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부부의 최애 드라마 "응답하라 1988"
사실 나는 “응답하라 1988” 주인공의 세대는 아니다. 그렇지만, 이 드라마를 보면 어렸을 때 살던 모습이나, 분위기가 생각나서 유튜브나 다시 보기를 통해 자주 보곤 한다. 특히 드라마에 나오는 밥상 차림에 눈이 많이 간다. 그릇이나 상은 보잘것없지만, 수북이 담은 먹음직스러운 음식, 나누는 정으로 점점 채워지는 밥상의 모습은 요즘은 보기 힘든 것들이라 옛 생각을 하며 보게 된다. 난 급식 세대가 아니라 고등학교 때까지 도시락을 다녔는데, 집집마다 레전드 반찬이 있어 오늘은 어떤 반찬들이 모일까? 하는 기대감으로 설레기도 했다. “야 너 오늘 뭐 싸왔어.?" 하며 같이 먹는 도시락 멤버들과 대화를 주고받고 있으면 어느덧 수업시간 종이 치기도 했다.
80년대 생이어서 외둥이가 흔치도, 학원에 다니는 친구가 많지도 않았다. 그때는 드라마 속 주인공들처럼 집에서는 밥만 먹고 학교에 가는 시간을 제외하면 노상 밖에서 놀다가 엄마가 부르는 소리에 다들 집으로 들어갔다. 빗물에 모래를 타서 커피라고 하고, 빨간 벽돌을 돌로 빻아 잡초에 섞어 김치라고 낄낄대며 소꿉놀이를 하기도 했다. 나는 늘 옆 동의 어떤 남자애와 부부 역할을 했는데, 매일 하는 소꿉놀이에서 당연하듯 부부 역할을 하며 자연스레 노는 내 모습을 떠올리면 웃음이 나기도 한다.
요즘은 헬리콥터 맘이다 뭐다 부모가(주로 엄마가) 짠 계획대로 착착 움직이는 아이들이 많다. 나는 교사임에도 자식 교육에 그만한 열의도 없고, 무엇보다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의구심이 들어 아이들을 거의 내버려 두는 편이다. 그것이 불안감이 없다는 뜻은 아니어서, 전전긍긍하는 마음이 요즘 들어 자주 잔소리나 화로 튀어나오고 있다. 엄마의 마음으로 드라마를 보고 있으면, 밥만 챙겨주고 빨래만 해줘도 알아서 야무지게 잘 크는 주인공들이 신통방통하고, ‘다시 저런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다.’ 싶다가도 ‘ 도시락을 싸야 하는구나….’ 싶어 둘 중에 어느 것이 더 나은 걸까 의미 없는 저울질을 해 보기도 한다.
드라마에는 팍팍했던 80년대와 90년대 초반 우리네 부모님들의 고단한 삶도 많이 나온다. 부족한 부모로서의 자신을 자책하거나, 쪼들리는 형편을 속상해하는 부모님의 모습이 비춰진다. 자식들 앞에선 밝고 애들이 없는 곳에서 괴로워하는 부모님의 모습을 보며, ‘사실 내가 몰라서 그렇지 우리 아버지도 저러셨겠지.’ 하고 위안을 하기도 했다.
드라마에 나오는 친구들은 사는 모습도, 부모님의 직업도 다들 제각각인데 모든 집에 상처나 걱정거리가 하나씩은 다 있다. 그런데 친구의 상처를 대하는 주인공들의 말과 행동이 현실적이면서도 따뜻하다. ‘내가 선우였다면? 덕선이었다면? 택이었다면? 동룡이었다면? 정환이었다면?’ 각자 서로 다른 고민을하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는 모습을 보며 머릿속으로나마 그들의 삶을 배우려고 해 본다. 주인공들과 나와 가장 다른 점은 “받아들임”이다. 나는 아직도 “받아들임”이 안 되는 것 같다. 계속 화살을 다른 곳에 돌리고 싶고, 도망치고 싶고, 변명하고 싶다. 그래서 주인공들처럼 해맑지 않은 것 같다. 덕선이를 보면서 “나도 덕선이만큼 예쁘면 걱정 없이 저렇게 해맑았으려나?”하고 남편한테 물어본 적도 있었다. 이 드라마는 이야기, 소품, 연기력 모두 극찬을 받았다. 딱 하나 아쉬움으로 꼽혔던 것은 여주인공 덕선이의 수동적인 태도였다. 남자 주인공의 선택 때문에 인생이 달라지는 캔디 같은 여자 주인공이 요즘 시대와 맞지 않는다는 평을 본 적이 있다. 그런 기사를 보며 덕선이보다 밝지는 않아도 성실하게 열심히 살아온 내가 낫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해봤다.
작년에 읽었던 장강명 작가의 「열광 금지 에바 로드」라는 소설에 이런 말이 나온다. “예전에는 누구도 부모의 가난과 자식의 인성을 연결 짓지 않았다.” 맞다. 가난 때문에 자존심이 상하고 속상한 순간들이 많았지만, 움츠러들지 않고 묵묵히 내 갈 길을 갈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저거였다. ‘나라도 열심히 살면 돼, 나는 꼭 다르게 살 거야.’ 만약에 부모의 가난과 자식의 인성을 연결 짓는 시대를 살았더라면? 아, 만약 그랬다면 견딜 수 없었을 것 같고, 앞으로 나아갈 힘도 잃은 채 여태까지도 그저 그렇게 살고 있을 것 같다. 내가 싫어했던 그런 방식으로.
“누구네는 어디로 이사를 했다더라” 하는 말을 듣거나, 잘 사는 친구네 집에 놀러 갔다 오는 날이면 “엄마 우리는 언제 이사가?”하고 묻곤 했는데, 그때마다 엄마는
”이사 간다고 무슨 낙이 있니? 사는 건 다 똑같지. 엄마는 오래된 이 동네가 편하고 감사하다 “라고만 하셨다. 나는 내가 태어난 곳에서 결혼하기 전까지 죽 살았는데, 그땐 그게 참 싫었다. 다들 돈 벌어 신도시로 이사하는데, 우리 집을 비롯한 몇몇 집은 터줏대감처럼 계속 그곳에 살았다. 한 곳에 오래 산 덕분인지 동네 최고령인 우리 할아버지의 폐 끼치는 흡연습관도 은근슬쩍 무마되곤 했다. 할아버지의 침과 담뱃재가 뒤섞인 얼룩이 아파트 계단 창문에서 입구까지 이어지게 묻어있는 것을 보며 집에 들어설 때는 ‘우리 집이 3층이라 얼마나 다행인가?’ 싶기도 했다. 가끔 아파트 현관 지붕에 앉아 수세미로 할아버지의 담배 얼룩을 지우는 아버지를 보고 있으면 오래된 이 동네가 편하고 감사하다던 엄마의 말뜻을 알 것 같았다.
대학을 졸업하던 해 여행을 다녀와 늦잠을 자던 어느 여름 아침, 집에서 주무시던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요즘 세상에 집에서 임종을 맞는 사람이 드문 탓인지 부모님은 경찰 조사도 받으셨는데 한동안 그게 엄마에게 상처로 남았다. “아이고~ 이 집 아들 며느리 조사하면 진짜 사람도 아니다.”하면서 엄마를 위로하는 아주머니들의 말을 들었을 때, 처음으로 오래된 이웃의 감사함을 마음 깊이 느꼈다.
마지막 회에는 재개발로 인해 동네 사람들이 울면서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헤어지는 장면이 나온다. 우리 친정집도 몇 년 전에 재개발이 되어 작년에 새집으로 입주하셨다. 오랜 내 친구들이 부모님께서 드디어 새집에 사시는구나! 라며 축하를 해줘서 고맙기도 하고 멋쩍기도 했다. “우리 엄마 알고 보면 새집에만 살았어~ 예전 그 아파트도 분양받아서 들어간 거야~”하고 실없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우리 친정 동네는 여전히 낙후되고 소득이 높지 않은 곳이다. 이제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신 이웃 아줌마, 아저씨 중에는 돈 때문에 입주권을 팔고 더 좁고 오래된 빌라로 가신 분들도 많다고 한다. 엄마는 친하게 지내는 성당 아줌마들이 같이 입주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고 안타까우신지 아직도 그 얘길 하신다. 엄마의 그런 말을 계속 들으면 ‘엄마도 그때 한동네 살며 아줌마들한테 마음을 많이 의지하셨나 보다’ 싶어 마음이 좋기도 하고 아리기도 한다. 부모님의 새집에서 창밖을 보며 ‘여기가 원래 이게 있던 자리지, 저게 있던 자리지. 매년 내 생일이 다가옴을 알려주던 노란 개나리와 중간고사 끝날 무렵 한창 향기를 뿜어내던 라일락이 참 좋았는데….’ 하며 기억을 되짚어 보는 내게 깜짝 놀라기도 한다. 지긋지긋한 줄만 알았는데, 이거 뭐지? 사람들은 마무리가 어떤지에 따라 이야기에 대한 정서적 판단을 크게 바꾼다더니 그게 나였군 하면서 헛웃음을 짓는다.
남편은 시골에서 나고 자라 시시콜콜하게 집안 사정을 알고 사는 느낌에 익숙하다. 그래서 한동네에서 오래 산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이 오묘한 감정에 공감해 준다. 신혼집에 살림을 합치면서 중학교 때 산 오리털 잠바와 대학 입학 때 산 오리털 잠바를 자랑하며 누가 더 옷을 오래 입나 뻐기고, 어렸을 때 먹어본 과자 이름 대기, 유명한 관광지 중에 어렸을 때 가본 적 있는 곳 이름 대기 따위를 하며 낄낄거릴 수 있음이 감사하다. 비슷한 형편에서 비슷한 삶을 살며 서로의 지난날을 웃으며 얘기할 수 있어 좋다. 우리 부부는 정환이 아버지의 오래된 개그를 따라 하며 누가 더 비슷한지 애들 앞에서 내기도 한다. “우리 애들이 사는 요즘 세상도 저렇게 정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원래 애들은 내버려 두면 더 잘 크나?” 그런 얘기를 나누며 남편과 나는 아마 이번 주말에도 응팔을 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