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 제 우산 빌려드릴까요?

by 런펀맨

비가 오는 날이었다. 아니, 비가 오다가 말다가 하는, 오락가락하는 날이었다. 마침, 그날은 재활용품 분리수거하는 요일이었다. 아파트 단지마다 재활용품을 배출할 수 있는 요일이 정해져 있었는데, 내가 사는 단지는 화요일/목요일이 분리수거 가능일이었다. 비가 오락가락한 그날은 목요일이었다.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이 아빠와 분리수거하러 나가는 걸 좋아한다. 가벼운 비닐이나 플라스틱 한두 개를 들고 분리수거장에 쏙 집어넣는 걸 즐긴다. 비 오는 목요일 저녁, 아이와 함께 재활용품을 잔뜩 들고 나섰다. 박스1에는 종이류를 담고 박스2에는 플라스틱/캔을 담아 박스를 세로로 쌓은 다음 양손으로 박스를 들었다. 비닐은 아이에게 맡겼다. 내가 사는 18층에서 1층으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현관문 앞에 서니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애매했다. 다시 18층으로 가서 우산을 들고 내려오자니 번거롭고, 이대로 비를 맞으며 분리수거장까지 가려니 아이 머리와 옷이 젖을 거 같았다. 아이는 우산을 가지러 가자고 했지만, 나는 얼른 뛰어서 재활용품을 버리고 오자고 했다. 빗줄기가 지금보다 강해지지 않으면 그럭저럭 다녀올 만하다고 판단했다. 아이와 가벼운 뜀박질을 하며 분리수거장에 도착했다. 재활용품을 절반 정도 버렸을 때, 우두둑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머지 절반의 재활용품을 한 손에 들고, 다른 한 손으로 아이 손을 잡고 분리수거장 근처 독서실 입구로 향했다. 독서실 입구에는 가로 1.5m, 세로 1m 정도의 비가림막이 있어서 실외지만 빗방울은 피할 수 있었다.


아이는 아빠를 원망했다. 자기가 우산을 가지고 나오자고 했는데, 아빠가 그냥 나오는 바람에 비를 맞았다면서. 아이에게 사과한 후 조금 기다려보자고 했다. 빗줄기가 약해지면 나머지 재활용품을 얼른 버리고 가자며 달랬다. 독서실 바깥에서 비가 약해지길 기다리는데, 독서실 안쪽에 쌓인 우산에 눈길이 갔다.


그 독서실은 평소 내가 자주 다니는 곳인데, 비가 오지 않는 날에도 거의 매일 우산꽂이에 우산이 10~20개는 꽂혀있었다. 주인이 없어 보이는 우산을 잠깐 빌려 쓰고 다시 가져다 놓을까, 고민했다. 독서실 앞에 놓인 우산 중 1개를 빌려 쓰고 집에서 내 우산을 들고 나와 빌려 쓴 우산을 다시 제자리에 놓으면 10분 이내 해결할 수 있을 거 같았다.


고민 끝에 마음을 접었다.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주인한테 양해를 구하지 않고 남의 물건을 쓴다는 게 옳지 않다고 판단했다. 대신 무작정 기다릴 순 없으니 아내에게 전화해서 우산을 들고 데리러 와달라고 부탁했다. 장대비를 피해 독서실 입구에 서서 기다린 지 5분쯤 지났을까. 독서실 안쪽에서 문이 열리며 중학교 3학년 생 정도로 보이는 앳된 외모의 여학생이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제 우산 빌려드릴까요?"


독서실 앞에서 비 때문에 옴짝달싹 못하고 있는 아빠와 딸이 안쓰러워 우산을 빌려주려고 나온 것이었다. 나는 고맙지만 가족이 우산을 가지고 오는 중이라고 대답했다. 그 당시에는 아이가 비를 많이 맞을까 봐 정신이 없어서 여학생의 배려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못했다.


1개월이 지나고 그날 내린 비 때문에 촉촉해진 바닥을 걸으며 독서실로 향하는 길목에서 문득 그날의 일이 떠올랐다. 동시에 그 여학생의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느껴져 마음 한편이 따듯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