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이혼해도 아이와 함께 살 수 있을까

내가 이혼한 10가지 이유_타이밍

by 꿈꾸는 냥이

"언제 말씀드릴 건데? 우리 집을 내놓아야 그 돈으로 우리도 집을 알아볼 텐데."


"꼭 나가야겠나."


"아니, 그러기로 했던 거잖아. 왜 또 말을 바꾸는데?"


"니가 말해라 그럼!"


"내가 어떻게 말씀을 드려! 정말 왜 그래!"


감정이 격해지고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모르쇠로 나오는 남편이 원망스러웠다.


"이사 나가든가! 이혼하던가! 난 더 이상은 같이 못살아!"



말도 안 되는 일들을 겪으면서도, 어떻게든 결혼을 이어갔던 이유는 아이들 때문이었다. 처음으로 이혼을 진지하게 생각했던 건 결혼 후 3년이 되어가던 겨울이었다. 결혼 전과 다름없이 낚시를 가거나 술자리를 즐기는 남편이 힘들고, 밤낮 없는 시어머니의 방문에 소화제를 달고 살아야 했다.


분가하지 않으면 이혼하겠다던 그 말은 반은 진심이었고, 반은 협박이었다. 부모님과 거리를 두면 남편도 책임감이란 걸 가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컸다. 아이와 나만 두고 밤새 낚시를 하러 가진 않을 터였다.


엄마의 비상식적인 언행을 멈출 용기가 없던 남자는 술에 취한 엄마가 대문을 닫는 소리가 들리면 나에게 자는 척하라고 했다. 어김없이 우리 집을 들르는 어머니는 자는 아기를 깨워놓고, 며느리를 불렀다. 남편은 엄마를 잘 달래서 올라가는 역할을 맡았다.


자식의 집이라고 해도 너무 늦은 시간에 방문하지 않거나, 연락 없이 사람들을 집으로 들이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이상한 그 나라에선 그런 행동을 불편해하는 내가 이상한 사람이었다. 돌아보면 엄마의 경계를 모르는 행동을 막아내기보다 피하는 방법을 선택해야 했던 그 사람도 나에게 미안했던 것 같다. 그에겐 그 방법이 최선이었을 거다.




원룸이어도 좋으니 우리 공간에 살고 싶었던 여자와 엄마와 분리된 용기가 없던 남자는 자주 싸웠다. 싸움의 끝은 이사할 준비를 하겠다는 약속으로 정리되곤 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남편은 우리의 생각을 부모님께 전하지 않았다. 이사를 위한 어떤 준비도 하지 않았다.


이혼이라는 말을 쏟아낸 그날, 남편은 엄마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분가하지 않으면 이혼하겠다는 내 말을 그대로 전했다. 힘들어도 우리 힘으로 살아보자는 말을 나눈 그동안은 많은 시간들은 사라졌다. 시어머니가 너무 불편해 함께 살 수 없다고 소리치는 며느리만 남았다.


아들의 말을 들은 어머니는 한 걸음에 뛰어 내려오셨다. 그리고 처음 꺼낸 말은 예상 밖이었고, 무서웠다.


"네 나이가 이제 겨우 스물여덟인데, 재혼 안 할 거니? 아이는 놓고 가는 게 너한테도 좋을 거다. 두고 가거라."


얄미운 며느리가 빠져주길 기다렸던 걸까, 아이만 놓고 나가면 상관없다는 식이었다.


그날의 그 말씀은 트라우마가 되어 오랫동안 내 입을 막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이를 뺏기지 않을 방법은 없을 것 가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 아기를 뺏을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걸 그냥 알았다. 우리 집은 망해가고 있었다. 판사는 내 손을 들어주지 않을게 분명했다.


그날의 소동은 부모님들께 잘못했다고 사과드리며 일단락되었다. 다음 날 아버님은 우릴 부르셔서 분가 의사를 재확인하셨고, 집을 알아보라고 허락하셨다. 우린 작은 빌라를 보러 다녔다. 살던 집을 전세로 내면 4천은 받을 수 있었다. 그 돈에 맞는 집을 찾던 중 어머님의 전화를 받았다. 주소를 하나 불러주셨다.


주소를 찾아간 곳엔 신축빌라가 한 채 있었다. 시댁과 차로 5분 정도 거리에 있는 25평의 빌라는 분양이 잘 되지 않아 가격이 좋았다. 우리끼리 살 수 있다면 어디든 좋았는데 새집이라니, 어머니께 정말 죄송하고 감사했다. 우리는 그 집에서 10년을 살고 새 아파트에 입주했다.


새 집으로 이사 오고, 사업을 시작했다. 친정 부모님들이 아이들을 돌봐주기 위해 근처로 이사하셨다. 이 집에 이사오던 날, 내가 고르고 내가 꾸민 우리 집이 생겼다는 사실에 잠이 오지 않았다. 여기서 5년 후, 각자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아이들을 뺏기지 않고 이혼을 한다는 건 여전히 불가능에 가까웠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우울증이 생겼다. 아무것도 하기 싫어 계속 잠만 잤다. 퇴근하면 아무도 만나지 않고 집으로 왔다. 무슨 맛인지 느껴지지 않는 음식을 입에 밀어 넣고 배부르면 바로 잤다. 두 달 만에 7킬로가 쪘다. 옆집 아줌마는 오랜만에 보는 살찐 나를 보며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살쪘죠?" 빙글거리는 입매가 밉상이다.


"아.. 이런.. 머라는 거야."

대답하기 싫었지만 "네~"하며 웃는 내 목소리는 이미 "솔' 톤이다. 집업병이다. 어떤 순간에도 콧소리를 낼 수 있다. 공허했다.


상담을 공부하고 나서 알게 된 건, 난 우울이 아닌 불안이 높은 사람이라는 거다. 그때의 난 큰 사업을 물려받은 남편을 믿지 못했다. 우린 곧 망할 것만 같았다. 매달 500가 가운 생활비를 쓰며 200을 쓴다고 믿는 막말 대마왕 시어머니를 더 이상 피할 수 없다는 것도 불안을 증폭시켰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사업을 시작한 남편은 다행히 잘 해나는 것 같았다. 잘 들어보니 매달 천만 원은 버는 것 같았다. 대출을 갚고 우리 집과 어미니닥 생활비를 주고 적금도 넣는다고 했다. 청소도 하고, 장부 정리도 할 겸 사무실에 자주 갔다. 새로 가구를 넣은 사무실은 다른 사장님들의 아지트 같았다. 그곳은 흡연구역이었고, 내 자리는 없었다.


남편의 월급을 모두 관리하던 나는 그 후로 남편이 얼마를 벌고, 용돈으로 얼마를 쓰는지 알지 못했다. 일 년 후 그 사람은 1억 추가 대출을 받았고, 다시 일 년 후 생활비를 제날짜에 주지 못했다.


남편과 나는 아버님이 돌아가신 다음 해에 골프를 배웠다. 한 달에 한두 번 남편과 같이 하는 골프는 재미있었고, 사이도 좋아지는 것 같았다. 주변에 먼저 골프를 시작한 형님 동생이 많았던 그 사람은 함께 필드에 가자는 제안이 끊이지 않았다. 매달 골프에 쓰는 비용이 몇 백이었다.


이렇게 돈을 써도 괜찮을지 물으면,


"서방 그 정도 능력은 있다."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또 믿었다. 도무지 생각이 없던 건 바로 나였다.




다시 일 년이 지나자, 그 남자는 골프를 배우자고 했던 아내를 원망했다. 골프를 배우는 바람에 너무 많은 돈을 쓴다고 했다. 이해되지 않았다.


"힘들 땐 몇 년 안 해도 되지 않아?"

"그게 불가능하다고"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골프 잠깐 안 하면 사람들이랑 잘 못 지내?"

"난 그게 안된다고.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도대체 엄마나 아들이나 무슨 일만 있으면 내 탓이다. 정말 연구해 보고 싶은 뇌구조다.


코로나가 시작되면서 남편 사업도 힘들어졌다. 경제적으로 힘들어지면 그 사람의 그릇이 보인다. 예민해진 남편은 친한 사람들과 술자리만 가지면 싸웠다. 아이들에게도 짜증을 부리거나 어린애들 싸움하듯 유치했다. 자기 외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3개월이 지나도록 어깨 한 번 쓸어주지 않는 남편이 낯설었다. 괜찮은지도 묻지 않았다. 늘 예민했고 공격적이었다.


"나 엄마 돌아가신 지 얼아 되지도 않았어. 나한테 이러는 거 너무 심하지 않아?"


"나도 아빠 없어!"


저 한마디에 항복했다. 내가 졌다. 돌과 대화하는 게 이보단 덜 외롭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 말이 없었다. 너무 피곤하고 쉬고 싶었다. 멀리 떨어지고 싶었다.


그렇게 차가워진 마음은 말과 행동에 묻어 나왔다. 나를 항해 너무 춥다며 몸을 떨었다. 그 입에서 싸움 끝에 너랑 더 이상 못살겠다는 말이 자주 나왔다. 난 대꾸하지 않았다. 오케이 한들 다음날이면 아무 일 없다는 듯 굴게 뻔했다. 망나니 같은 남편도 정말 힘든 순간이 오면 의지가 된다더니, 순 거짓말이었다.


치가 떨린다는 게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매일 싸우고, 매일 괜찮은 척했다. 알코올성 치매가 의심되었다. 전 같지 않은 내 온도에 바람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에게 지방 강의에 따라가자고 했다. 엄마가 요즘 이상해서 감시해야 한다고 말하는 못난 남자가 내가 이십 년 전 사랑에 빠졌던 그 사람이란 게 믿기질 않았다.


그날 아이들과 외식을 하던 그 자리에서 이혼을 다시 입에 올린 그 사람에게 물었다.


내가 한다고 하면,
지저분하지 않게 끝내줄 거야?


이제 정말 때가 된 것을 직감했다. 우린 이미 끝나 있었다. 사랑도 신뢰도 없는 관계는 법으로 연결되어 있을 뿐이었다. 아이들은 자라서 의사 표시가 가능해졌다. 알코올 의존이 높은 아빠라면? 사업이 어려운 상태라면? 내 수입이 적어도 양육권을 주장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붙어볼 만했다.


이제 진짜 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