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2.29.
예상 소요시간 16분, 인두루필리역까지 금방 갈 것 같았다. 다만 새로운 문제에 봉착했을 뿐... 무슨 브리즈번 Train은 버스처럼 목적지에 다다르기 전에 버튼을 눌러야 하는 게 아닌가? 초행길에 언제 도착할지 모르니 한 손에는 구글맵에 '현재 위치 표시'를 계속 업데이트하며, 나머지 손으로는 입구 근처에 세워둔 캐리어며 짐보따리를 끌어안고서 마음속으로 '언제 눌러야 하나..'만 외우며 얼른 도착하기만은 기다렸다. 온몸을 감싼 긴장감이 민망할 정도로 같은 행선지로 가는 다른 사람 덕분에 버튼을 누르지 않아도 됐고, 드디어 인두루필리에 도착했다.
하나의 문제가 끝이 나면 언제나 새로운 문제가 기다리고 있다. 이 시점에서는 스스로 문제를 만든 꼴이었지만 말이다. 이미 Google map이 알려준 대로 가면 될 일이지만, 불현듯 내가 호주를 온 이유 중 하나가 영어였단 게 떠오르고 나니 이 한적한 시골에서 정도는 사람에게 물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왠지 모를 자신감이 올라섰다. 플랫폼 끝에 엘리베이터에 올라타고 역사로 올라간 뒤, 뜬금없이 역무원에게 길을 물어봐야겠다는 마음이 생겼다. 친절한 Google map에서는 목적지까지 가는 길이 고대로 나와있기에 그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될 일이지만 왠지 모르게 여태까지 Google map이 주던 불편함이 갖가지 떠올랐다. Rd니 St 같은 영어로 된 지명이 첫 번째요, 한 번씩 마주하는 지도를 가로지르는 공중부양 안내 길을 볼 때면 이건 지도보다 기도가 필요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고, 국내 지도앱과는 사뭇 다른 느낌의 Google map을 마주하고 있을 때면 '나는 외국에 있다'라는 당연함과 마주할 때 공포감 같은 게 밀려올 때도 있었으니, 기왕지사 이렇게 된 거 출구도, 길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사람에게 물어보는 게 더 안전할(?) 거란 합리화에 이르렀다. 게다가 숙소 체크인치곤 어차피 이른 시간이고, '앞으로도 (영어로) 물어볼 일 많을 텐데..' 하는 생각과 맞물려 '한적한 직원에게 물어보자'라는 결론을 내렸다. 물론 내가 쓸 수 있는 질문 패턴은 단 하나,
"How can I get to Finney Rd?? ^^??"
질문하기가 무섭게 뭐라 뭐라 말씀해 주던 남자직원분, 뭐라 하는지 모르겠어서 어색한 yes로만 받아내는 내 모습에 답답했는지 갑자기 사무실을 박차고 나오며 캐리어 위에 A4용지 하나를 펼쳐 보이며 설명을 이어갔다. 바로 Train station이 포함된 Indooroopilly 지도였다.
'이쪽으로 나가서, 응, 아, 쭈욱? straight? okok'
영어는 못 알아먹겠는데 이미 지도앱으로 예습해 놓은 길이라 설명을 찰떡같이 알아먹었다. 갈랫길이 헷갈릴까 봐 형관펜으로 찐~하게 표시해 준 그때 직원분, 성함은 모르지만 이 글을 빌어 다시 한번 감사인사 드립니다.
질문 한 번 했을 뿐인데... 전날 밤부터 짓누르던 우울감이 씻은 듯이 사라진 기분이 들었다. 이래서 꿀꿀할 때 뭐라도 하고 움직이란 말이 있는 모양이다. 그 뿌듯함도 잠시, 문득 새로운 숙소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을지 약간의 불안감이 슬금슬금 올라왔다.
지도상에 숙소로 가는 길은 너무 쉬워 보였다. 도로를 따라서 직진, 800m, 까짓것 1킬로쯤이야 라는 생각이 컸다. 그런데 큰 도로길을 마주하고 나니 잘못된 선택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오르막, 맨몸이었다면 모를까 꽉 찬 28인치 캐리어를 밀고 가야 한다면 상황이 아주 달라졌다. 몇 발자국 떼다 보니 동네 뒷산을 캐리어를 밀며 올라가는 기분이 들었다. '아까 그냥 기다려도 버스 오는 거 타고 갈걸..'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기껏해야 버스 2-3 정거장이면 도보랑 비슷하겠다며 교통비도 아끼고 체력도 길러보자는 나의 각오는 이미 온몸에서 줄줄 흐르는 땀과 함께 모두 씻겨흘려가고 말았다.
'직원 아저씨.. ㅠ 이렇게 오르막이란 얘기는 없었잔수?.. ㅠㅠ;;'
('덜그르르를르르르르를…')
캐리어를 밀고 끌고 당기며 계속 길을 갔다. 이 정도로 돌아가면서 캐리어 바퀴가 아직까지 고장 안 난 게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도보로 11분 도착한다는 800m였는데, 이건 뭐 2-3km 행군이 따로 없었다. 한국의 12월, 아 여기는 한여름이었지? 가만히 있어도 쪄 죽을 날씨에 이 막노동을 하다 보니 다른 것보다 시원한 물 한 잔 생각이 그렇게 간절했다. 지나가며 대문 주변에 적힌 주소 보며 '다음인가? 조금만 더, 조금만 더'를 외치면서 드디어 목적지 주소에 도착하게 되었다.
확실히 낡았다. 어제 본 파크랜드가 '와 이런 곳에서 살고 싶다'였다면, 여기는 '이 집만은 아니었으면 좋겠다'하는 생각이 들었다. 얇은 목재로 덕지덕지 집이란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숙소, 허름한 정도가 예전에 살던 스래트 한옥집보다 못한 모양이었다. 속으로 깊은 한숨이 나왔지만 그 쑈를 하며 여기까지 와놓고 더 이상 갈 곳도 없다는 생각에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나마 위안이 되었던 건 잔디 깎는 소리에 묻히긴 했어도 안쪽에서 왠지 모를 웃음소리가 함께 들리는 것 같아 조금이나마 희망을 품게 됐다.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땀 좀 봐!"
대망의 숙소 사람과 첫 만남. 한 청년이 어제 아파트의 사람처럼 주의사항을 읊지 않고, 고생 많으셨다고 인사를 건네는 게 아닌가? 덩달아 잔디 깎고 있던 아저씨가 "오늘 온다고 한 그 친구인가? 반가워!"하고 인사를 해주셨다. 이런 걸 보면 시설도 시설이지만 결국 사람이 우선이구나 하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순식간에 긴장감이 풀리고 나니 그제야 온몸에 든 갈증이 솟구쳐 말이 튀어나왔다.
"혹시, 시원한 물 한잔 마실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