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린다. 궁금해서 알아봤다. 이곳 11월의 평균날씨가 어떠한지. 1년 평균 일조량이 1500에서 1600시간. 한국의 2300시간에 비해 많이 부족하다. 특히 늦가을과 겨울에는 비와 눈, 안개가 잦다. 북쪽의 찬 공기가 내려와서 대륙의 더운 공기와 만나면서 비구름이 잦다. 일주일 이상 해를 구경하지 못했다. 한국의 눈부신 가을 하늘이 그립다. 내가 살던 곳의 소중함은 고향을 떠나봐야 안다는 말을 실감한다. 뚜렷한 4계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진정 축복이다. 곡식과 과일을 무르익게 만드는 그 따가운 햇살이 이렇게나 그리울 수가 있을까.
우산을 쓴 사람이 안 보인다
이곳 사람들은 웬만한 비에는 우산을 쓰지 않는다. 비가 많이 내리지도 않는다. 이슬비 정도의 비가 일주일 내내 내리다 말다를 반복한다. 대신 모자를 많이 쓴다. 나도 덕분에 모자를 꼭 쓰고 다닌다. 바람도 막고 비도 막고. 여기 와서 모자를 두 개나 샀다. 나의 유일한 호사인 셈이다.
수도 탈린에서 버스로 2시간 반 거리인 에스토니아 제2의 도시 타르투에 다녀왔다. 도심 한가운데를 흐르는 작은 실개천과 타르투 대학의 고풍스러운 건물들, 그리고 여유 있는 사람들의 표정을 카메라에 담았다.
타르투 대학 본관. 수업 후 나오는 학생들
강의실과 강의실을 잇는 다리
차분함과 여유는 이곳 사람들의 특징이다. 발트 3국의 사람들이 모두 비슷한 성향을 지닌 것 같다. 구 소련의 지배를 받다가 91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독립했다. 1인당 GDP는 17,000 달러에서 23,000 달러 정도이다. 한국이 30,000 달러 내외이니 대충 경제 수준을 알 수 있다. 마트의 물가도 그 정도 수준에서 결정되는 것 같다. 다만 자동차의 경우 벤츠, BMW, 아우디, 폭스바겐, 볼보, 도요타 등이 대세를 이룬다. 가끔 현대와 기아차가 보인다. 유럽연합 내에서는 관세가 붙지 않기에 한국보다 평균 20% 정도 자동차값이 저렴하다. 처음에는 왜 이리 고급차가 많지 생각했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선택의 폭이 독일차로 한정 되어서 그렇겠구나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한국보다 20% 정도 저렴하다면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스토랑의 음식 값도 평균 15에서 20유로 정도이다. 한국으로 치면 족발, 치킨, 피자 배달시켜 먹을 때의 가격쯤 될 것 같다. 아무리 간단하게 먹어도 7,8천 원은 나온다. 한국과 거의 비슷하다. 관광지이고 중심가라서 그럴 수도 있다.
주택문화는 한국과 많이 다르다. 중심에서 벗어난 주택가는 4,5층 정도의 우리식으로 말하면 빌라 같은 주택들도 많이 눈에 보인다. 한국의 기형적인 아파트 문화는 아마 세계에서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타르투. 외곽의 고즈넉한 주택
여기 와서 내가 살던 한국을 생각해 보니 뚜렷한 특징이 보였다. 코리아는 화려하고 세련된 이미지가 있다. 과거에는 아주 가난하고 아무도 모르던 변방의 나라였지만 지금 빠르고 최첨단의 교통시스템을 지녔고, 쉴 새 없이 변해가는 아주 역동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뛰어난 물류체계도 가지고 있다. 미래지향적이다. 영화나 드라마, 음악, 음식 등 문화영역에서 소프트 파워를 계속 키워가고 있다. 이곳 발트 3국은 그런 관점에서 비교하면 차분하고 정적이고 여유가 넘친다. 이곳으로 여행을 오려면 5월에서 9월까지가 가장 좋은 것 같다. 여름은 그렇게 덥지도 않고 다니기에 딱 좋다. 늦가을과 겨울은 너무 을씨년스럽다.
탈린 근처에 있는 카드리오르그 미술관. 미술관 앞에 있는 공원이 무척 아름답다
한국은 지나치게 경쟁적이다. 그리고 빈부격차가 심하다. 1인당 GDP가 3만 불을 넘는다면 굉장히 잘 사는 국가이다. 그러나 남과의 비교를 통해 빈곤을 느끼는 상대적 빈곤이 심하다. 서구사회가 수백 년에 걸쳐 서서히 만들어 온 경제 성장을 70여 년 만에 이루어 냈다. 자랑할 만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오로지 돈이 최고라는 황금만능주의와 심한 경쟁으로 인해 개인의 스트레스가 심하다. 장시간 노동으로 인해 여가와 근로의 균형 잡힌 삶도 아직 시기상조다.
청소년들의 학업 스트레스도 심각하다. 이곳 학생들에게는 입시 경쟁과 과다학습의 부작용은 없다. 천천히 서두르지 않고 단계를 밟아 자신의 미래를 설계한다. 비교를 통한 상대적 박탈감이 없다면 무리에서 탈락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고통은 없을 것이다. 행복의 기준이 돈에만 있지 않고 다양하다면 남들보다 좀 못 산다고 해서 기죽을 일도 없다. 자라는 젊은 세대에게 다양한 삶의 가치관이 있을 수 있음을 가르쳐 주었으면 좋겠다. 자신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자세하게 언급은 안 했지만 이곳 탈린에서도 한국 청년 둘을 만났다. 역시 5개월째 여행 중. 그들이 말한 한국은 대학을 가지 않은 젊은이들을 소외시키는 문화를 지니고 있었다. 한국사회의 문제 중 하나이다. 그 둘은 특성화고를 나와 직장을 다니고 있었다. 넌지시 자신들이 한국에서 느꼈던 정서를 이야기해 주었다. 여기서 만난 젊은이들에게서는 전혀 그런 이질감을 느낄 수 없었다고. 그들은 스페인으로 가서 순례를 떠날 예정이었다.
다시 찾은 탈린 시청과 탈린 의회
다른 문화와 역사적 경험, 지리적 환경을 가졌지만 비슷한 것도 있다. 가족을 소중히 여기는 것, 자신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는 것 등. 이런 것들은 세계 어디를 가도 비슷할 것이다. 지구는 이제 하나의 거대한 마을이 되었다. 마을마다 각자 고유의 개성을 가지고 있지만 지구라는 마을에 사는 인간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렇게 글로벌한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 본다면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진다. 시야도 넓어진다. 유럽은 이미 국경을 넘어 자유롭게 경제활동을 한다. 내가 사는 곳을 떠나 더 넓은 곳을 경험하는 일이 꼭 필요하다. 나와 내가 속한 곳을 객관적으로 더 잘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객관화야말로 도약을 위한디딤돌이다. 이제 서서히 남쪽으로 내려간다. 거기에 발붙이고 사는 사람들은 또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느껴 보려 한다. 발트 3국의 분위기와는 또 다른 매력을 발견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