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방학을 하면 외가에 가곤 했다. 그러다가 외할머니께서 연세가 들고 큰 외삼촌댁으로 가시게 되면서 일 년에 한두 번 큰 외삼촌 댁에서 모이게 되었다. 처음엔 외갓집 식구들 모임에 가면 신기한 음식도 먹고, 넓은 집에서 놀다 오는 재미가 있었다.
그러다가 고등학생 때 즈음 처음으로 ‘우리 집만 가난하구나.’란 생각을 했다. 사촌들이 외국으로 가족여행을 다녀왔다는 얘기를 하거나, 과외를 받는다는 얘기를 하면, 다른 세상 이야기 같았다. 모임을 마치고 집에 갈 때는 집집마다 각자 가져온 차를 타고 가는데, 우리 집 식구들만 하나, 둘 다른 차에 흩어져 터미널까지 얻어 타다가 터미널에서 표를 끊어 집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모르는 동네의 길 가에 덩그러니 서서 4명이 될 때까지 기다리는 그 어색함이 부끄러웠다. 헤어지는 순간 매번 우물쭈물하는 아버지의 소맷부리를 잡아챈 적도 있었지만, 이산가족처럼 흩어졌다가 터미널에서 만나는 패턴은 늘 똑같았다. 처음 한두 번은 그러려니 했는데, 몇 번 반복되고 보니 자존심도 상하고 외갓집 식구들 모임에 가고 싶지 않았다.
크면서 ‘우리 집안에는 왜 괜찮은 남자 어른이 없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사회에서 나름대로 자리 잡고 잘 사는 외삼촌들을 보면서 번듯한 아버지를 둔 사촌들이 부럽기도 했다. 외사촌들과는 위아래로 차이가 많이 나서 나와 비슷한 또래는 없다. 그건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내 또래 외사촌이 있었더라면 진즉에 내 질투심을 들켰을 것이다. 사촌들이 입시를 망치면 ‘돈을 저렇게 들였는데, 저것밖에 못하나?’ 하며 속으로 비아냥대기도 하고, 반대로 결과가 좋아도 ‘나라도 그 정돈하겠다.’하며 깎아내리기도 했다. 사촌들이 우리 집에 대해, 우리 아버지에 대해 단 한 번도 무시하는 기운을 내비친 적이 없는 데도 나는 늘 마음속으로 외삼촌네와 우리 집을 비교했다. 편견 없이 푸근한 마음으로 아무렇지 않게 나를 대하는 그들의 마음씨나 행동이 나는 편치 않았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전혀 모르는 어린 시절에도 아버지의 말은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성인이 되어 외갓집에서 오가는 어른들의 대화를 듣고 있으면 가끔 화가 나기도 했다. 조용조용히 오가는 대화 속에 “저기 저”로 시작하는 아버지의 말속엔 늘 친구들만 등장한다. 큰 매형의 말에 예의 상하는 맞장구 정도에도 흥분하며 말도 안 되는 내용을 큰 목소리로 떠들고 있는 아버지를 보고 있노라면 가난한 것은 창피한 축에도 못 끼는 것 같은 모멸감을 느끼기도 했다.
우리 집은 인천인데, 7남매의 둘째이자 장녀인 엄마는 외삼촌들이 대학생일 때 1년 이상씩 돌아가며 데리고 살았다고 한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가 엄마한테 왜 그리 당당한지 난 그게 늘 의문이었는데, ‘외삼촌들을 데리고 있었던 것도 그 이유가 되었나?’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외삼촌네와 우리 집이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 뒤에 딸에게 그런 부탁까지 했던 외할아버지나 외할머니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 원망이 살림 밑천으로 자라온 엄마의 삶이 딱해서라기보다 내 질투심 때문인 것 같아 드러내지 못했을 뿐.
나이가 드니 사촌들 간의 나이 차이가 학생 때만큼 멀게 느껴지지 않아, 가끔 연락도 하고 왕래도 하며 지낸다. 독립을 하기 전에 나는 늘 고모네 집 아이였는데, 결혼을 하고 새 가정을 꾸린 후에는 드디어 내가 그냥 “내”가 된 것 같다. 나는 그게 참 좋다. 참기 힘들었던 그때의 대화, 그때의 분위기가 점점 희미해져서 좋다. 이제는 나도 삐딱한 마음 없이 사촌들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축하해 줄 수 있다.
그런데 이게 성숙함인지 자신감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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