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진실이 남을 탓할 일만은 아니었음을...
우리 집은 독실한 가톨릭 집안이다. 태어나자마자 아팠던 내가 건강하게 잘 자라고, 팍팍한 생활이 어찌어찌 유지되는 그 중심에 종교가 있었던 것 같다. 힘든 삶을 견뎌내는 원동력이기도 하고, 이해되지 않는 일들의 핵심이기도 하고 뭔가 복잡한 느낌이다.
20대까지만 해도 나는 신 앞에서 건방을 떨었는데, 내 자녀를 키우면서 종교에 의지하며 마음을 다스리려는 부모님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비록 냉담자지만....
우리 엄마는 초등학교 선생님이셨다. 어디 가서 엄마가 선생님이라고 하면 내 성적과 성실함이 보통 정도는 될 것이고, 집안도 보통 정도는 살겠거니 생각한다. 거기에 아버지가 자영업을 한다고 이야기하면 맨 처음의 오해는 조금씩 더 부풀려진다. 허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엄마의 직업이 선생님이기 때문에 넉넉하지는 않아도 규칙적인 수입이 있다는 정도? 적은 월급으로 여섯 식구가 먹고살아야 했기에 우리 집은 넉넉하지 않았는데, 경제관념이 약한 아버지와 큰집이라는 타이틀은 우리 집 살림을 주기적으로 흔들어놓았다. 몇 년에 한 번씩 날아오던 독촉장에 찍힌 돈이 어디에 쓰인 것인지 오빠와 나는 아직도 모른다. 엄마는 알고 계신지 그것도 잘 모르겠다. 먼저 물어본 적도 없고, 엄마한테 얘기를 들은 적도 없다. 애들을 봐주시느라 우리 집에 늘 오시는 엄마와 살림 이야기를 하다가 아버지 고향 친구분이셨던 아파트 상가 슈퍼 사장님 덕분에 어려운 시절 한 달 동안 외상으로 음식을 가져다 먹고 월급날마다 외상값을 갚았다는 말씀을 최근에 들었다. 나이를 먹고 엄마의 그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아버지보다 아버지 친구분이 우리 집 사정을 돌봐주셨다는 게 기막히기도 하고, 기막힌 만큼 아저씨께 감사하기도 하고 그랬다.
중학교 때 저녁을 먹다가 “엄마, 선생님이 엄마한테 체육진흥회 가입해달래 “라는 말을 했다. 그날 저녁 오빠한테 된통 욕을 먹었다. 오빠는 네가 전교 1등이냐고, 반장, 부반장이냐고 다그치며 가정환경조사서에 뭐라고 썼냐고 윽박질렀다. 엄마가 선생님이라고 썼다고 하니 집안 형편도 모르면서 체면부터 챙기는 너는 아직 멀었다며 구박을 받았다. 앞으로 엄마 직업에 “공무원”이라고 쓰고, 아버지 직업란에 무조건 “무직”이라고 적으라고 했다. 자기는 벌써부터 그렇게 적는다고. 어렸을 때 우리 아버지는 뚜렷한 일을 하지 않으셨다. 아는 후배와 함께 부동산을 하셨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냥 도와주는 정도의 일이었고, 그마저도 그 아저씨가 암으로 돌아가신 이후에는 그만두게 되었다. 이후에는 돼지 키우기, 포도재배, 생굴 판매를 하기도 했는데 모두 누군가를 도와주는 역할일 뿐 의미 있는 소득은 없었다. 스스로의 힘으로 일을 할 수 없는 건지, 하지 않는 건지 옛날부터 지금까지 나는 그게 너무 궁금했지만 대놓고 질문을 한 적은 없다. 어쨌든 무슨 일을 하든 소득이 0인 상태였으면 그나마 다행이었을 텐데, 그렇지도 않아서 사정 모르는 바깥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울 때가 많았다. 어디에 썼는지도 모르는 돈 때문에 많이 힘든 생활과 조금 힘든 생활이 반복되었는데, 그 생활 속에 아버지는 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초등학교때까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좋은 기억도, 나쁜 기억도 없다. 그냥 없다. 시골 외할머니네를 갈 때도, 오빠가 초등학교 고학년이었을 무렵 처음으로 갔던 경주에도 아빠는 함께 하지 않았다. 그때 경주에 다녀온 걸로 글쓰기 숙제를 하던 오빠가 여관에서 잘 때 남자가 자기 하나뿐이라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마음이 들었다는 부분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어렸을 때는 아버지의 부재가 자연스러웠는데, 내 아이를 키우다보니 우리 남매가 어릴때 뭉텅 사라져버린 아버지 자리의 어색함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돼지 키우기, 포도재배, 생굴 판매라는 단어가 아직도 기억나는 이유는 가정환경조사서 아버지 직업란에 내가 그렇게 썼기 때문이다. 저 단어를 쓰고 엄마 직업란에 교사를 적으면 어느새 나는 돼지농장 딸, 포도 과수원 딸, 수산업자의 딸이 되었다. 오빠가 깨달았다는 것을 나는 중학교를 졸업할 때쯤 알았다. 그래서 나도 고1 때부터는 아버지 직업을 “무직”이라고 적었다. 그때는 자존심이고 뭐고 없을 만큼 나도 집안 형편이 훤히 보였고, IMF로 모두가 힘들 때라 “무직”이라는 단어가 전처럼 부끄럽지 않았다. IMF로 다 같이 힘들어지는 게 어떤 면에서는 나만 튀지 않는다는 묘한 안도감을 주기도 했다. 지난 글에 적었듯이 그 안정감이 오래가지는 않았지만...
우리 부모님은 예나 지금이나 가톨릭 신자라고 하면 그 사람을 좋게 보는 경향이 있으시다. “성당 다니는 사람이 왜 그래?”라는 말을 들으면 예나 지금이나 어리둥절하다. 사람 사는 게 제각각이듯 종교도 그냥 각자 선택하는 것 아닌가? 어떤 사람이 어떤 종교를 믿는다고 생각했는데, 우리 부모님은 어느 종교 안에 어떤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 그 지점에서 늘 부딪힌다. 사춘기 때 우리 성당에는 나와 성향이 맞지 않는 친구들이 많아 툭하면 미사를 땡땡이쳤다. (그때는 그것도 사람을 보고 성당을 다닌다며 지적을 받았다.) 봉헌금하라고 받은 돈을 들고 집 근처에 있는 도서대여점에서 만화책을 빌려보다 미사가 끝나는 시간에 맞추어 집에 갔는데, 어느 날은 같은 도서대여점에서 오빠를 만났다. 그때부터는 서로의 비밀을 공유하며 적당한 시차를 두고 집에 가는 스킬을 썼다. 부모님은 성당에 적응하지 못하는 오빠와 나를 답답해하셨는데, 오빠와 나는 “성당, 천주교 신자, 가톨릭”이라는 말만 들어가면 맥을 못 추는 부모님이 답답했다. 6학년 때인지 중학교 때인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 우리 성당 주임신부님은 서예에 조예가 깊은 분이셨다. 우리 아버지는 성당 밖에서는 명함이 없는 분이셨지만, 성당에서는 늘 감투를 쓰셨다. 그때도 평신도 단체에서 어떤 직책을 맡고 계셨는데 신부님께서 “이 가정은 성가정입니다”라는 문구를 멋들어지게 써서 표구까지 하여 우리 집에 선물로 주셨다. 아버지가 자랑스러워하시며 액자를 가족들에게 보이는 순간 오빠와 나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누구를 위한 성가정인가?’ 내 기억으로 그날 오빠는 아버지한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린 내가 보기에도 액자 속 “성가정”이라는 단어가 상당히 거북스러웠는데, 고등학생이었던 오빠에게는 어땠을지... 그때는 그 거북함이 무엇이었는지 설명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성가정이라고 적힌 그 액자는 열녀문 같은 것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었던 우리 집이 톱니바퀴 돌 듯 돌아가는 이유는 엄마의 희생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엄마도 욕하고 싶고, 벗어던지고 싶은 순간이 있었지만 동네에서 “선생님”소리를 듣는 사람이라 어쩔 수 없이 참은 적도 많았을 것이다.
누군가의 일방적인 희생으로 돌아가는 집안 살림인걸 기껏 열 몇살인 나도 빤히 알겠는데 “성가정”이라니.... ‘앞으로도 계속 입 다물고 살아라’라고 윽박지르는 느낌이었다. 집에서는 손 하나 까딱 안 하는 할머니가 바깥에서는 세상 좋은 친절한 할머니인 것도 싫었고, 부모, 자식, 자신의 삶을 아내에게 짊어지게 하는 아버지가 미웠다. 나와 오빠는 주일도 지키지 않고 봉헌금을 받아 만화책 보는데 써버리는데 성가정이라니? 우리 아버지는 지금도 내 생일보다 세례명 축일을 더 챙기신다. 몇 년 전에 “우리 수희 하느님의 딸로 잘 커준 거 고마워.”라는 문자를 받았는데, 그 문자를 보고 어릴 때 성가정 액자를 본 것과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나는 하느님의 딸이기보다 우리 아버지의 딸이고 싶었다. 부모님의 신앙심을 모르는바 아니지만, 아버지의 그런 말은 내겐 책임 회피로만 느껴졌다. 그래서 성당이 더 싫어지기도 했다. 배우고 싶어 하는 피아노를 가르쳤으니 배운 것을 가지고 의미있게 써먹어 보라는 엄마 말씀에 중1때 1년 동안 저녁 미사 반주를 한 적이 있었다.
캄캄한 2층에서 혼자 오르간을 치려니 무섭기도 하고 심심하기도 했다. 미사 진행순서에 맞춰 반주를 해야 하기 때문에 틀리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모든 과정에 집중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반주를 하는 1년 동안 성서 말씀과 신부님 강론을 처음으로 주의깊게 들었는데,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는 20년 가까이 성당 맨 앞줄에 앉아 매일같이 미사를 드리면서 왜 인생을 저렇게 살까? 아버지는 또 왜? 중1인 나도 어렴풋이 이해하는 성서 말씀을 왜 우리 집 어르신들은 하나같이 모르는 걸까?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원치 않아도 종교만큼은 부모의 뜻에 따르라는 부모님 말씀에 꼭 해야 하는 판공성사, 대축일 미사는 꾸역꾸역 참석할 수밖에 없었다.
대학에 들어가면서 드디어 종교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 내 이득을 위한 얕은 마음으로 기도하거나 노력 없이 하느님께 기대지 않는다는 자부심으로 종교를 멀리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필요할 때만 종교에 기대지 않는 양심적인 성인입니다. 스스로 앞가림하기 위해 열심히 애쓰고 있으니 미워하지는 말아주세요.’ 하는 마음이었다. 돌이켜보면 오만함이 하늘을 찌르는 수준이지만, 그때의 나는 그랬다.
큰 아이가 3살 무렵이었을 때, 뜬금없이 주일미사가 가고 싶어 혼자서 동네 성당에 갔다. 자식을 키우며 감춰두던, 묻어두던 온갖 것들이 다 터져나와 마음을 헤집고 있을 때였다. '열심히 살았는데, 더 이상은 힘들어요.' 하는 마음이 가득하던 때였다.
NEVER MIND WHAT YOU'VE DONE
JUST COME HOME
그날 미사에서 탕자에 대한 복음말씀은 없었다. 그냥 오래간만에 드린 미사에서 내내 느낀 감정이 저거였다. '당신이 뭔데 우리집을 성가정이냐 마냐 하느냐며 원망하던 사춘기때의 비아냥'
'노력한 만큼만 얻으려 할테니, 건드리지 말라는 시건방'
'내가 잘사는 것은 내 노력의 댓가이지, 당신의 은덕이 아니라는 오만함'
이 모든 것을 한방에 압도하는 거대하면서도 안온한 느낌.
그날 미사를 하면서 정말 많이 울었다. 미사가 끝나고도 자리를 뜨지 못하고 한참을 더 울었다.
봉사자들의 성서 낭독, 신부님의 복음말씀, 강론에 나를 울릴 만한 어떤 내용도 없었다.
그냥 눈물이 났다. 눈물을 통해 그 동안의 못된 생각들이 씻겨나가는 느낌이었다.
'내가 잘나서, 내가 노력해서 이만큼 살아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네요. 그래도 그냥 지켜봐주셨네요.'
그날 처음으로 진짜 천주교 신자가 된 느낌이었다.
쥐어짜듯 만들어진 성가정의 이미지때문에 성당이 싫었는데, 결국엔 돌고 돌아 제자리로 온 느낌.
사람을 보고 성당에 다니지 말라는 엄마 말씀이 어렴풋이 이해되던 순간이었다.
우리집은 성가정이 아닌데, 왜 자꾸 그런 말을 갖다붙이냐고 욕하고 싶었다.
그런데, '보기 드문 방식으로 살고 있는 우리집 식구들, 우리 엄마한테 기분좋은 칭찬인 성가정이라는 말을 들려주고 싶었던 건가?' 요즘들어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오랫동안 병든 노부모를 수발든 늙은 며느리에게 "그동안 고생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하고 건네는 따뜻한 말같은...
성가정이 쓰여진 액자가 집에 오던 날, 오빠는 화를 내고 나는 빈정거렸다. 그게 엄마를 위하는 건줄 알았다.
어린 시절을 조금은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게 된 요즘, 그 때의 우리 남매를 보며 엄마가 위로받기보다는 슬펐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못 이기는척 받고 싶은 선물이나 용돈을 눈치없이 옆에서 내치는 얄미운 놈같은 짓을 했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출근하는 나를 대신하여 요즘도 우리집 아이들을 돌봐주시는 엄마께 감사드리고, 건강하게 오래오래 함께 하고프단 말씀을 드리고 싶다. 아이를 맡기게 된 후로 엄마의 건강을 염려하는 내 마음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의식하게 되어 "엄마 오래오래 건강하세요."라는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 순수한 마음으로 엄마의 건강을 염려하는 딸이 될 수 있도록 살림이든 육아든 어서 빨리 독립하고 싶고, 그 날을 위해 이놈의 코로나가 빨리 사라지길 간절히 소망한다. 슬픈 이야기가 아니라고 자신만만하게 시작했는데, "친정엄마"는 치명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