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가 라만차의 기사들입니다
장르를 불문하고 좋은 작품에는 여러 가지 기준이 있지만 개인적으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할 수 있는 작품'이 시대를 불문하고 '명작'이라 불린다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주 오랜 세월을 거쳐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고전'은 매번 새로운 해석과 변형으로 지금도 그 힘이 발현되고 있는 것이다.
이탈로 칼비노는 <왜 고전을 읽는가>에서 "고전이란, 우리가 처음 읽을 때조차 이전에 읽은 것 같은, '다시 읽는' 느낌을 주는 책이다."라고 고전을 정의한다.
아마도 '돈키호테'가 어떤 인물이며 현대에서는 어떤 의미로 통용되고 있는지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 역시도 그저 '기사 소설을 탐독하다가 미쳐버린 시골의 노인이 자신 스스로를 돈키호테라고 부르며 떠나는 여정을 담은 이야기' 정도로 인식을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왜 이야기가 이토록 지금까지 명작이라고 불리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답할 수 없었다.
적어도 이 공연을 접하기 전까지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원작으로 하는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는 작가 세르반테스가 지하 감옥으로 들어가 스스로 돈키호테를 연기하면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을 나타낸다. 이 과정에서 감옥의 죄수들은 각자 역할을 부여받게 되고 점점 그 이야기에 빠져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하나의 커다란 줄기로 정리해 보자면 이 극은 돈키호테와 세르반테스가 떠나는 '추구'의 여정이다. 이러한 구조에서 주인공은 이동 과정에서 욕망의 대상을 찾아 헤매고 거기서 경험한 사건들을 교훈으로써 체화시킨다. 그리하여 교훈에 따라 마지막에 찾고자 했던 대상, 근본적으로 찾으려 했던 것에 대한 깨달음을 얻는 구조를 보편적으로 보여준다.
그렇다면 과연 돈키호테의 여정에서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의미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크게 세 가지 분류로 생각해보고자 한다.
'인간'과 '사람'은 여러 가지 차이점을 가지고 있지만 가장 큰 차이는 아마 누군가가 불러주는 ‘이름’에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맨 오브 라만차>는 꿈과 인생에 대해 많은 결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가장 큰 축에서 본다면 서로를 '다른 이름'으로 불러주는 돈키호테와 알돈자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태어나 사회 안으로 편입되면서 고유의 사물처럼 ‘이름’을 부여받는다. 부모의 성을 물려받고 특정한 이름으로 호명될 때 비로소 사회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극의 가장 중요한 흐름을 가지고 있는 두 주인공 돈키호테와 알돈자는 두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평범한 알론조 키하나와 무적의 기사 돈키호테, 창녀 알돈자와 고귀한 여인 둘시네아.
두 사람은 불리는 이름에 따라 완전히 다른 삶을 체험하게 된다. 현실에서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다른 이름으로 불러주는 것이 얼마나 다른 삶을 영위하게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알돈자의 대사로 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이 나를 불러준 뒤로 모든 게 달라졌는걸요."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미지의 세계로 편입된 소녀 ‘치히로’가 목욕탕에서 일하게 되면서 처음 마주하게 되는 사건은 이름을 빼앗기고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는 일이다. 그리고 하쿠는 센에게 거듭 ‘네 진짜 이름을 잊지 마’라고 당부한다. 영화 말미에도 하쿠 또한 진짜 이름을 되찾았을 때 비로소 본모습을 찾게 된다.
이러한 이름에 대한 중요성은 알돈자와 돈키호테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부모의 성도 모르고 그저 몸종의 이름으로 불리는 ‘알돈자’와 평범한 시골의 노인인 ‘알론조 키하나’는 ‘돈키호테’와 ‘둘시네아’로 서로를 부를 때 비로소 다른 삶을 경험하게 된다.
평생 삶을 증오하며 살았던 알돈자는, 다른 이름을 부여받고서야 ‘둘시네아’로서 자신의 인생을 바라보게 된다. 돈키호테 또한 스스로 거울 앞에서 ‘알론조 키하나’의 모습을 고백하고 무너지지만 알돈자가 그를 ‘돈키호테’라고 불렀을 때 비로소 존재의 의미를 다시금 깨닫게 된다.
이름이 중요한 이유는 내가 나를 부를 때 보다 상대가 나를 무엇으로 불러주는가이다. 누군가 나를 존귀하게 호명하였을 때, 비로소 관계 속에서 ‘나’의 존재의 의미가 발현된다.
우리 모두의 마음 한편에는 알돈자가 살고 있다. 내 삶은 비참하고 세상은 지옥 같다는 열등감과 절망감에 갇혀있는 그런 자아 말이다. 그런 자아를 구제해 줄 수 있는 구원의 손길은 특별하지 않다. 진심을 다해 누군가를 고귀한 이름으로 그저 불러주는 것만으로도 그의 인생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와 동시에 ‘우리 모두는 라만차의 기사’이기도 하다. 그 말인즉슨, 타인의 마음에 거하고 있는 절망과 우울에게 손 내밀어줌으로써 그를 구제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그리스인 조르바>의 한 구절을 인용하려 한다.
"자신을 구하는 길은 남을 구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남을 구하려고 마음을 쓰다 보면 결국 자신을 더 좋은 방법으로 이끌게 된다."
타인을 구하는 일, 그것은 결국 나 자신을 구원하는 일이기도 하다.
얼핏 보면 허무맹랑한 소리만 하는 것 같은 돈키호테라는 인물이 왜 희망의 메시지가 될 수 있는 것인가. 극 중 세르반테스의 대사로 이 또한 답변할 수 있을 것이다.
"왜 죽었는지가 아니라. 왜,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대한 의문이오."
이성적인 판단과 현실적인 감각만이 최선의 가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보편화되어 가는 현대사회는 각박하고 황량하기만 하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당연한 하나의 절차로 여긴다.
그래서일까, 사회의 낡은 관습에 맞서 이를 철퇴하는 사람들, 혹은 그에 맞서는 사람들을 마냥 긍정적인 시선으로 보지 않는 일을 발견한 경험이 모두 있으리라 생각한다.
저렇게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저런다고 세상이 달라질까. 혹은, 저렇게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게 살아서 되려나, 너 하나 그런다고 사회가 바뀌냐, 등의 대사가 익숙하지 않은가.
가끔은 영화나 소설 속의 주인공이 미련할 정도로 선을 추구하며 스스로 고생길을 자초할 때면 "그냥 눈 한번 딱 감고 모르는 척 하지."라는 마음이 들 때도 없잖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마음 한 편의 '일말의 양심'은 알고 있다. '정의'와 '진실' 같은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는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초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현실적으로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어렴풋이 인지하고는 있지만 그래도 누군가는 끝까지 지켜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가치들이 부유하고 있다. 그것이 선을 표방하든 악을 도모하든, 우리는 일련의 가치를 믿고 따르며 자신만의 신념을 만들어간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현실에서 접하는 이야기뿐만 아니라 매체와 텍스트를 통해 접하는 서사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우리는 자주 '내가 아는 세상이 전부'라는 착각에 쉽게 빠지곤 한다. 내가 생각하는 대로 타인의 의견을 재단하고 때로는 무시하는 태도를 가히 돈키호테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현실을 제대로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나 스스로 조차도 사실은 굉장히 편협한 세계에 갇혀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비록 돈키호테는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지 못한 채 환상 속에서만 사는 인물로 보이지만 오히려 그 모습을 통해 현실에 너무 집착해 자기 내면의 정신적 현실을 무시하는 것이 문제는 아닌지 되묻게 된다.
우리 모두에게는 각자에게 주어진 길이 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운명의 길을 그저 묵묵히 걸어가는 것이다. 정의와 사랑, 진실과 같은 가치에서 이기고 짐은 사실 크게 중요하지 않다.
우리 모두가 같은 생각과 같은 모습을 지닌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안다. 이와 같이 우리에게 주어진 길도 모두 다르다. 나에게 맡겨진 일, 내가 마땅히 세상에서 해야 할 일과 발현해야 할 가치는 모두 다르다.
획일화된 삶만이 성공적인 삶인가? 그리고 그것이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는가?라고 묻는다면 누구도 쉽게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닿을 수 없는 곳일지라도, 저 별을 향해 힘껏 팔을 뻗는 일.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각자의 별들은 모두의 가슴 한편에 있는 꿈과 이상이다. 그리고 지금도 이 세상에서 살아 숨 쉬며 내일을 꿈꾸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인생은 해석이다. 내가 무슨 경험을 하고 어떤 일을 하더라도 사실 세상이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내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이다.
내가 지금 걷고 있는 가시밭길이 훗날의 영광의 대로를 향한 길인지 혹은 지금 꽃길처럼 보이는 길이 실은 절망으로 가는 길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리고 인간은 사실 그 일들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다만 '운명'이라고 명명할 뿐이다.
인생은 장기전이기에 거시적 해석과 관점이 오늘의 나의 삶을 바꿀 수 있는 힘을 제공해 줄 수 있으리라, 노년의 끝에서 그 진리를 깨달은 알론조 키하나는 그저 하루하루 새 인생을 사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작가 세르반테스가 말하고자 했던 것 : "무대 위의 감정과 낭만"
처음 지하 감옥에 들어왔을 때만 하더라도 세르반테스는 자신의 이야기에 대해 그다지 확신이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러나 죄수들과 이야기에 맞추어 즉흥적으로 이야기를 끝내고 지하 감옥을 나설 때 단단해진 눈빛과 목소리는 처음과는 확연히 다름을 알 수 있다.
무대에는 특별한 낭만 같은 것이 존재한다. 심리적 갈등은 무대의 낭만을 통해 해소된다. 스스로가 가지고 있던 고민과 갈등은 혼자 번뇌하였을 때는 별다른 뾰족한 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무작정 현실에서 몸으로 부딪혀 경험하기에는 피를 흘려야 하거나 응당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이럴 때에 가장 좋은 방법은 간접적 체험이다. 서사가 힘을 가지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우리는 이야기라는 가상의 세계에 접속할 때 피를 흘리지 않고 간접적으로 다른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
작가 세르반테스 또한 스스로가 가지고 있던 고민을 돈키호테의 여정을 통해 체험했을 것이다. 지하 감옥에서 만들어진 작은 무대, 그 무대 위에서는 더 이상 죄수의 신분으로 잡혀온 작가 세르반테스는 없다.
가상의 이야기 속에서는 다소 무모할지라도 무엇이든지 박차고 나갈 수 있는 라만차라는 공간과 무적의 기사 돈키호테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그 여정을 마쳤을 때야 비로소 세르반테스 스스로도 다시 나아갈 용기와 확신을 얻었을 것이다.
예술이 가지는 힘은 여기에 있다. 이야기를 통해 살아보지 않은 삶을 경험해 보는 일. 우리는 창작가 그려놓은 무한한 세계에 접속함으로써 그 시간만큼은 온전히 타인의 삶을 살아 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그리고 그 경험이 일상의 피로에서 지치고 묵힌 감정들을 정화해 줄 수 있는 힘이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것이 예술의 궁극적인 역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세상이 미쳐 돌아갈 때 과연 누구를 미치광이라 부를 수 있겠소?"
세르반테스는 우리에게 묻고 있다. 현실에 안주한 채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변화하는 것은 없을 것이라고. 비록 지금은 아무 변화가 없어 보여도 누군가는 정의와 이상을 품고 몸을 내던졌던 숱한 일들은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돈키호테들 덕분에 이뤄낸 가치들이 있다고 어렴풋이 알고 있다.
그리고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 꿈을 찾아갈 관객들에게 세르반테스는 응원과 희망의 메시지를 한마디로 전한다.
"우리 모두가, 라만차의 기사들입니다."
또 다른 재판의 변론을 위해 지하 감옥을 나서는 세르반테스는 우리에게 묻고 있다. 이 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당신은 라만차의 기사로서 세상을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그저 지하 감옥에서 머물고 있을 것인가. 선택의 몫은 우리의 손에 고스란히 쥐어져 있다.
비록 참혹한 현실 속에 있다고 해도, 정의를 위해 싸우고 사랑을 믿고 따르며, 타인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줄 수 있다면, 우리가 가는 길 또한 충분히 영광스럽고 고귀한 여정이 될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지하 감옥을 나서는 세르반테스의 눈빛에서 이러한 질문을 받은 기분이 들었다.
'당신이 쫓고 있는 꿈은 무엇인가, 어디에 있는가.'
그렇게 무대를 말없이 바라보면 극의 마지막 넘버인 <Impossible dream>을 모두가 부르며 지하 감옥의 문이 열리고 빛이 들어온다.
어딘가에 있을 각자의 꿈과 이상이 모인다면 세상은 조금 더 반짝일 수 있을 것이라. 실낱 같은 희망일지라도 다시 한번 자리에서 일어날 용기와 힘을 실어주며.
이 세상 모든 라만차의 기사들에게, 돈키호테 이야기는 여전히 우리 곁에 살아 숨 쉬며 오늘도 희망을 노래한다.
* CAST : 조승우/ 김지현/ 정원영/ 서영주
* 충무아트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