찐따가 찐으로
개는 동물병원을 다녀온 이후로 아주 편안해 보였다. 그럴 수밖에. 저를 좋다고 난리법석을 떠는 사람들이 감싸고 돌았으니 말이다. 나는 개의 존재 자체가 알레르기 반응처럼 다가왔다. 뭔 얼어 죽을 저런 지저분한 몰골의 개 한 마리가 감정 중심에 버티고 있다니. 거기다 때때로 감히 내게 다가와 안아 달라는 시늉이었다. “저리 가라니까.” 질색하면 얼른 다시 현관을 향해서 납작 엎드렸다. 누구라도 들어서면 짧은 꼬리를 살랑대며 온몸으로 아양을 떨기 위해서였다. 집으로 들어서는 그들 또한 개의 극진한 환영을 받으며 헤벌쭉 이었다.
더불어 그들은 “오늘 코코 오줌 눴어?” 하나같이 물었다. 나는 ‘내 알 바 아니라고 보자 하니까 내가 보자기로 보여?’ 눈알을 부라렸지만 개의치 않고 개의 일과를 궁금해했다. 나는 맞짱 떠 듯 개를 내보내려는 의지를 더 굳혔다. 어째 세상살이는 늘 뜻한 바와 다른 방향일까. 마치 잠재되어 있었던 것처럼. 어림 반 푼어치도 없던 일이 서서히 이어졌다. 쟤는 어째 똥오줌을 누지 않을까로 시작해서 뭐를 줘야 잘 먹을까. ‘ 그 참 신경 쓰이네. 아, 그래도 이건 아닌데….’ 연민이 자리를 틀기 시작했다.
용변만 해도 그랬다. 이틀째 되던 날, 온 식구가 거실 소파에 앉아 있을 때였다. 딸아이가 보듬고 있다가 놓아주자 거실 바닥에다 오줌을 가당찮게 쏟아냈다. 하루가 지나고, 다음 날 반나절이 지나서니 그럴 수밖에. 사실 집으로 들어선 날부터 베란다에다 패드를 깔아 놓았었다. 나는 인터넷에서 습득한 정보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신문지를 돌돌 말아 어깃장을 놓고 닦아낸 휴지 뭉치를 떼어 패드 앞에다 갖다 놨다. 그 혼내기의 여파가 컸던가. 이후로 아예 배변을 보지 않았다.
나는 걸어 다니는 것을 참 싫어했다. 걸어서 10분 거리도 차를 가지고 다닐 정도였으니 말이다. 밀레니엄 시대에 접어들면서 걷기 열풍이 불었다. 비교적 시대의 흐름에 적응이 더딘 나 또한 ‘이 걷는 기분을 진즉에 몰랐다니.’ 되뇌며 한 시간 이상 걷는 것이 일과가 되어버렸다. 언제나 유행은 환경친화적 문화로 자리 잡는 것처럼 말이다.
털북숭이가 들어 온 지 다섯째 되는 날이었다. 예의 저녁 무렵 강 둔치로 걸으러 가려고 현관에서 운동화를 신을 때였다. 하필 개와 눈이 딱 마주쳤다. 계속 내 행동을 주시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엉겁결에 “너도 나가고 싶니?” 생각지도 않은 말이 튀어나왔다. 어느 사이 딸아이는 어깨끈과 목줄을 채워 내게 건넸다. 나는 여전히 개 만지기를 사절했었건만 “살다 별짓을 다 한다.” 주절대며 어색하게 목줄을 건네받았다. 반면 개는 꼬리까지 쫄랑대며 기꺼이 따라나섰다.
아주 익숙한 자세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렸다. 개는 길바닥으로 내려서자마자 급하게 화단 가로 가더니 반쯤 앉아서 폭포수처럼 오줌을 쏟아냈다. 아마 내 눈에 들려고 무지 참았던 모양새였다. 3일째 되는 날 병원에 갈 때만 해도 땅이 꺼질세라 딸아이가 안고 다녔으니, 잠깐이라도 길에 내려놓았더라면 용변을 볼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인간의 잣대로 너무 귀하게 여겼던 탓이다. 그 꼴을 대하면서 말 못 하는 개에 대한 안쓰러움이 일었다. 어쨌든 인터넷 정보를 과신한 나의 무지에서 비롯된 상황이었다.
배설의 시원함에 겨웠을까. 내 빠른 걸음에 잘도 따라 걸었다. 걷기 열풍은 날로 더해져서 산책길은 장날처럼 사람들로 붐비기 일쑤였다. 더불어 자전거 배우기와 타기가 가세했다. 자주 자전거 사고가 목격된 터라 자전거 길과 나란한 편한 산책길을 지나 굴곡진 숲길을 걸었다. 어디 건 사람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걷기는 사람을 긍정적으로 하는 그 무엇처럼 되어져서이지 않을까.
아이고야. 숲길을 향하려고 자전거 길을 건너려고 기다리는 중에 무리를 지어 자전거를 타던 중년의 여자가 순식간에 멀쩡히 서 있는 우리 쪽으로 돌진해 왔다. 얼른 개를 뒤쪽으로 더 몰아세우는데 나의 다리를 치어 털썩 주저앉게 하고 여자는 자전거와 함께 나자빠졌다. 일주일 동안 자전거 타는 훈련을 받다가 첫 시현에서 나서면서 100% 자기 과실의 사고를 낸 것이었다. 내 다리는 금세 굽이굽이 시퍼런 피멍 자국으로 무리를 지었다.
“아이, 도대체가 뭐예요.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데요.” 나는 아픈 것도 아픈 것이었지만 너무 놀라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여자와 함께한 연습생들은 내 주변으로 몰려와서 걱정들이었다. 여자는 낙법훈련을 겸해서 받았던 것인지 멀쩡했으며 연신 미안하다고 잘못을 말했다.
“어머, 강아지 봐. 엄마가 많이 걱정되나 봐. 저 표정으로 앉아 있는가? 봐!” 여자들의 감탄이 터져 나왔다. 그제야 돌아보니 털북숭이가 내 뒤에 오두만이 앉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머머 쟤 개 맞나? 어쩜 저런 표정을 지을까.’ 주연급 연기라니. 사실 털북숭이에게 돌진했다면 과실치사가 되었을 상황이었다. 그나마 과실치상으로 내가 아픈 것이 다행이었다. 어찌하건 부지불식간에 나는 ‘강아지 어미’로 등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