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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여자 Aug 20. 2015

순간을 기억해

여행을 생활처럼 생활을 여행처럼


 오후 4시. 퇴근까지는 약 두 시간 남짓 남았다. 하루 종일 이 시간만을 손꼽아 기다려왔다.
우리 부서 박 차장이 저 멀리서 나의 선배인 강대리를 부른다. 왠지 불길하다. 나의 불길한 예상은 빗나간 적이 없다. 오늘 우리 부서의 회식을 감행할 터이니 우리의 의사를 물어보라고 했단다.
월요일부터 부서 회식이라고? 순간 우리는 정적에 휩싸인다. 눈치 빠른 강대리, 사태를 해결해 주겠다며 용감하게 박 차장에게 간다.
누구는 몸이 안 좋고, 누구는 선약이 있어 오늘 회식 참석은 힘들 것 같다고 말한다. 몸 안 좋은 역할을 맡은 나는 갑작스레 혼신의 힘을 다해 깊은 내면의 연기를 펼친다.
내가 원하는 건 당신의 비생산적인 설교를 들으며 값비싼 한우를 먹기 보단 소박한 안주라도 마음 맞는 친구와 소주 한 잔 기울이며 진심 어린 걱정과 충고, 우리가 공유할만한 고민을 나누는 것이다.
내친 김에 다음날 쉬겠다며 연차 신청서를 작성한다. 박 차장은 내가 단지 아파서 쉬는 줄 알았겠지만, 수요일에 휴가를 떠나는 박 차장을 화요일에도 안 볼 수 있다는 철저한 계산에서 나온 신의 한  수였다.





결혼은 성공한 삶의 필수조건 인가요?


뜨끈한 나가사끼 짬뽕에 소주 한 잔 하며 세상의 모든 근심을 털어낸다.

 꿈같은 칼퇴를 이루어 내고는 친구와 소주 한 잔을 기울인다. 우리는 늘 가벼운 수다로 시작해 취기가 오를수록 서로의 정리되지 않은 생각과 복잡한 심경들을  이야기한다.
 우리의 주제 중에 단연 화제는 결혼. 우리는 이제 막 30대에 접어든 결혼 적령기의 여자이고, 주변에서 늘 결혼 안 하냐는 말을 들어야 하니깐.
 작년 여름, 스물아홉 살이던 나는 6년 넘게 이어져 오던 연애의 종지부를 찍었다. 오랜 시간 만나왔지만, 서로의 성격이 달랐고, 서로가 추구하는 가치관이 달랐고, 무엇보다도 결혼에 대한 생각과 시기가 너무나 달랐다.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다. 치열했던 전쟁이 끝이 나고 나에게는 평화와 자유가 찾아왔다. 하지만 그것은 새로운 고통의 시작이기도 했다. 주변의 어쭙잖은 걱정과 간섭들. 결혼을 준비해야 할 여자가 풍족한 가정환경과 안정적인 직장의 남자와 이별을 결심했다는 사실을 마치 자신들의 세계에 곧 종말이라도 찾아올 것 같은 깊은 탄식을 쏟아낸다.

제 나이에 해야 할 일은  결혼뿐만이 아니에요! 전 수많은 가능성 중에 결혼이 아닌 다른 가능성에 근접해지려 할 뿐이라고요!




넌 지금 초록불이다. 직진해라.
여자3이 전주여행 중 청년몰의 소소한 무역상에서 사온 엽서

 오랜만에 세 여자가 모였다. 오랜만의 오프라인 만남이라 우리는 들떴고 즐거웠으며 그 흥을 감추기 힘들었다. 서로가 공유하는 추억을  이야기했고, 현재 각자의 삶을  이야기했으며, 가까운 미래에 계획하고 있는 수많은 일들에 대해 서로의 의견을 물었다. 이야기가 한창 무르익을  때쯤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여자 3이 여자 1과 나에게 엽서 한 장씩을 내밀었다. 얼마 전 전주여행을 다녀온 여자 3이 우리에게 하고 싶었던 말들을 각각의 엽서에 담았다고 했다.

GO! 너에게 '지금은 초록불이다'를 말해주고 싶다. 늘 좀 직진해라. 주춤하지 말고, 늦었다 생각 말고 서른부터다. 이제 시작하자. 일어나라. Right now!"

  이미 녹색불이 끝나고 황색불이 켜져 갈까 말까를 고민하고 있던 나에게, 아직까지 나의 인생에는 녹색불이 켜져 있다고 알려주는 너. 나는 지금부터 다시 시작한다.



여행을 생활처럼, 생활을 여행처럼


 세 여자의 만남은 밤 늦게까지 이어졌고, 결국 우리는 한 침대에서 잠을 청했다. 원래라면 여자 1의 덕질을 함께하는 남편의 자리였지만, 그 날만큼은 우리에게 순순히 자리를 내어주었다지. 오랜만에 친구 집에서의 외박찬스는 10대 소녀로 돌아간 것 마냥 즐겁고 행복했다. 이제는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나이에서 벗어났지만, 그래도  그때의 스릴과 쾌감이 남아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아침을 차려주는 친구 엄마 대신에 아침을 차려주는 친구의 남편.

여자1의 남편이 타준 모닝커피. 감사!

 간밤의 수다가 부족했던 우리는 전날의 과음상태를 툴툴 털어버리고 가까운 계곡으로 장소를 이동한다. 간간이 불어주는 바람 덕에 8월 한여름의 무더위는 잊은지 오래다. 우리는 두껍게 썰어온 삼겹살을 숯불 위에 올려 노릇노릇 구워냈다. 아뿔싸. 젓가락을 안 챙겨온 허당들. 다행히도 옆자리 인심 좋은 아주머니께서 젓가락도 인원수에 맞춰 선뜻 내어주시고 파전에 김치까지 나눠주신다. 당연히 우리는 잘 구워진 삼겹살로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예상치 못한 돌발상황과 이 덕분에 일면식도 없는 타인이 여행지에서의 반가운 인연이 되니, 이 또한 여행의 묘미가 아닐까.

 배불리 먹고는 대여한 평상 위에서 낮잠을 한 숨잤다. 한량이 따로 없다. 이 날 만큼은 우리 부서의 공공의 적인 박 차장, 시집 가라는 엄마의 잔소리에서도 벗어나 나만을 위한, 우리만을 위한 한적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을 바라보며 셋이 누워 있자니 콘크리트 천장을 바라보며 누웠던 어젯밤과는 또 다른 기분 좋음이 느껴진다.







길 위에서 알지 못할 방향 때문에 시간을 쓰는 건 바보스런 일이다. 눈 앞에 걸어야 할 길과 만나야 할 시간들이 펼쳐져 있는 사실만으로 여행자는 충분히 행복하다.
 -곽재구(포구기행)-

 남들이 맞다고 하는 방향을 찾기 위해 갈팡질팡 흔들릴 필요 없다. 나에게는 지금 눈 앞에 가야 할 길과 만나야 할 시간들이 분명하게 있다. 그 길 위에서 어떻게 걸어갈 것이며 그 시간들을 어떻게 채워 나갈지는 나의 선택에  달렸다.

 매일 보는 익숙한 풍경도 여행이라는 색깔을 입히면 나에게는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여자 2가 꾸며나갈 [순간을 기억해]는 직장상사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거의 말단 사원이자, 곧 노처녀로 향해가는 여자 2의 소소한 여행담이나 생활의 재발견 등을 담아낼 예정이다. '여행을 생활처럼, 생활을 여행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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