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가로채기
어떤 것에든 ‘첫’은 많은 의미를 담는다. 그 첫 산책은 내 허벅지와 종아리에 시퍼런 멍 자국을 남겼다. 사실 나는 차 운전은 제법 잘한다는 말을 듣지만 정작 손쉽다는 자전거를 타지 못한다. 자전거 타기를 배우려고 몇 번 시도하다 포기하고 말았다. 사실 무서움에 사로잡혔다고나 할까. 그 여파처럼 자전거의 위험성을 늘어놓았다. 아마도 진단을 받는다면 전치 3주 정도 나올 상처라고 떠벌리면서까지. 털북숭이 바라기 가족들은 합심한 듯 되레 나를 안전불감증으로 몰아세웠다. 참으로 뻔뻔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그들은 나의 화(火)를 부르는 원인 제공자들이다.
나는 제법 까칠한 성정인 반면 연민이 넘친다. 어쩌다 얼토당토않게 털북숭이에게 흘렸던가. 나는 순식간에 산책으로 더럽혀진 개를 씻기고 말리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더불어 개도 나를 바라기로 삼은 듯했다. 더 이상 집 나서는 가족들이 이제나저제나 올까 싶어 현관 앞에서 기다리지 않았다. 대신 내 주변에 찰싹 엎드려 있었다. 집의 실권자가 누군지를 간파할 줄도 알다니. 나는 살갑게 쓰다듬지는 않았으나 맨손으로 만질 수는 있게 되었다. 장도의 발전이라 아니할 수 없다.
어이없다는 것의 경우겠다. 결국 데려갈 거라던 ‘남아일언 중천금’은 개뿔이 되었다. 더불어 개는 아주 자연스럽게 우리 가족의 인원으로 변신했다. 사람의 마음이 아무렇지도 않게 변하여 기꺼이 받아들인 체험이랄까. 이래저래 개의 관련은 내 차지가 되어버렸다. 내 삶은 어찌 쓸데없는 복은 차고 넘치는지 참으로 모를 일이다.
개는 짖지도 않고 순한 양처럼이었다. 하나 여전히 집안에서는 배설하지 않았다. 깔끔한 체하기를 둘째가라면 서러운 집안의 권력자에게 잘 보이고 싶었을까. 그도 아니면 산책을 갈망해서일까. 여러 방법을 동원했으나 도무지 파악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나의 저녁 산책길은 개와의 동행이었다. 개는 주체를 못 할 만큼 신나서 짤막한 꼬리를 마구 휘둘렀다. 반면 나는 이전의 나처럼 개를 혐오하는 사람들 시선과 괜한 훈계하는 말들이 버거웠다. 나의 힐링으로 작용하던 산책이 때로는 격한 감정의 소용돌이로 몰아갔다.
어쨌거나 하루에 한 번의 산책 시간에 몰아지는 배설이 안쓰러웠다. 매번 ‘얼마나 참았을까.’라는 시선으로 짐작되었다. 하여 아침 산책이 더 해졌다. 오직 개의 배설을 위하여. 하지만 여사 일이 아니었다. 외출하여 귀가 시간이 늦어질 때면 조바심이 설레발을 쳤다. 양육의 의무가 개에게로 옮겨 가다니.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 내게 일어날 줄이야. 개 또한 점점 안하무인격의 결정체처럼 나 외에는 사람이든 다른 개들이든 눈에 들이기는커녕 손도 대지 못하게 앙칼스러워졌다. 개에 대한 상식에서는 ‘분리불안증’으로 검색되었다. 거기다 언제 적 털북숭이였던 것이 무색게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자체 발광이라고들 입을 모았다. 내 손길에서 노니니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참 알 수 없는 오리무중이다. 한순간 개를 받들어 모셨으니 말이다. 어찌 되든 간에 알 수 없는 힘이 어설프고도 어색한 모습으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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