이 있었을 수도 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여러 번 그 절에 가본 적이 있다. 엄마랑 둘이서 밤늦게 달을 보면서 머리에 뭔가를 이고 산을 올라갔던 기억이 있는 걸 보면 아마도 엄마가 떡이나 뭐 먹을 것을 해가지고 절에 갔던 것 같다. 나는 그때 절을 특별히 싫어하지도 않았지만 좋아하지도 않았다. 그냥 엄마가 집을 나가 1년 동안 지냈던 곳이 궁금했었고, 그저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이라는 백제문화유적지 익산 미륵사지는 이번 여행의 마지막 코스로 들어가 있기에 함께 둘러보았다. 꽤 시간이 지나긴 했지만 이전에 한 번 여고 친구들과 와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낯설다. 그새 이곳이 조금 달라진 것일 수도 있다. 그때는 미륵사지 터에 석탑이 없었을까? 석탑을 본 기억이 없다. 아님 대충대총 보아서 그랬을까? 익산역사박물관은 들어가 본 기억이 있다.


아무튼, 서동 왕자 백제 30대 무왕과 관련이 있다는 미륵사지 터에 도착하니 아담한 체구에 작은 얼굴을 가진 귀여운 중년 여자 해설사가 기다리고 있다. 잔디밭을 지나 호수가 있고 뒤쪽으로 두 개의 석탑이 보이는 곳으로 안내한다. 서탑, 동탑이다. 왼쪽에 있는 서탑은 반만 보존된 상태로 서 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유물은 다 가져가고 서탑 무너진 부분 일부를 시멘트로 메꾸어놓았단다. 그래서 그 부분을 해체하느라 돈이 무지하게 많이 들어갔단다. 서탑 남아있는 부분이 손상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사람이 손으로 하나하나 시멘트를 떼어내느라고 그랬다는 것이다. 오른쪽 동탑은 목탑을 보고 석탑을 복원한 것이란다. 뒤에 보이는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 미륵산이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돌산인데 그곳에서 돌을 떠다가 만들었단다.


일단 큰 그림으로 호수와 두 개의 석탑을 담아서 사진을 찍는다. 나도 그 배경 앞에 서서 인증숏을 찍는다. 탑은 사리를 넣기 위한 것이고, 호수는 극락을 상징하는 장소란다.


이제 국립익산물관으로 들어간다. 기다란 출입구가 인상적이다. 이 출입구가 독특해서 이전에 와 봤다는 기억이 난다.


해설사는 우리를 데리고 로비에서 목조탑을 보여준다. 석탑은 목탑을 보고 복원했는데 탑 끝부분이 살짝 위로 들려있는 모습까지 살려냈다고 한다.


안으로 들어가서 익산 왕궁터를 입체적으로 알기 쉽게 표시해 놓은 지도 비슷한 전시물을 본다. 익산에 왕궁이 있었다는 것은 토성, 쌍릉, 절 등 3가지가 있어서 알 수 있단다.


이어서 둘러보다가 발걸음을 멈추고 옛날 화장실 설명을 해준다. 기다란 나무 같은 것들인데, 안이 파여 있는 것들도 있다. 발굴 후에도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몰랐다는데, 과학적으로 검사를 해서 흙 성분을 분석해 보니 유충이 많이 나와서 그곳이 화장실인 줄 알았다고 한다.


서탑과 서탑에서 나왔다는 사리함과 사리, 금판 불경, 기와에 대해서는 해설사가 감탄에 감탄을 하며 아주 자세하게 설명을 해준다.

"일본인들이 다 훔쳐간 줄 알았는데, 글쎄, 저 서탑 아래 부분을 열어보니 거기서 이 진귀한 사리함이 나왔다니까요."

사리함과 사리, 그리고 그곳에 함께 있었다는 금판에 기록한 불경이 전시되어 있다.


'격식 있는 건물의 지붕에 얹는다'는 아름다운 기와인 치미와 유약을 발라서 햇빛이 비치면 반짝인다는 기와 문양도 살펴본다. 치미는 조각들을 모아서 복원한 모양이라는데 높이가 자그마치 143cm에 달한단다. 이렇게 큰 기와를 얹으려면 건물이 아주 크고 웅장했을 것이다.


해설사와 함께 여행 온 일행들이 여러 개의 사리함을 보고 있을 때, 나는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겨가며 그림과 토기 등을 살펴본다. 해설사의 시간은 30여 분이었지만, 우리가 관람해야 할 주어진 시간이 곧 다 되어가기 때문이다.


고분군 전시를 지나가니 마음에 드는 그림 한 장이 눈에 띈다. 익산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다. '1123 년 송나라 사신 서궁이 고려에 방문해 저술한 책'이라는 <선화봉사고려도경> 중 36권에 나오는 '군산도'란다..

"군산도에 이르러 정박하였다. 열두 봉우리가 빙 둘러 있는 모습이 마치 성과 같았다."

사진에 적혀있는 설명과 글귀이다. 아래에는 선유도, 무산십이봉, 배가 이동하는 길이 표시된 옛 지도와 배에 싣고 다닐 때 포장한 토기 모습이 전시되어 있다.


곧 토기 전시관을 둘러본다. '역사의 지문 그릇'이라 쓰여 있다. 백제 무왕 시대 왕궁에서 사람들이 실생활에서 사용하던 그릇들인 듯하다.


버스 탑승 10분 전이다. 화장실 들렀다 가야 한다. 귀경하려면 시간이 꽤나 걸리기 때문이다. 일행들과 마주친다. 버스에 타니 가이드님이 안내하기를, 휴게소 안 들르고 죽전까지 2시간 40여 분을 부지런히 달릴 거란다. 화장실 갔다 오길 잘했다.


익산 미륵사지는 절터라서 내가 좋아하는 곳은 아니지만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관람하니 유익했다는 생각이다. 비도 안 오고 두루 즐겁게 여러 곳을 볼 수 있어서 대만족이다.

익산 미륵사지
미륵산과 서탑, 동탑, 호수가 보이는 익산 미륵사지
국립익산박물관
익산미륵사지 서탑
사리함
익산 왕궁터를 나타내는 입체지도
미륵사지 모형(서탑, 목탑, 동탑)
품격있는 기와, 치미
치미 앞에서
익산 입점리 고분군
<선화봉사고려도경> 36권 '군산도'
익산 옛 지도와 토기를 배로 운반할 때 포장한 모습
황금신발과 금으로 만든 장신구
역사의 지문 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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