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꾀병이 아니야. 마음이 아픈거야

내가 이혼한 10가지 이유_생일(마흔)

by 꿈꾸는 냥이

추석 연휴가 끝나간다. 좋은 사람들과 브런치로 시작해 강의 준비 스터디를 하고, 조개구이에 꽃게탕까지 먹고 나서야 자리를 끝낼 수 있었다. 시댁이 없는 세 번째 명절 연휴가 아직 어색하지만 정말 좋다.


오래전 추석을 앞두고 가짜 깁스 판매량이 증가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설마 진짜 그랬을까 생각했지만, 그 심정을 너무 잘 알아서 웃어넘길 수 만 없었다. 깁스는 아니었지만 어머니와 긴 시간을 보내야 하는 날이 다가오면 며칠 전부터 난 배가 아팠다.


3년 전 어느 추석엔 응급실까지 가야 했다. 음식 준비를 마치고 온 그날부터 먹은 음식을 토해냈다. 추석 당일에도 음식이 들어가면 설사를 하거나 토하게 되었다. 3일째 밤엔 머리가 깨질 것 같이 아팠다. 더 이상 나올 것이 없는데 계속 속이 좋지 않았다. 결국 응급실에 가서 검사를 받고, MRI 검사를 했다.


엄마는 10년 전 뇌출혈로 수술하셨다. 점심을 드시고 체한 듯 속이 좋지 않아 화장실에 간 엄마는 그곳에서 쓰러지셨다. 뇌동맥류였다. 엄마는 양쪽 뇌혈관의 혈류 속도가 다르다고 했다. 한쪽은 혈관이 좁고 느리고, 다른 쪽은 빨랐다. 피가 빠르게 흐르는 쪽의 혈관엔 삐죽 부풀어 오른 꽈리가 몇 개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터진 것이었다.


뇌동맥류는 사실 200~300명 중 1명이 가지고 있는 흔한 질병이라고 한다. 주로 고혈압 환자에게서 발견되거나, 유전될 수 있다. 엄마는 혈압이 높지 않으셨기 때문에, 원래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게 의사의 소견이었다. 특히 딸들에게 유전이 잘 되기 때문에, 나와 여동생에게 검사를 주기적으로 할 것을 권했다.


그날 응급실에 가며, 미리 검사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혈액 검사와, 소변검사를 마치고, 뇌 촬영을 했다.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속을 가라앉히는 약이 링거와 함께 놓아졌다. 머리가 아프지 않으니 살 것 같았다. 검사 결과 머릿속에 석회질로 보이는 흔적은 있었지만, 꽈리나 이상한 점은 발견되지 않았다.


병원에선 소화제와 진통제를 처방했다. 정신을 못 차릴 만큼 심했던 두통은 가짜 통증이었다. 졸지에 시댁에 가기 싫어 꾀병을 만들어 낸 며느리가 되었다.


난 정말 아팠는데.
그럼 왜 계속 토하고 물도 마시기 힘들었던 걸까.

남편 말처럼 내가 예민하고 싹수가 없어서?




전환장애(신체화)


아픈 척이 아니라 정말로 몸이 아픈 것을 '꾀병'이라고 할 순 없다. 두통이 생기거나, 배가 아프고, 마비가 올 수 있다. 전환장애는 발현되기 전 스트레스 상황이 선행한다. 즉 정신적으로 힘든 상황을 맞았을 때, 그 보이지 않는 통증이, 신체의 통증으로 보이는 것이다.




#1.


주기적으로 위염이 생겼다. 가장 처음 진단을 받은 건 스물세 살 여름이었다. 며칠간 먹지 못하고 토하기를 반복한 후 병원에서 내시경을 해보자고 했다. 진단 결과는 '신경성 위염'이었다. 6개월 동안 하루 세 번 약을 먹어야 했다. 술을 마시면 밤새 연락이 잘 되지 않던 남자 친구 때문에 잠을 설치거나, 연애에 대한 고민으로 우울감을 느끼던 때였다.


학교 상담실에서 상담을 받았다. 나의 첫 상담의 경험이었다. 거의 매일 술을 마시고, 연락이 잘 되지 않는 날이 종종 있는 남자 친구에 대해 털어놓았다. 상담사는 막냇동생 같던 내가 안타까웠는지 남자 친구를 못마땅해했다. 3회기에 상담사가 내게 물었다.


"그런 남자 친구를 왜 만나요?"

"........"


대답을 못했다. 왜 만나는지 몰랐다. 왜 헤어지지 못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난 그 남자와 이미 잠자리를 했고, 두 번이나 사랑을 쉽게 끝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결혼 전에 관계를 가진 사실에 죄책감과 수치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 시절에 여중과 여고를 나왔다면 '혼전 순결 서약서' 한 번쯤은 써봤을 것이다. 당시의 성교육은 놀랄 만큼 고조선스러웠다. 첫날밤은 결혼 한 첫날밤이어야 훌륭한 여성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난 이제 다른 남자와는 결혼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연인과 성관계 경험이 있으면 결혼을 꼭 해야 하냐고? 그렇게 된다면 최상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결혼 전 그런 경험은 적을수록 좋다고 생각했다. 결혼할 사이에만 암묵적으로 허락받을 수 있는 일이라고 '내가' 정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 놓은 틀 안에 나를 가둔 것도 바로 나였다. 소화가 잘 될 리 없었다.


괜찮아진 듯하던 위염은 결혼 후 매년 재발했다. 내시경 검사도 매년 새로 해야 했다. 검사 결과는 항상 같았다. 신경성 위염. 한 번 재발하면 3개월에서 6개월 정도 약을 먹었다. 집엔 항상 소화제가 있었고, 지금은 마시지 않는 탄산음료를 달고 살았다.




#2.


건강염려증이 아닐까 생각할 만큼 결혼 생활 내내 몸의 여러 부분이 아팠다. 자주 체했고, 어깨는 항상 뭉쳐 있었다. 혈액순환이 잘 되지 않아 쉽게 부었다. 다리가 저려 잠을 자기 어려웠다. 자다 깨어 다리를 주물러야 하는 밤이 늘어났다.


항상 긴장한 채로 살아야 했던 신혼 3년의 습관으로 나는 아직도 몸에서 힘을 잘 빼지 못한다. 미용실에서 머리를 감겨주던 스태프 언니는 내가 힘을 가득 주는 통에 힘들어했다. 네일 샵에서 관리를 받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손에 힘을 빼라는 말을 들어도 할 수 없었다. 힘이 빠진 기분을 경험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내 손을 잡고 상하좌우로 흔들어 보던 네일 샾 원장님은 이상한 일이라고 했다.


몸이 항상 경직되어 있으니, 쉬거나 자고 일어나도 늘 피곤했다. 혹시 간염이 생긴 걸까 간 검사를 했다. 갑상선에 문제가 생기면 피로를 많이 느낀다는 말을 들으면 갑상선 검사를 했다. 결과는 항상 '양호'였다. 아프지 않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병명이 없으니 치료방법도 없었다.




#3.


"넌 여기만 오면 배가 아프니?"


"네? 제가요?"


시댁에 갈 때마다 배가 아팠던 걸 어머님이 물으시기 전까지 몰랐다. 배가 아파 장실에 가면 아무 소식이 없었다. 한참을 앉아 있다 그냥 돌아 나와야 했다. 마치 생리 직전처럼 싸한 느낌이 들기도 했고, 어떤 날은 보이지 않는 손이 장을 꽈배기처럼 꼬아 놓은 것 같았다.


일 년에 한 번은 왼쪽 아랫배가 너무 아팠다. 병원에서 수액을 맞고 나서야 회복할 수 있었다. 복통보다 더 힘들었던 건 배 아플 때마다 동반되는 극심한 두통이었다. 눈을 뜨고 있기 힘들어, 방을 어둡게 하고 누워 있어야 했다.


불안증세가 심해져 운영하던 학원을 양도하고 집에서 쉬기 시작한 2019년 봄. 대출까지 받아 시작한 사업을 겨우 3년 만에 정리하면서, 일도 사랑도 모두 실패한 것 같았다. 2달이 지날 무렵 내 생일이 되었다. 아침에 시작된 두통은 점점 심해져 방에서 나갈 힘도 없었다.


내가 몸이 좋지 않다는 걸 들은 남편은 생일 파티를 할 수 없으니 저녁을 먹고 들어오겠다고 했다. 늦지 않으니 약을 사 오겠다고 했다. 진통제 한 알을 먹고 잠이 들었다 깨어 보니 10시가 지나고 있었다. 엄마는 종일 집에 가지 못하고 우리 집에 계셨나 보다. 아이들 밥을 챙기고, 사위가 돌아오길 기다리셨다.


그 시간까지 돌아오지 않은 남편은 내 생일이란 걸 잊은 걸까. 전화를 해보니 기분이 좋아 보였다. 술자리를 옮겨 한 잔 더 하는 중이라고 했다. 점심시간 전에 일을 끝낸 사람이 왜 돌아오지 않는 건지 화가 치밀었다. 약을 미리 사 두었는지 물었다. 깜박했다고 했다.


"어쩌다 내가 너 같은 걸 만나서!!!

아악~~~~~~~~~~~~~~~~~~~~~~~~~~~~~~~~~~~~~~~~~~~~~~~~~~~~~~~~~~~~~~~ "



엄마와 아이들이 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감정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랐다. 비명이 멈추지 않았다. 생일에 아픈 아내는 안중에 없는 남편이 미워서가 아니었다. 내 존재 자체를 부정당한 것 같았다. 그날은 생일이었고, 일 년 중 가장 행복한 날이어야 했다.


눈물로 흐려진 눈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들어왔다. 딸들은 미쳐 소리 지르는 엄마를 공포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서 있었다. 엄마는 내가 어떻게 될 것 같아 벌벌 떨면서 눈물을 닦고 계셨다. 숨이 찼다. 내 비명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대로 난 쓰러졌고 잠이 들었다.



생일엔 아팠지만, 아이들이 옆에 있었다. 엄마는 미역국과 불고기를 해놓고, 제일 먼저 축하해주셨다. 정신을 잃을 만큼 분노를 쏟아낼 필요는 없었다. 조용히 생각을 정리하는 편이 나았다. 엄마는 그날 집에 돌아가셔서도 우셨을까. (나 때문에 엄마는 암에 걸리신 걸까. 그 해 가을 엄마는 췌장암 진단을 받으셨다.)


학원 아이들은 나를 '행복한 벨라쌤'이라고 불렀다. 아이들만 보면 환하게 웃어졌다. 힘든 일이 있어도, 재밌게 지내려 더 많이 웃었다. 생일에 비명을 시르며 쓰러지는 건 해피벨라답지 않았다. 우울하고 무기력한 내가 싫었다. 친구 하나는 내 눈빛이 전과 다르다고 했다. 반짝이는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 공허함만 가득했다.


힘들고 방향이 보이지 않을 땐 책을 찾는다. 언제나 그랬듯 책이 답을 알려 줄 거라고 생각했다. 철학 속에 마음이 불안하고 불편했던 이유의 실마리가 있었다. 착취당하고 존중받지 못한 삶을 살고 있었다. 심리학은 나의 마음과 행동이 전과 달라진 이유를 알려주었다. 상담을 공부하기로 했다.


상담을 공부하면서 이유 없이 몸의 이곳저곳이 아팠던 원인이 마음에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겪게 된 불안증과 광장 공포증은 더 이상 버티기 힘든 마음 상태에 대한 경고였다. 가족을 우선순위에 두지 않는 남편과 가족이 먼저인 나는 가치관이 다른 사람이었다.


상담을 전공하며, 내 마음과 몸의 신호에 집중해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외부에서 찾으려 했던 내가 힘든 이유를 내 속을 들여다보며 하나씩 알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바꿀 수 없는 무언가를 바꾸려고 애쓰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도 알게 되었다.



꾀병 아닌 꾀병이 반복된다면, 마음을 돌봐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