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 때 잠시 반년 정도 있었던 기억 때문일까, 아니면 잦은 출장길 때문일까, 미국은 나에게는 나름 여행하기 편한 곳이었다. 반면 유럽은 비록 대학 때 군 복무 마치고 휴학을 할 때 배낭여행을 혼자 한 달 정도 일정으로 다녀온 적은 있지만 가족여행을 나의 책임과 인솔 하에 가는 건 꽤 작지 않은 부담이 있었다. 그것도 렌트를 해서! 하지만 늘 그렇듯 다 잘될 거야, 잘 해낼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과 다짐에 발을 옮겼고, 딸내미 초등 1학년 때부터 매해 여행을 가던 미국을 잠시 뒤로 하고 올해 중2병 직전인 중1 딸내미와 함께 셋이서 유럽을 가기로 했다.
오래전 짧은 배낭여행의 기억에 의지하여 행선지를 정해보려 했다. 파리나 베를린 같은 너무 크고 도시 같은 도시 말고, 룩셈부르크 같은 너무 작은 도시 말고, 유적과 관광객이 너무 많은 이탈리아 말고... 그러다 떠오른 곳은 오스트리아! 좀 더 그럴듯한 이유를 붙이기 위해 우리는 '사운드 오브 뮤직' 영화를 덧붙였다. 나도 와이프도 딸내미도 좋아하는 영화의 배경인 잘츠부르크도 가는 거야! 뭔가 그럴듯한 명분이 생긴 것 같았다.
여러 가지 준비와 함께 전일정을 함께 할 렌터카를 예약하였는데, 그간 미국 여행과 출장을 통해 Gold 멤버가 유지되고 있는 Hertz 통해 사전 예약을 했다. 유럽 특성상 소형차가 많았는데 문제는 대부분이 일명 스틱, 매뉴얼 수동 기어 차량이었고 일부 소수만 오토, 자동 기어 차량이었는데 렌트비가 많이 비쌌다. 결혼 전에 수동 차량을 운전해 본 이후 근 15년간 자동만 운전해봤지만, 몸이 기억하겠지!라고 나는 생각하고 저렴한 비용의 차량 예약을 마쳤다. 사실 자동 선택 차량이 거의 없었다. 비행기에서 내린 후 빈 공항에 위치한 Hertz 사무실에 가서 호기롭게 선택한 차량은 자태 곱게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라는 멘트와 함께 올릴 피드를 성급히 기대하며 수동기어 사진도 찍고 드디어 숙소로 향하는 도심의 길로 나섰다.
그런데, 몸이 기억하기에는 두 가지 큰 문제가 있었다. 일단 클러치가 너무 깊게 눌리는 차였고, 두 번째는 자동 시동 끄기 옵션이 설정되어 있어서 정차 중 시동이 꺼지고 클러치를 떼거나 액셀레이터를 밟으면 시동이 다시 자동으로 걸렸다. 자동 차량에서는 편한 이 기능이 오랜만의 수동 운전에서는 깊은 클러치와 함께 나를 혼란에 빠트리더니 시동 꺼짐이 무한히 계속 반복되었다. 빈 도심 한가운데서 녹색 신호가 켜졌는데도 나는 앞으로 나가질 못하고 삐질 땀을 흘리며 겨우 차를 움직여 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어떤 오토바이 한 대가 바로 옆에 붙더니 창문을 툭툭 치는 게 아닌가! 온 신경을 클러치를 누르는 발과 수동기어를 조작하는 손에 집중하고 있어서 옆을 돌아보기도 어려웠다. 게다가 유럽에서 벌써 치한을 만난 건가?라는 생각에 갑자기 식은땀이 쏙 들어가고 냉기가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래도 일단 차 안에 있으니 안전은 하겠지라며 정신을 차리고 바라보니 무언가를 말하려 하고 있었다. 동시에 뭔가를 가리키는 듯한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보닛으로 가져가 보니 글쎄.. 우리 차에서 연기가 나고 있는 게 아닌가! 빨리 갓길로 차를 대라는 와이프와 딸의 비명 소리에 일단 길가 노상 주차 구역에 차를 겨우 주차시켰다. 보닛을 열어보았으나 알 수 있는 건 진한 플라스틱 녹는 냄새가 난다는 것.
호기롭게 선택한 수동 기어 차량의 최후
당황해하고 있던 나는 그 먼 타지에서 너무나 감사하게도 은인을 만날 수 있었다. (나도 앞으로 작은 덕을 쌓아가며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주차한 곳 바로 옆 스리랑카 음식점 주인이 나와 살펴보더니 무슨 일이냐며 물어왔고, 자초지종을 듣더니 견인차량을 불러주고 가족들을 가게로 들어오게 해 주고 음료도 주었다. 유럽이라 한참의 시간을 예상했지만 의외로 빨리 온 견인차량 기술자는 대략 차 상태를 보더니 클러치가 깊이 눌려 그런 냄새가 날 수 있다고 하며 견인보다는 렌트 차량 교환을 제안해 주었다. 그 얘기는 한 30분가량 다시 이차를 몰고, 시동을 수없이 꺼트려가며 다시 공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의미이다. 지금 생각하면 다시 앉기도 싫은 차였지만 그래도 그 방법밖에 없으니 나는 다시 차를 몰고 땀을 한 바가지 쏟아가며 공항으로 다시 돌아갔다. 다행히 Gold 멤버 이력을 보고 Hertz에서는 차를 같은 가격에 마침 한 대 남아있던 오토 차량으로 별다른 확인 없이 교환해 주었다. 마지막에 직원이 물었다. 수동을 운전 못하는 거였냐고, 나는 답했다. 이 차 클러치 너무 깊어요.
열흘 정도 일정을 마치고 다시 돌아가는 길에 나는 이 가게를 다시 들려서 주인인 스리랑카인을 찾아갔다. 덕분에 좋은 여행 마치고 돌아가게 되었다고 다시 한번 감사의 말을 전하고, 기념사진도 찍었다. 가족 여행에 있어 안 좋은 기억이 될 수 있었던 일을 좋은 기억으로 바꿔준, 평생 은인과도 같은 그 친구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Thanks!
먼 타지에서 만난 은인과 같은 스리랑카 식당 주인 , 혹시 오스트리아에 가시게 되는 분은 이 식당에 들려봐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