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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희 Feb 19. 2022

고백

짝사랑과 글쓰기

 대학 때부터 사회생활을 하기까지 4년 정도 혼자 좋아했던 남자가 있었다. 음악을 하던 사람이었는데, 심장이 아프다. 마음이 요동친다. 사랑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겠다는 마음을 그때 처음으로 경험했다. 나는 언제나 진심이었고, 사소한 감정들까지도 음미하듯 집중했다. 친구들은 그런 나를 많이 안타까워했다. 상상 속에 있는 사람을 좋아하는 거라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감정과 사건의 실체가 없어서 끊을 수 없는 거라고. 알고 보면 네가 생각하는 만큼 완벽하고 좋은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고. 그때는 그 말이 듣기 싫었다. 고백할 용기가 나지 않는 것은 사실이자, 핑계였다.

 스물다섯 살 어느 날, 20대의 한창 좋은 날들을 허비하는 내가 안타까웠던 친구들은 옆에서 응원해줄 테니 고백을 해보라고 했다. 알게 모르게 오래도록 내 마음을 표현해왔는데, 모른 척하는 그 남자가 점점 미워지던 터라 친구들의 말을 듣기로 했다. 그때쯤은 거절당해도 많이 속상하지 않을 것 같은 알 수 없는 뻔뻔함과 자신감도 생겼다. 많이 좋아했고, 많이 조심스러워했으니 이 정도는 표현해도 되겠지 싶은 마음도 있었다. 친구들과 맥주를 마시며 쑥스러움을 감출 용기를 장착한 후 전화를 걸었다. 전화통화를 하는 내내 옆에 앉은 친구가 내 손을 꼭 잡아주었다. 담담하게 그동안의 내 마음을 고백했다. 한동안 말이 없었다. 몰랐다고 했다.  몰랐다는 상대의 말이 친구들에게도 들릴까 부끄러웠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지?’ 집에서 결혼을 재촉하냐고 했다. ‘이건 또 무슨 말이야?’ 생각을 좀 해보겠다고 했다. 그동안 듣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앞으로도 듣지 못할 것 같아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내가 먼저 고백하는 거라 말했다. 지금 이 순간 너무 부끄럽지만 한편으로는 후련하단 말도 덧붙였다. 어떤 대답이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으니 최대한 빨리 대답해줬으면 좋겠다는 말로 전화를 끊었다.

 내가 말하는 동안 말없이 듣기만 하던 그의 태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제야 비로소 깨달았다. 눈물이 났다. 당황스러워할 줄은 알았지만, 몰랐다고? 술 마시고 불쑥 전화하는 남자는 그냥 그 여자를 만만하게 보는 것일 뿐, 그 이상의 관계는 아니라는 말을 애써 외면해왔다. 작은 친절에도 의미 부여하는 내게 그런 것은 성인들이라면 누구나 갖춘 매너라고 말리던 친구들의 말, 그동안 믿고 싶지 않았던 아픈 말들이 한꺼번에 진실로 판명되는 느낌이었다. 실패로 끝난 오랜 짝사랑이 슬퍼서, 감추고 싶은 부끄러운 민낯을 들킨 게 부끄러워 못 마시는 술을 마시며 많이 울었다. 옆에서 모든 것을 지켜본 친구들은 당장은 괴로워도 언젠가는 끝내야 할 일이었다고, 용기 낸 것 멋지다고 말해주었다. 분명히 잃는 것보다 얻는 것이 많을 거라며 꼭 안아주었다. 그때는 용기 낼 필요 없이 마음껏 사랑하는 친구들이 부러웠고, 없는 용기와 부끄러움을 끌어모아 고백했는데도 차이는 내가 초라했다. 그렇지만, 용기와 초라함은 의미 없이 증발되지 않았다. 내 감정과 생각, 현실감이 또렷해졌다. 그제야 착각 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내겐 글쓰기가 짝사랑하던 상대에게 고백하는 것과 비슷하다. 속으로만 생각했던 많은 것들이 활자화되면서 사소한 것은 사소하게 흘려보낼 수 있고, 슬픈 것은 슬픈 대로 애도할 수 있다. 완성된 한 편의 글을 나누며, 서로 위로하고 위로받는다.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아름다움, 감사함을 깨닫게 된다. 여러 맛이 섞여있는 젤리들 중에 내가 좋아하는 맛만 골라먹다 보면 어느덧 별 볼일 없는 맛들 만 봉지 안을 뒹군다. 감정도 그렇다. 내게 편한 느낌, 나한테 유리한 사건들만 꺼내어 곱씹다 보면 어느덧 나는 비련의 주인공, 영웅 서사의 주인공이 된다. 사실 그렇지 않은데, 그렇지 않다는 걸 누구보다 나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는데... 활자화되면서 감정과잉, 사실과 거짓, 모르고 스처지나간 일상의 아름다움이 드러난다. 마주하지 않고 피하기만 하면서 내가 필요할 때만 필요한 만큼 꺼내본다면 얼마나 깨닫고 알아차리며 살 수 있을까? 모험하는 게임을 하면 내가 있는 주변은 화면에 또렷하게 보이지만, 멀리 있는 곳은 뿌옇게 보인다. 가고자 하는 곳에 가야 비로소 주변이 보인다. 글쓰기도 그렇다. 써야 알고, 써야 보인다. 그래서 써보려 한다. 또렷하게 살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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