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서 1

엄마

by 라온지니

얼굴을 보지도 않고 데려간다는 팔 남매 중 셋째 딸이다.

우리 엄마는 아들을 낳아야 하는 외할머니의 바람과는 달리 딸로 태어나 온갖 구박을 받으며 자랐다.

세탁기가 없던 시절 옷을 스스로 빨아 입는 엄마에게 외할머니는 기생이 되려는 건지 깨끗한 것만 좋아한다며 욕지거리를 해대셨다고 한다.

엄마 다음에 아들을 낳은 외할머니는 아들을 낳고 한껏 으스대며 살 수 있으셨지만 엄마에 대한 필요 없는 미움은 거두지 않으셨다.

그런 엄마는 팔 남매 중 맏이인 아버지에게 23살에 시집왔고 아버지의 4명의 동생들을 돌보며 학생 때는 도시락과 빨래뒤바라지를 하며 사셨고 결혼 때는 맏이인 아버지의 아내로서 시동생들을 결혼시키셔야 했다.

나의 조부모님은 없는 살림에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자식들을 키워야 했기에 자식들을 돌봐줄 여력이 별로 없으셔서 맏이인 부모님이 동생들을 돌봐야 했다.

아버지는 학교 다닐 때 꽤 공부를 잘해서 고등학교 진학을 학교에서 권했지만 집안형편상 중학교를 졸업하고는 돈을 벌기 위해 안 해 본일이 없을 정도로 사셨기에 부모님의 형편도 너무 좋지 않았었다.

덕분에 동생들 넷과 우리 자녀들 셋까지 지내는 우리 집은 셋방에서 지낼 때부터 같이 북적대며 살아야 했고 반찬은 항상 모자라기 일쑤였다.

엄마는 자식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먹이기 위해 조금의 반찬이라도 숨겨둔 걸 아버지에게 들키기라도 하는 날에는 부모님이 싸움하는 날이었고 아버지의 손찌검이 있고 나서야 싸움이 끝나곤 했었다.

엄마는 사는 게 너무 힘드셨으리라 짐작이 된다.

그렇다 보니 엄마의 하소연 상대는 항상 큰딸인 내가 되었다.

나를 임신했을 때 아버지에게 대들었다는 이유로 허리벨트로 맞았다는 얘기, 나를 낳기 전까지 밭일을 하다 진통이 시작되어서 나를 낳았다는 얘기, 나를 낳고도 바로 다음날부터 밭일을 해야 했고 밭일을 끝내고 돌아오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밥을 해야 했다는 얘기, 나를 낳고 쉬고 있던 엄마에게 밭일을 시키던 할머니,

막내시동생의 생리혈이 묻은 팬티까지 빨아야 했던 일,

시동생들의 도시락을 새벽부터 일어나서 몇 개씩이나 싸야 했던 이야기,

동생들의 반찬이 변변치 않다며 얘기하시던 아버지에게 대들어서 매번 싸움 끝에 두들겨 맞던 일,

나 역시 여자로 태어나 살고 있지만 어머니의 인생은 정말이지 너무 슬펐다.

수십 년 전의 이야기가 아닌 불과 내가 태어나기 전 50년 전쯤의 일이었다.


어릴 적 명절은 세상 행복했다.

맏며느리로서의 엄마의 힘듦보다 평소 못 먹던 음식이 많았던 명절이 너무 좋았다.

엄마가 자식처럼 돌봐서 고등학교 대학교를 보냈던 삼촌, 고모들은 하나둘 시집, 장가를 가서 명절이면 시골에 오셔서 큰손주인 나에게 용돈을 주시곤 했다.

물론 큰형부부의 고충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가 조카인 내게 용돈으로 돌아오는 일이었음을 그땐 짐작하진 못했다.

명절의 행복 중 하나인 평소 맛보지 못하던 맛있는 음식들 역시 부모님이 장을 봐와서 음식장만을 하며 명절을 지내야 했던 엄마의 수고로움도 그땐 몰랐다.

어느 해 명절에 엄마는 방에 누워계셨고 난 언제 시골을 가느냐고 재촉하던 중이었다.

엄마는 몸이 아프고 열이 난다면서 조금 늦게 가면 좋겠다 했지만 아버지의 성화에 못 이겨 몸을 일으켜 시골로 향했다.

시골에서도 엄마의 몸상태는 여전히 좋지 않았다.

간신히 명절을 지내고는 집에 돌아와 집 근처 병원에 가보았지만 가벼운 소화불량정도라고 얘기하는 의사의 얘기에 집으로 돌아와 일상생활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만약 그때 다른 의사를 만났다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었을까?' '이건 의료사고라고 해야 하는 걸까?' 지금도 의문이 드는 지점이다.

하지만 그 뒤로도 계속 엄마의 몸은 여전히 좋지 않았고 또 다른 병원을 가보니 아무래도 큰 병원을 가봐야 할 것 같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부모님은 당장 갈 수 있는 서울의 대학병원에 예약해서 병원을 다녀오셨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담도암이란다.

담도라는 게 원래 담즙이 내려가는 관을 얘기하는데 타고 내려가는 길에 암이 생겼으면 어디로 얼마나 전이되었는지 엑스레이나 mri 등으로는 확인할 길이 없다고 했다. 개복수술을 해봐야 얼마나 전이되었는지 수술로 암을 제거할 순 있을지 확인이 가능하다는 얘기만 듣고 내려오셨다고 했다.

우리 가족은 태풍이 몰아치는 길 한복판에 서있는 것 같이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다.

엄마의 나이 49, 나는 26, 남동생은 군복무시절이었고 여동생은 대학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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