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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희 Feb 09. 2022

1998년 어느 1박 2일

가난은 늘 상대적이다.

“수희는 뭐하러 불러?”

“그럼 이런 얘기를 우리끼리만 하자고? 쟤도 다 컸는데? 왜 딸 앞에서 이런 이야기 하려니 창피하긴 해?”

“수희야 너도 와 앉아. 너도 다 컸으니까 알 건 알아야지.”     

얼마 전 집으로 날아온 800만 원 독촉장과 관련된 일이라는 걸 알았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

모른 척 하긴 엄마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우편물을 집어오는 건 거의 내 일이었으니까

 ‘터질게 터졌구나...’

물론 800만 원은 그저 상징적인 숫자에 불과하다. 방아쇠가 오늘 당겨진 것일 뿐.     


 우리 집은 원래부터 가난해서 IMF라고 특별히 더 가난해질 줄은 몰랐는데, 그건 가난에 대해 한참 모르는 철부지 17살의 생각이었다. 엄마가 부르는 소리에 안방으로 들어가며 ‘이럴 때 왜 오빠는 군대에 있는 걸까?’ 생각했지만, 거의 동시에 학비 때문에 일부러 긴 공군에 입대했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대한민국에서 그래도 대접받는 입장인 고등학생 신분이라 그동안은 시시콜콜 집안 사정에 대해 알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저 엄마 넋두리에 양념 치는 역할이려니 생각하고 방에 들어갔는데, 이번엔 그게 아니었다.

 들어오자마자 나가고 싶어지는 답답한 방 안의 공기와 침묵.     


“엄마는 이제 힘에 부쳐서 힘드니까 수희 네가 결정해. 부모니까 네가 대학 졸업할 때까지 공부는 마치게 해 줄게.” ‘이게 뭐지?’ 입버릇처럼 엄마 힘들면 이혼해도 괜찮다고 먼저 말하던 나였지만, 막상 엄마의 말로 그 얘기를 들으니 이게 뭔 일인가 싶었다.

 그동안 크고 작은 금전 사고가 터질 때마다 오빠와 나는 알고 있어도 모른 척했다. 그게 그나마 부모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굳이 내가 알고 싶지 않은, 그러나 이미 알고 있을 법한 얘기를 나서서 말하고 싶어 하는 엄마를 보면서 ‘이제 정말 끝이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기죽은 듯한 아빠의 모습,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라는 엄마의 말에 나는 더 자극적인 표현과 단어를 생각하려고 머리를 굴렸다. 강한 충격요법으로 다시는 아빠가 이런 일을 만들지 않길 바라는 마음, 나도 어쩔 수 없는 김 씨 집안 자손이라 욕이라도 같이 먹으면 속이라도 시원해질 것 같은 마음. 뭐 그런 마음이었다. 그렇지만, 솔직히 말해 그때 내가 가장 많이 한 생각은 ‘엄마가 나를 선택해줬으면, 아빠를 따라가면 열심히 공부해도 대학 근처에도 못 갈 것 같은 불안감, 이미 엄마가 선택을 마쳤으면 어떡하나?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게 과연 이 현실을 벗어나기 위한 좋은 방법이 맞긴 맞는 건가?’ 이런 것들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니 그냥 흔적 없이 사라지고 싶었다.


나는 그날 “빈대”라는 말을 썼다. 이 집에서 엄마가 아닌 나머지 가족들은 빈대라고, 빈대 같다고. 나 스스로도 빈대 같아서 견딜 수가 없다고. 나도 그걸 알겠는데, 왜 아빠만 모르냐고 악다구니를 썼다.

 어떻게 잠들었는지 기억도 안 나지만 이튿날 학교 갈 시간이 되어 집을 나섰다. 평상시엔 열일곱 정거장이 넘는 먼 등굣길이 힘들었지만, 오늘 같은 날은 오래도록 멍하니 있을 수 있어 감사했다.           


“야~~ 쑤이~”

“.....”

“어, 미안, 야 내가 부르기만 했는데 갑자기 울면 어떡해?”

“... 미안, 나도 몰라. 우는 건 너 때문이 아니야. 갑자기 나도 왜 이러는지 모르겠네”     


 수업시간 내내 엎드려 울기만 했다. 소리 내어 울기도 하고, 그냥 말없이 엎드려 있기도 하고 평소에 열심히 공부하는 편이었고, 성적도 나쁘지 않아 선생님들 그 누구도 그날 내게 왜 그러냐고 묻지 않으셨다. 그건 참 두고두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한 자세로 너무 오래 있었더니 머리가 띵했다. IMF를 겪은 이듬해 고등학교에 입학한 우리들은 대부분 사연 하나쯤은 가지고 있었다. 사춘기에 갑자기 겪게 된 가난에 대해 무용담처럼 늘어놓는 대화가 어색하지 않았다.


우리 학교는 대우자동차 근처에 있었는데, 아침 등굣길마다 버스 안에서 대우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이 시위하는 모습을 보았다. 3교시쯤 끝났을 때였나? 쉬는 시간에 일본어 선생님이 들어와 큰 소리로 물었다.

 “대우자동차 다니시다가 최근에 그만두신 아버지 있는 사람 손들어 봐!”

 여기저기서 “왜요?”하는 소리가 들렸다. 혹시라도 시위하는 아버지한테, 아니면 시위하는 아버지의 딸인 자신에게 불똥이 튈까 경계하는 목소리였다.

“당진 향우회에서 대우자동차 해고노동자 자녀에게 장학금을 준다고 하니 해당되는 사람은 이번 주까지 증빙서류 떼 오도록”

 아까의 경계하는 목소리는 부러움의 탄식과 안도의 목소리로 뒤섞였다.


 ‘대기업에 다니는 아버지를 둔 친구들은 이럴 때도 유리하군.’ 당진 향우회는 당진 사람한테 주면 되지 왜 대우자동차라는 기준을 붙였는지 당진 사람도 아니면서 괜히 기분이 상했다. 우리 반에는 왕년에 꽤 잘살아서 동아아파트 50평대에 살다가 갑자기 좁은 빌라로 이사 갔다고 속상해하는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가 달라진 집에 대해 하소연할 때, 원래부터 그런 집에 살았던 나는 대체 어떻게 대꾸를 해야 하나 난감하기도 했다. 나는 그 아이가 갑자기 바뀐 현실에 대해 한탄하는 걸 들으며 부러웠던 적이 더 많았다.


‘원래 주욱 가난했던 사람이 더 불쌍한 걸까? 아니면 부자로 살다가 갑자기 가난해진 사람이 더 불쌍한 걸까?’

 우리 집은 예나 지금이나 가난해서 갑자기 가난해져서 속상한 일은 없으니 감사해야 하는 건지... 아니다. 이제 곧 더 가난해질 수도 있으니 나도 추락하는 그 마음을 조금은 짐작해 볼 기회가 생길지도..

 장학금은 가난할수록 받기 유리한 것인 줄 알았는데, 대기업에 다니는 아버지를 두었는데 갑자기 가난해진 사람이 더 유리한 희한한 일을 경험하니 어안이 벙벙했다. 세상이 책에서 배운 대로 굴러가는 것이 아니라는 걸 맛봤다고나 할까?



 어른이 되어 뒤에 붙는 “만원”을 떼고 돈에 대해 말할 때, 가끔씩 남편 차의 GM엠블럼이 눈에 들어올 때, 부평역을 지나며 이제는 낡은 아파트들을 볼 때 가끔 그날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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