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글

260326

by 원호연

1.

어쩌면 돌아선 길 끝에 당신이 서있어 주길

잘못 찾아간 모퉁이에도 당신이 기다려주길


2.

옷차림이 가벼워지면서 봄 냄새가 난다.

아니 그보다 더한 짙은 냄새가 난다. 이번만큼은 좀 다를 거라는 믿음의 냄새. 그리고 그보다 더 번잡스럽고 비참한 일은 없을 거라는 생각.


3.

에어팟 목걸이 줄을 묵주처럼 손목에 둘둘 말아 감고, 넬의 음악을 들으며 마음속으로 우는 일. 그렇게 혼자 오열하는 일. 버스에 빈자리가 많아 다행이지, 아무도 날 신경 쓰지 않으니 말이야.


4.

어제 다정했던 사람이 오늘도 다정할 거라는 믿음을 심는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내일도 그다음 날도 다정한 조련은 내 주변에 없다는 그릇된 믿음만 남을 뿐. 그 속에서 묘하게 피어오르는 안정감에 몸을 맡기는 건 언제나 편하다.


5.

마음이 오만가지 갈래로 찢기는 듯한 고통으로 끊임없이 슬퍼질 수 있음에 애도를 표한다. 이를테면 내가 당신을 걱정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당신을 걱정하다 잠이 든다. 그걸로 나는 당신이 있는 천국에 닿는다.


6.

책상 위 놓인 작은 손거울 속에 누군가

문득 생기를 잃어가는 게 눈에 보여서

때 마침 그냥 모든 게 슬퍼서

발목까지 오는 새카만 코트가 꽤나 좋아서

사고 싶지 않은데 이미 사버린 물건 같아서


7.

내가 좋아하는 모든 것들에게서 해방되고자,

평안과 안식을 바라며 예를 갖추고 손바닥을 하늘로 향한 채 절을 드린다.

내가 싫어하는 모든 것들에게서 구속받고자,

기도와 염원을 드린다.


8.

오래도록 지속될 고통을 남겨두는 일

조건 없이 사랑을 시작해도 될 일

사유와 상념으로 초대하는 일

결코 나에겐 오지 않을 일

그렇고 그런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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